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랑스러운 신포동의 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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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랑스러운 신포동의 악사”
  • 배영수 기자
  • 승인 2016.04.17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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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지대 사람들] 재즈 피아니스트 송석철

인천 출신 피아니스트 송석철. ⓒ서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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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부터 대한민국의 재즈 신은 이전보다 더 다양한 음반을 발매하고 국제 규모의 재즈 페스티벌을 개최하는 등 이전보다 가파르게 인프라를 넓혀 왔다. 실제 90년대부터 재즈 신에서 활약하던 뮤지션들 상당수가 자신의 첫 메이저 앨범을 내는 시기가 그맘때였는데, 실제 현재 이 바닥에서 가장 잘 나가는 보컬리스트 나윤선과 웅산, 말로 등 수없이 많은 국내 재즈 뮤지션들이 2000년대 직후부터 자신의 음반 커리어를 본격화한 것은 이에 대한 ‘아주 확실한 인증’이다. 이후 이러한 저변을 타고 보다 많은 뮤지션들이 앨범 및 공연활동을 통해 이름을 알리면서, 지금은 자라섬 국제 재즈 페스티벌을 비롯해 서울 재즈 페스티벌과 같은 여러 재즈 관련 행사들이 10만 이상의 관객을 모으는 성공적인 축제로 정착했고, 비록 판매고가 더욱 줄어가는 상황 속에 있긴 하지만 신진 뮤지션들의 앨범 발매 횟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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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 미군기지를 비롯해 신포동 등지가 과거 대중음악의 산실로 활약했던 인천 역시 이러한 재즈의 최근 흐름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인천서 가장 오래된 재즈 클럽으로 인정받고 있는 신포동의 ‘버텀 라인’은 2000년대 들어 재즈 공연을 시작, 지금은 매주 금요일 정기적으로 공연을 진행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자체적인 음악 관련 부대 행사들을 열어오고 있는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인천 출신 혹은 인천에 정착한 재즈 뮤지션들도 마찬가지로 점점 활동 무대를 넓히면서, 보컬리스트 최용민을 비롯해 베이스 연주자 이건승, 서울 재즈 빅 밴드 멤버로도 활동하는 색소포니스트 고호정, 그리고 최근 유학길에 오른 피아니스트 최윤미 등 인천 재즈 필드가 배출했거나 인천에 정착해온 자랑스러운 지역 뮤지션들이 재즈 필드에서 정상급의 활약을 펼쳐주고 있다. 물론, 인천서 나고 자란 피아니스트 송석철 역시, 지난 2007년의 솔로 앨범을 비롯해 그간 인천을 비롯한 여러 무대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인천시민들의 감성을 건드려주며 함께 호흡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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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의 연주인’으로 그를 인도한 것은 ‘소울과 재즈에 젖은 감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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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토박이인 그가 지금의 피아노와 첫 대면한 시기는 초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열 살 정도의 나이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남자가 피아노를 배우면 학교에서 놀림을 당하던 시기였다(실제 이러한 분위기는 7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까지는 거의가 인지하고 있는 당시의 ‘사회 단면’이기도 했다.).
