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은 총장 중도사퇴, 인하대 총장의 '흑역사' (1)
상태바
연이은 총장 중도사퇴, 인하대 총장의 '흑역사' (1)
  • 이희환 기자
  • 승인 2014.12.22 01: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하대 총장들의 면면과 한진그룹 관계사 해부

2012년 3월 22일 박춘배 총장의 취임식. 박 총장은 임기를 다 못 채우고 돌연 사퇴했다.(사진출처=한국대학신문)

인하대학교 제13대 박춘배 총장이 지난 12월 8일 돌연 사퇴했다. 박 총장의 사퇴 직후 인하대의 재단인 정석인하학원의 조양호 이사장은 다음날 해외에서 귀국한 직시 공항에서 박 총장의 사퇴를 승인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재단이 곧바로 교학부총장을 총장 직무대행으로 임명하자 박 총장의 사퇴가 이미 재단에 의해 준비된 수순으로 진행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인하대 교내외에서 확산됐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미국 공항에서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땅콩 회항' 파문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사타는 일파만파로 번졌다. 조 전 부사장은 조양호 이사장의 맏딸로 동생 조원태 부사장과 함께 정석인하학원의 이사이기도 하다.

'땅콩 회항' 파문이 워낙 크게 번지면서 급기야 6년 전 홍승용 전 인하대 총장의 사퇴 전말이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홍 전 총장도 박 전 총장과 마찬가지로 임기를 1년 2개월 여 앞둔 12월 말 돌연 사퇴했다. 홍 전 총장의 사퇴는 조양호 이사장이 참석한 이사회 석상에서 조현아 이사가 서류를 집어던지며 홍 전 총장이 진행한 교수임용과 관련해 문제를 쏟아놓은 결과 빚어진 것이라는 증언이 나왔다.

박 전 총장의 사퇴와 홍 전 총장의 사퇴는 사퇴의 직접적 계기는 다르지만, 모두다 인하대의 재단인 정석인하학원의 개입과 깊이 관련돼 있다는 공동점이 있다. 인하대 내부에서는 불과 6년 사이에 두 명의 총장이 불명예로 중도 사퇴하는 사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인하대에 대한 재단의 전횡이 도를 넘어섰다는 비판이 들끓고 있는 형국이다.

그럼 인하대학교에서 총장의 불명예 퇴진은 박, 홍 두 전 총장만 중도 사퇴했는가? 인하대 총장들과 한진그룹과의 관계를 추적해봤다.
 

하와이 교포와 국가의 지원으로 설립된 인하대학교
1968년 한진이 인수하면서 친인척 총장들 임명

인하대학교는 6·25의 와중이던 1952년 하와이 교포 이주 50주년 기념사업으로 뒤떨어진 우리나라의 공업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 박사의 발의로 출범하게 되었다. 학교 설립에 필요한 재원으로 하와이 교포의 2세 교육을 위하여 이승만 박사가 설립 운영하였던 한인기독학원(Korea Christian Institute)을 처분한 대금과, 하와이 교포들의 정성어린 성금, 그리고 국내 유지의 성금 및 국고 보조 등을 기금으로 하고, 인천시로부터 교지를 기증받아 1954년 2월 ‘재단법인 인하학원’을 설립하고 4월 24일 인하공과대학으로 개교했다.

'공업입국'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된 인하대학은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과 UNESCO와 독일 정부로부터의 원조 등을 얻어 현대식 실험 실습 시설을 갖추고 한국의 산업과 과학 기술 발전에 이바지할 우수한 학도를 양성해 왔다. 그러다 1968년 9월에는 한진상사(주)로부터 2억원의 기금을 기증 받았고, 아울러 인하학원의 운영권을 한진이 인수하면서 이사진을 개편,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이 재단 이사장으로 부임하고 성좌경(成佐慶) 박사가 학장으로 취임했다.(아래 사진 출처 : 인하대학교)

이후 공과대학이었던 인하대학교는 1971년 12월 문교부로부터 종합대학 인가를 받아 인하공대의 학장이었던 성좌경 박사가 초대 총장으로 취임해 1976년 2월까지 임기를 모두 채웠다.

성좌경 총장은 1942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화공과를 졸업하고, 1945년 경성공업전문학교 교수와 1946년 공업연구원 유기화학과장, 그리고 1954년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을 지낸 인물이다. 1964년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교수로 재직중 서울대학교에서 공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66년 원자력연구소장, 1967년 원자력청장을 지냈으며, 1968년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학장과 총장을 역임했다. 총장 퇴임 후 1977년 대한고분자학회장을 거쳐 1979년 과학기술처 장관에도 올랐다.

성 총장에 이어 1976년 3월 15일 인하대학교 제2대 총장으로 취임한 이재철(李在澈) 총장은 1944년 교토대학(京都大學) 법학부를 수료하고 1948년 경성대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1973년 영남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8년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무부 조약국에서 근무했고, 1949~62년 영남대학교 교수를 지낸 후 1963년 감사원 감사위원을 거쳐 1967년 과학기술처 차관, 1971년 교통부 차관을 지낸 후 공직에서 물러나 1976년 3월 인하대 총장에 임명됐다.


