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공장 마을,아파트단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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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공장 마을,아파트단지가 되었다.
  • 강영희
  • 승인 2015.11.20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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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_도시, 영희의 고향이야기]⑥같은 공간, 다른 풍경의 고향
사람들이 들려주는 고향이야기

이 기획연재는 옛 사진을 찾아 그 사진에 담긴 옛날이야기를 담아내고, 지금의 사진과 함께 비교하며 도시와 고향, 그리고 인천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보고, 사라진 마을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준비되었다.

하지만 옛 사진은 거의 찾을 수 없기도 했거니와, 지금의 사진은 이정표가 아니면 그 지역 사람들이라 해도 다른 도시와 구별할 수 없을 많큼 완전히 변해버렸다. 그나마 변하지 않은 두 학교 <부평동중학교>와 <부평여자중학교>를 중심으로 대략의 벽돌공장 마을의 흔적을 찾고, 인터뷰 속에서 공간을 어림잡아보기도 했다. 지금의 세대들은 고향에 대해 어떤 생각이 있는지도 궁금해졌다.



<부평동중 뒷편부터 부개주공 7단지가 대략 부평연와에서 벽돌을 말리던 평지와 기계창, 흙산이 있던 곳이 부내초교 앞까지 이어지고, 이 부내초교 근방이 옛 배추밭과 루핑공장이 있던 자리로 여겨진다. 2015-10-26>

이정표가 없다면 딱히 어디라고 말할 수 없는 비슷비슷한 도시의 모습이다. 그 옛 이야기가 이 아스팔트와 아파트들 사이 어딘가에 담긴다면 그것은 이 마을의 역사이자 기록이 되지 않을까?


당신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부모님들은 타지에서 왔고, 나는 여기서 나고 자라고 나이들어가고 있다. 부모님의 고향이 '시골'이라는 명칭으로 고향을 대신했지만 내 고향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따로 고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내가 살았던 마을이 사라져 지금 인천이 고향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거 같기도 하고, .. '고향이란 무엇일까', '도시가 고향일 수 있을까', '고향이라는 이름이 되기 위해 필요한건 뭘까', 많이 달라진 모습, 환경이지만 비슷한 공간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고향이란 어떻게 느껴지고 있을까 라는 물음을 사진과 함께 인터뷰하기로 했다.

최소한 관할구역의 내용은 남아있으리라 생각했던 동사무소에 자료가 남아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역사가 될 기록들이 행정기관에서 조차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공간도 변하고 사람들이 계속 변하기 때문에 기록을 전담하는 부서도 없어 그런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는 박물관이나 역사관 정도라고 했다. 부평역사박물관에서도 찾을 수 없다면 기록은 없다고 봐야한다고 했다.

부평의 어느 역사학자는 동이나 구의 공식적인 기록은 거의 없다며,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 기억을 기록해두지 않는다면 그대로 소실 될 수 있다고, 인터뷰나 자료를 찾아 두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인천과 부천이 나눠지는 길 - 2015년 10월 9일>


아래 인터뷰는 강수민(94년생)씨가 옛 벽돌마을 자리인 부개주공 5단지에 살고 있는 그 동생과 아빠를 인터뷰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내용이다.


강수경(98년생)

-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 지금 내가 살고 있고 어릴 적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부개주공 5단지겠지만, 현재도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실감은 나지 않는다. 그 전에 살던 곳은 기억이 잘 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살았었던 곳.

- 이 곳(고향)이 사라진다면?
△ 나의 어린 시절이 모두 함께한 공간들이기에 굉장히 아쉽고 슬프고, 그리울 것 같다.