그도 이러한 시선이 괴로웠던지 중학교 1학년까지만 피아노를 배우고 그만뒀다고. 그래도 고등학교 때는 FM라디오나 AFKN 같은 TV 채널을 통해 해외의 팝이나 록 음악 등을 많이 접했었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난 故 김광한을 비롯해 ‘두시의 데이트’에서 활약하던 김기덕 등의 DJ는 그에게도 ‘음악적 교수님’과 같은 존재로 자리해 왔다고. 당시 들었던 음악들을 물어보니 알 그린(Al Green)의 ‘For the Good Time’, ‘Lead Me On’과 같은 곡들을 언급하며 이런 사운드에 매료돼 주변 친구들을 꼬드겨 당시 유행하던 그룹사운드까지 결성했다고 하니, 아무래도 10대 시절에는 흑인 정통 소울에 그 감수성 짙었던 귀를 듬뿍 맡겼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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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룹도 하고 음악 좀 한다는 날고 기는 선배들을 쫓아다니다 고3 겨울 방학 정도 즈음 해서 그는 처음으로 ‘밤무대’라는 걸 서게 됐다고 한다. 그가 무대를 가졌던 곳이 당시 수인역 근처 역마차, 그 후 우산속, 투모로우, 레인보우, 바덴바덴, 팽고팽고, 뉴월드 등의 나이트클럽으로, 아마 인천서 정말 오래 살았던 시민들이라면 익숙한 이름들도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 장소들을 통해 정기적으로 연주하기도 했고, 또 옮겨 다니기도 하며 나름 열심히 음악을 했는데 당시 일반 직장인의 몇 배에 해당하는 돈을 벌기도 했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그렇게 열심히 벌어놓은 수입 덕에 밤새 술을 마시며 음악 듣고 레코드판 구입하는 생활을 꿈결같이 이어 지낼 수 있었다며 웃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젊은이라면 피할 수 없는 ‘입대영장’이 나오며 음악생활이 가로막힐 위기에 처했던 것. 당시엔 어찌나 군대에 가기 싫었던지, 한참을 피하다 궁여지책으로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말이 유학이지, 거의 도망가다시피 했다고. 결국 한참 후인 29세에 입대해 31세에 제대했는데 그는 “참 바보였다”면서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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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포동 재즈 클럽 ‘버텀 라인’에서 공연하는 피아니스트 송석철(사진 왼쪽). ⓒ서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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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서 우연히 접한 버클리 음대, 그리고 열린 음악적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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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미국길에 올라 이역만리 땅을 밟는 것은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그 과정부터가 매우 복잡했거니와, 영어 못하는 교포가 교통경찰에게 적발되면 “한 번만 봐 달라”는 의미로 “Look at me Once”라고 하는 등이 웃기지만은 않은 상황 등을 맞으며 쉽지 않은 객지 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차, 그는 당시 자신이 살던 곳 근처에 버클리(Berklee) 음대라는 유명한 학교가 있다는 걸 알고 날을 잡아 구경을 갔다. 그리고 그가 목격한 그곳은 가히 ‘악사들의 천국’이었다고. (참고로 버클리 음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곳을 졸업한 국내 가수를 언급하자면 졸업성적 자체가 정상급이었다고 하는 김동률이 가장 대표적이고, 이후 언급할 ‘60년생 버클리 유학파’들도 대표적인 케이스. 또 아직 졸업을 못 했거나 중간에 그만둔 가수들도 꽤 있는데 이러한 경우로는 ‘강남스타일’의 주인공 싸이를 비롯해 양파,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 등이 있다.-배영수 기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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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지사 미국길에 온 차에 이곳에 꼭 입학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그는 어찌어찌 입학신청을 내고 운 좋게 허가를 받고 입학을 했는데, 막상 학교에 들어가 보니 피아니스트 김광민을 비롯해 같은 피아니스트 정원영, 한충완, 그리고 기타리스트 한상원과 베이시시트 김병찬 등 음악계에서는 소위 ‘60년생 버클리 유학파’들이 다니고 있더란다. 