[인천공간탐사] 아이들이 함께 한 공간, 송림동 계명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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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간탐사] 아이들이 함께 한 공간, 송림동 계명원터
  • 김현석(시민과대안연구소 연구위원)
  • 승인 2014.07.22 07:1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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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in]-[시각] 협약 '동구 발품' 연재
〈1960년대 계명원 전경〉

대학노트에 빼곡히 적은 일기

2007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부평시내 한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김 모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첫 대면이었다. 손에는 낡은 대학노트가 몇 권 들려 있었다. 노트에 적힌 걸 컴퓨터에 옮겨줄 사람을 찾다 여기까지 발걸음을 옮겼다고 했다.

노트를 들춰보니 흘려 쓴 글씨가 가득했다. 한자(漢字)도 적지 않아 읽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 보였다. 꽤 긴 시간동안 적어 놓은 일기라 분량도 만만치 않았다. 수월한 작업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흥미가 생겼다. 인천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던 원장의 일기라니, 그것도 1950년대 초부터 시작하고 있어 정리할 만한 가치가 충분해 보였다. 무엇보다 일기장의 주인 양계석(梁啓石) 원장은 경기도청 후생관을 거쳐 선감도 ‘부랑아 수용소’에서 부원장으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펜션으로 가득 찬 유원지가 됐지만 선감도는 일제강점기 선감원이라는 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일제는 ‘부랑아’라는 이름으로 소년들을 붙잡아다 이곳에 감금해 놓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선감원에 근무했던 일본인의 아들이 〈아! 선감도〉라는 소설을 발표해 부친이 저지른 일에 대한 반성을 대신하기도 했지만, 아직 선감원의 실체는 제대로 밝혀지지 못했다. 광복 후 선감원은 계속 이어졌고 여전히 ‘부랑아’들을 수용하는 복지시설로 운용됐다.

양계석 원장의 일기장을 만나기 얼마 전까지 선감도에 관한 자료를 추적하다 자료의 벽에 부딪혀 멈춰 있을 때라 내심 흥분되기도 했다. 이 안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지 기대가 컸다.

진로아파트가 들어선 언덕

양계석 원장의 일기장을 다시 떠올린 건 얼마 전의 일이다. 박문여자고등학교 맞은 편 언덕을 둘러볼 때였다. 낮은 구릉이긴 해도 부지가 꽤 넓은 편이라 뭔가가 있었을 만한데 이렇다 할 흔적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돌아갈까 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인근 구둣방에 들어가 물어보니 주인아저씨가 계명원이 있던 곳이라고 무심하게 말한다. 일기를 옮겨 적는 작업을 끝낸 후에도 사진으로만 봤을 뿐 계명원터를 찾아가 보지는 못했다. 송림동 어디쯤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여기가 그곳이라는 말을 들으니 잊고 있던 친구를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길거리에서 만난 주민들도 계명원이 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계명원은 1996년 강화도로 이전했다. 양계석 원장의 가족들이 지금까지 맡아 운영중이다.

송림진로아파트는 남쪽으로 난 길을 경계로 남구 숭의동과 맞닿아 있다. 주변보다 약간 높은 구릉지대다. 언덕 밑으로 상가들이 둘러싸듯 위치해 있고 언덕 한가운데 아파트가 들어섰다. 진로아파트의 사업계획승인일은 1996년 7월 10일, 사업승인년도는 1999년이다. 계명원터에 그대로 들어섰지만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일제강점기에는 여기에 일본인 목장이 있었다. 양계석 원장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일본인들이 쓰던 건물을 개조해 계명원을 설립했다.
 