- 도시도 고향이 될 수 있을까?
△ 시골이 떠오르긴 했지만, 응! 어쨌든 도시도 나 같은 어린친구들은 살던 곳이니까. 시골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여기 오게 되면 시골과 같은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수경이가 그린 마을지도1]
지도설명
<고3 수경이가 그린 마을지도와 이야기들>


어릴 때, 남자였으면 엄청나게 장난꾸러기였을 거라고 얘기하던 예쁘지만 개구 졌던 동생. 나이가 많이 차이 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닌 거 같다. 내년이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동생은 이제 곧 나와 같은 이십대다.?
비슷한 세대지만 함께 놀기엔 약간 나이 차이가 느껴졌던 동생과 얘기해보는 것도 재밌었다. 동생은 집이 아닌 동네의 구석구석에서 뭘 하고 놀았는지. 나랑은 뭐가 달랐는지.

내가 기억하는 어릴 적처럼 초등학교 이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단다. 하지만 초등학교 중학교를 부개동에서 다녀서 나름 이 근방에 대한 추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함께 얘기해본 결과는 우린 그래도 같은 세대가 맞나보다. 내 어릴 적이랑 별다르지 않아서 설명 없이도 공감이 갔다.

앞으로 우리도 어른이 되고, 어르신이라고 불릴 나이가 되면 이곳에 대한 기억이 더 아련해질 것이다. 지금만큼 어린 시절을 기억할 수 있을까? 가물가물 할 텐데, 기록물들을 보면서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스물셋, 열아홉의 오늘의 기억은 서로 다르게 기억될 텐데, 개인적으로는 동생과 예전에 대한 기억을 나눈 대화가 추억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좋다.

내 나이 또래들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에 현재 살고 있거나 아직 그대로 남아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인천에서 서울로 출퇴근 하는 사람들도 많듯 아무래도 수도권이라서, 어르신들이나 젊은 세대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는 것도 있는 것 같다.

2015년의 이야기, 나의 지인들은 아직은 고향이란 단어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 같았다. 앞으로 미래에 고향을 그리워 할 지금의 신세대들.?고향도 사람마다 정의하기 나름인 것 같다. 태어난 곳이 고향이든 내가 어릴 적 자란 기억이 있는 곳이 고향이든 내가 느끼는 것이 중요한. 다른 지역으로 가면 인천이, 인천에서는 부평구 부개동이, 외국에 나가면 한국이 고향의 범위가 될 테니까. ‘고향’하면 할머니와 부모님의 고향이었던 시골 같은 느낌.
 

강시화(63년생)

<1978년, 현 부내초등학교 근방인 것으로 추정, 뒷부분에 흑산과 루핑공장이 보이고, 배추밭에는 나중에 목재소와 집이 들어섰고, 까까머리중학생이던 아빠와 부흥국민학교 1학년 영희고모는 나중에 그 집에서 개발되기 전까지 살았다.>

벽돌말에 살기 전에는 상주에서 살았는데, 집에서 닭을 키웠던 기억, 소 풀을 뜯어 먹이러 갔다가 우산을 잃어버려 엄마한테 혼난 기억, 6학년인 막내삼촌과 같이 물고기 잡던 기억이 난다고 한다.

70년 8월 여름방학, 국민학교 1학년 때 벽돌말로 이사 왔고, 부개국민학교로 전학해 졸업을 했고, 부평동중학교로 입학, 동교 7회 졸업생, 24번 버스(현 부개역 근처, 옛 12번 종점까지 왔었다고 한다.)를 타고 인천기계공고를 다녔고, 이후 학업과 직장을 다녔으며 결혼해서도(90년4월) 근방에서 살며 할머니 가게가 있던 벽돌말을 왕래했다고 한다.

‘구석구석 잘 기억하고 있겠다.’ 싶어 지도를 부탁했다. 아빠는 벽돌말의 추억을 읊으며 지도를 그렸다. 오랜 시간을 보낸 만큼,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공장들에서 흙을 파서 쓰면 생기던 물웅덩이에서 수영하고 놀던 기억, 논 썰매를 탔었고 집마다 썰매 만드는 방식과 모양이 달랐었고, 우산대와 나무총을 아버지가 만들어 주셨던 기억들도 생각난다고 했다. 75년 즈음엔 동네에 문장이네와 윤수네 두 집이 텔레비전이 있었다고 한다. ‘여로’라는 일제 강점기 배경의 드라마가 할 때는 문장이네 놀러가서 봤다고 한다.