특히 입학 초기엔 선배 김광민과 1년간 룸메이트를 하기도 했지만 그 선배가 집안일을 전혀 하지 않아 이후엔 같이 살진 않았다는 다소 재미있는 일화를 전해주면서도, 김광민을 통해 여러 장르의 음악적 특성, 그리고 피아노라는 악기에 대해서는 학교에서보다 더 많이 배운 것 같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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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버클리에서 학교생활을 하며 자신만 보면 “캐고기 마쉬써~”를 외치던(서양인들이 개고기를 안 먹을 것이라는 관념이 있긴 하지만, 현지에서는 의외로 호기심에 먹어보고 중독된 서양인들이 꽤 있다) 교수 제리시코(한국서 군복무한 경험이 있다)를 비롯해, 비브라폰 연주의 명인이자 훗날 버클리 음대 학장까지 역임했던 게리 버튼을 실제로 보는 등(참고로 석철씨의 전언에 의하면, 당시 게리의 수업은 오디션 레벨이 높은 학생들만 들을 수 있었기에 자신은 먼발치서만 봤다고 한다) 한국서는 하지 못할 놀라운 경험을 말 그대로 ‘경험치’로 쌓고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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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처럼 늦은 나이였지만 이후 군복무도 정상적으로 마치면서 다시금 음악 궤도에 올랐고, 부모님이 잠시 도움을 주셔서 음악클럽도 해보고, 예쁜 아내를 만나 결혼해 1남 2녀의 아이들도 생기면서 가정도 무난히 이루었다고. 어엿한 집안의 가장이 된 지금도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할 정도로 열심히 음악을 하면서 서울, 인천 등지의 음악 클럽에서 재즈를 기반으로 종종 블루스나 록 등을 연주하는 공연을 하기도 하고, 또 교편을 잡아 학생들도 가르치고 있다. 지난 2007년에는 총 9곡을 수록한 자신의 솔로 앨범 ‘나’를 발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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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신포동의 독특한 문화, 모두 없어지면 슬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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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인천의 명동’이라 불렸던 신포동이 현재 지역의 다른 상권 혹은 서울 등지에 밀려 소위 ‘공동화 현상’을 겪으면서 급격히 침체돼 있는 모습은 그에게도 안타까움으로 남은 모양이다. 송석철 자신이 나이트클럽에서 연주 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는 80년대 인천을 배경으로 스토리를 전개하는 영화 ‘파이란(최민식, 장백지 주연)’을 좋아한다는 그는, 실제 영화 배경 일부에 자리하고 있던(혹은 지금도 있는) 장미의 숲, 탄트라, 펜트하우스, 버텀 라인 등 전두환 대통령 집권 당시에도 새벽까지 영업을 하는 음악 카페들이 있었고 그곳에서도 많은 음악을 들으면서 술 한 잔 했던 것을 아직까지 그리움처럼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버텀 라인과 탄트라를 비롯해 흐르는 물 등 몇몇 음악 관련 카페가 남아 있고, 대전집과 다복집, 염염집, 마냥집, 명월집 등 술 한잔 걸칠 수 있는 연조 깊은 가게들도 잘 버티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변화하고 있는 동네의 흐름에 영향 받아 이러한 분위기들이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굉장히 슬플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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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그는 최근 신포동의 몇몇 음악 관련 클럽들이 매주 혹은 정기적으로 연주자들이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공연을 기획하고 이끌어오는 것을 높게 평가하고 응원하고 있음을 전했다. 자신 역시 음악 관련 업소를 이끌어왔던 경험이 있기에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자신 역시 그들의 자구노력 덕분에 인천에서도 종종 무대를 열어오고 있기에 그로서는 이들 클럽 운영자들에게 감사할 일인 것도 같다. 실제 그는 “신포동에서의 연주는 다른 동네에서의 연주보다 더 각별하다”면서 “버텀 라인을 비롯해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는 이들 클럽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며 응원해주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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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말미에 그는,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해 몇 번을 돌려봤다는 영화 ‘파이란’의 극중 주인공인 강재가 술 취해 걷던 신포동 골목길을 생각하며 만들었다는 노래가 있다고 했다. 곧 발매될 것이라는 곡의 제목은 ‘신포동 Blues’라고 한다. 그가 알려준 가사(꼭 넣어달라고 해 기사 어느 쪽에 배치할지 한참 고민했다)를 본 기사 말미에 잠깐 소개키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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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깊은 신포동 골목길
우연히 바라본 밤하늘
별이 쏟아진다.
그리움도 흘러간다...


※ 본 인터뷰는 '놀던동네늬우스'와의 협약에 따라?진행된 전문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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