〈지금은 진로아파트가 들어선 계명원터〉


“이 아이들을 어이할꼬”

양계석 원장은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1950년 10월 15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동인천 배다리 골목길을 지나칠 때였다. 무엇에 걸려 넘어질뻔 하였다. 꼭 사람을 밟은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어린아이 둘이 꼭 부둥켜 안고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그 질퍽한 길바닥에 그냥 누워 있었다. 아마 부모 잃고 며칠간 못 먹어 허기져 쓰러진 아이들 같았다. 이런 날 그냥 두었다가는 틀림없이 죽을 아이들이다. 아 이아이들을 어이할꼬! 길거리에 널려있는 것이 이런 아이들이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그냥가면 틀림없이 죽을 터인데 어찌 사람으로 그냥 갈 수 있을까? 그러나 내 목숨 하나도 부지하기 급급한 전쟁 중에 내가 무얼 어찌 할 수 있나 하는 망설임도 강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배운 사람으로,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앞뒤 생각도 없이 어린이 하나는 업고 하나는 어깨를 부축하여 삼십분 정도 걸어서 송림동 집에 왔다”

이후 한 명 두 명 아이들이 늘어나더니 두 달 만에 ‘송림동 집’에서 8명의 고아들을 돌보게 되었다. 길에서 데리고 온 애들이 네 명, 교회 목사와 파출소에서 맡긴 아이들이 네 명이었다. 이듬해에도 창영교회에서 임시로 거주하던 아이들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하고 이곳저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요구해 왔다. 양계석 원장은 결국 송림동에 계명원을 짓는다.

“송림동 계명원 자리는 일제시대 소먹이는 목장터였다. 강당자리가 축사였고 숙사자리는 인부들의 숙소가 있던 곳이다. 급하게 보육시설로 꾸미다 보니 여기저기 손봐야 할 곳이 너무나 많다. 주변이 온통 잡초 뿐이다.”(1953. 5. 2)

시작은 초라했지만 점차 건물을 늘렸다. 무작정 짓기보다 먼 미래를 보면서 ‘생애를 바쳐야 할 일터’라는 생각으로 강당, 창고, 식당 등을 세워 나갔다. 그래서 이곳이 ‘한국에서 제일가는 동산’이 되기를, ‘비록 규모는 작을지라도, 부모없는 어린 것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아늑한 집’이 되기를, 양계석 원장은 원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운영 자금을 만드는 것도 문제였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갈등도 많았다. 양계석 원장은 고아들을 위해 ‘사치스런 체면이나 양심’까지 버리며 고군분투하다 1989년 사망했다. 그리고 계명원은 개발에 밀려 1996년 강화도에 새 둥지를 틀었다.

송림동 계명원터는 인천의 전쟁 고아들이 머물던 땅이다. 광복 후 선감도의 경험 속에서 아이들이 희망을 갖고 살기를 바라며 건설한 ‘약속의 땅’이다. 양계석 원장의 개인사 또한 예사로운 삶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선행으로만 치부해 버리기에는 그 무게가 너무 크다.

※ 양계석 원장의 일기는 〈아이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2008)라는 제목으로 편집·출판되었다.
 
 
〈계명원 입구는 지금은 아파트 정문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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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민 2014-11-16 23:38:36
개명원자리를 보니감회 가 깊으네요 양게석 원장님은 선감학원 부원장으로 게시다가
계명원을 만드시면서 인천으로 오셧읍니다 원장님은 기독교신자로서 인자하신 선생님였읍니다
선생님은 저의 아버님과 같이 선감학원에 게섰떤분입니다 제가 학교단일때 가끔 가서 풍금
치던 생각이 드네요 2014ㅡ11ㅡ16;23;40

이창주 2014-07-23 10:04:44
박문여중고 앞의 계명원. 어릴적 동네에 있던 고아원.
당시 고아원은 철조망으로 쳐져있었고 평지보다 1~2미터쯤 높은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진로 아파트가 들어섯지만,지금도 평지보다 조금 높은 그흔적은 남아있지요.
당시, 고아원 아이들은 모두들 서림국민학교에 다녔습니다.
고아원에 있던 아이들도 50대후반 60대의 나이가 되었겠군요.
그때는 제대로 뜻도 모르면서, 고아원 아이들로 불리워졌었는데...
수십년만에 보는 계명원 사진을 보니 감회가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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