이 이야길 하고 있으니 옆에서 “엄마는 옆동네 가서 봤는데”라고 한다. 각자의 향수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어르신들께 처음 묻던 때처럼 흥미로웠다.

여기는 고등학교 동창인 규율이네, 광덕이네. 광덕이는 대우자동차에 근무하고 있고... 합판공장은 루핑공장으로.... 나는 얼굴도 모르는 분들의 이름부터 어떤 걸 만드는지 설명이 필요한 각종 공장들까지 쓱쓱 그려나갔다.
동창회에 가면 이런 추억들을 얘기하겠지 했는데, 마침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친구 ‘이영길’씨가 <인천in>의 ‘벽돌말 이야기’를 보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82년도) 벽돌공장에서 일했단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부개동 벽돌말에 추억을 간직한 더 많은 분들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빠(강시화)의 기억속에 부평연와 벽돌공장과 마을 모습>


강수민(94년생), 고향에 대한 감흥

고향은 사람마다 정의하기 나름인 것 같다. 태어난 곳이 고향이든 , 내가 자란 기억이 있는 곳이 고향이든 내가 느끼는 것이 중요한. 다른 지역으로 가면 인천이, 인천에서는 부평구 부개동이, 외국에 나가면 한국이 고향이 될 테니까.

다들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는 태어난 곳이나 자란 곳을 얘기했지만 ‘고향’의 느낌을 물으면 시골, 조부모님의 고향과 같은 느낌을 먼저 얘기했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니 ‘어디’라는 대답은 나오지만 도시가 고향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사람도, 시골이 아닌 도시지만 내가 태어난 곳이니까 당연히 고향이라는 다양한 답변이 돌아왔다. 태어나고 자란 곳에 현재 살고 있는 친구들은 대개, 당장은 ‘고향’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떠나게 된다면 이곳을 고향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고, 없어진다면 굉장히 아쉽고 그리울 것이라고 답했다.

고향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와 고향이 의미하는 것이 약간은 달랐다. 나는 어떨까? 내 고향은 인천 부개동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계속 자라온 것은 아니지만 이 동네에서 살았다. 그렇지만 이 동네를 떠나 다른 곳에 살게 된다면 고향이라기 보단 “난 부개동에 살았었어.”라고 살았던 곳. 이라고 얘기할 것 같다. 고향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을 이 도시에서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할까? 나에게 ‘고향’의 느낌은 시골이자, 할머니나 부모님의 ‘고향’이기 때문인 것 같다.



<15년전 이 사진속의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다. 대학 졸업반 -이진선, 본인-강수민, 고3-강수경, 직장인-강수진. 이 계단과 골목은 아직 남아있고, 진선이는 아직 그 골목에 살고있다. 우리는 뒷편에 보이는 아파트 20층에 살고있다. 같이 살던 고모와 할머니 부흥로터리 빌라에 살고있다.>

2015년의 젊은 세대인, 나의 지인들은 아직 고향이란 단어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 같았다. 골똘히 생각해보기도 하고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어르신들과 부모님을 인터뷰하고 고모와 얘기를 나누었던 나도 아직은 고향이란 단어가 조금은 어색하다. 아직은 고향을 떠나본 지인이 많지 않아서 일까, 고향에 대해서 그리워하고 추억할 나이가 되지 않은 걸까.

인터뷰한 어르신들 정도의 나이가 되었을 때,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었을 때 나는 이 곳 부개동을 어떤 곳으로 인식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아마도 지금은 느끼지 못한 ‘고향’이라는 느낌을 좀 더 뭉클하게 받아들일 것 같다.

고향에 대해 아련하고 그리움을 갖기 전에 이런 활동을 해본 것이 나의 고향을 기억하고, 기록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내가 자란 첫 번째 집은 사라졌지만.


<부개주공 5단지 옆에 있던 골목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이 집은 사라졌다.>
 

* 앞으로 이 기획은 사진과 함께 들은 그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의 개인사를 포함한, 마을이야기가 기록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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