출처 = 일요신문 기사(http://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3461)

1969년 대한항공을 인수한 한진의 조중훈 회장은 이재철 전 교통부 차관과 사돈관계를 맺는다. 조종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장남이자 현재 한진그룹을 이끌고 있는 조양호 회장은 경복고와 인하대 졸업 후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경영대학원을 나온 후 1973년 이재철 전 교통부 차관의 장녀 이명희씨와 중매결혼했다.

이 결혼은 당시부터 재계에서 "장인 덕에 대한항공이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란 의혹을 일으켰다고 한다. 당시 운수업계 재벌이 한진과 운송관계 주무부처인 교통부 차관 집안과의 혼사란 점에서 '정략결혼'이란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재계에서는 조양호, 이명희의 결혼으로 한진의 사업행로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1973년 결혼한 후 조양호는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해 1992년 대한항공 사장에 올랐고 1999년 대한항공 회장을 거쳐 2003년 한진그룹 회장에 올랐다. 조양호, 이명희 사이에서 태어난 현재의 한진그룹 3세인 조현아, 조원태, 조현민은 모두 이재철 총장의 외손주들이다.

이처럼 조중훈 이사장과 사돈관계인 이재철 총장의 취임은 인하대 총장에 인척이 등용된 첫 사례가 된다. 이 총장은 2대 총장을 무난히 보낸 데 이어 1980년 3대 총장으로 연임됐다. 

1980년 5월 7일, 용현동 사거리에서 시위중인 학생들을 설득해 교내로 귀환하는 이재철 총장과 학생들
(인하대신문사 소장 사진)

1980년 짧았던 '민주화의 봄' 시기에 이재철 총장과 관련한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인하대 총학생회가 1980년 5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간 '민주화대행진의 날'로 정하고 인하대 대운동장에서 3,0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시국선언문을 낭독한 후 오후 2시30분경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인하사대부고 정문을 통해 빠져나왔다.

학생들은 학익동과 독쟁이를 거쳐 인천교육대학 앞까지 시가행진을 전개하고 학교로 돌아오던 중 용현동 사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이에 이재철 총장이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가 학생들을 설득해 경찰과 무력 충돌 없이 학교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또 서울 동국대에 인하대 학생들이 함께 농성을 위해 집결해 있는 때는, 이재철 총장이 학생과 직원들을 대동하고 올라와 인하대 학생들이 먹을 빵과 우유를 사와 나눠주고, 정국이 이처럼 혼란하게 된 것은 모두 기성세대의 잘못이라고 대학생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이런 일화들에서 알 수 있듯 이재철 총장은 한진그룹과 혼맥을 맺고 인하대 총장에 부임하는 등의 인천관계를 갖고 있었으나 학자적 경력이나 총장으로서의 인품을 갖고 있는 총장으로 졸업생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조중훈 회장의 사돈과 처남이 총장 자리두고 갈등, 동반사퇴
1988년 한진그룹 간부 자녀 특혜입학 파동도

그러나 이 총장은 연임 후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중도하차했다. 당시 조중훈 회장의 처남으로 부총장을 맡고 있는 박태원(朴泰源)과의 힘겨루기가 지속된 끝에 임기를 2년 9개월 남기고 총장직을 중도사퇴했던 것이다.

박태원 부총장은 조중훈 창업주의 세째 여동생인 조도원과 결혼한 조중훈 최장의 처남이었다. 그는 박 전 총장은 서울대 공대를 나와 프랑스 르아브르대에서 명예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재계와 다양한 혼맥을 맺은 조중훈 일가에서는 가장 학자적인 인물로 화학공학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학자로서의 경륜을 쌓다고 인하대 부총장에 임명됐다. 그러나 조중훈 이사장과의 인맥관계 속에서 인하대 내에서 갈등을 빚다 총장과 부총장이 1981년 12월 동반 사퇴했다.

이재철 총장에 이어 1981년 12월 29일 대학원장이었던 김희철(金熙喆) 박사가 제4대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잔여 임기 2년 7개월을 채웠다. 김희철 총장에 이어 1984년 제5대 총장으로 부임한 이는 이재철 총장과 갈등을 빚은 끝에 부총장직에서 사퇴했던 박태원 총장이다. 조중훈 회장의 처남이기도 한 조중일 일가에서는 가장 학자적 경륜을 쌓은 인물이기에 이미 부총장 시절부터 총장의 권위에 맞서는 학내 권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졸업생들에게 그는 인격적으로 훌륭한 총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좋은 직장에 넣기 위해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지금은 전혀 사라진 풍경이지만, 학생운동을 한 학생일지라도 열심히 공부해 졸업하면 한진그룹에 취업을 시켜주는 일에도 앞장서서 일년에 20~30명 이상씩 한진그룹에 입사했다고 한다.


1988년 인하대의 한진그룹 간부 자녀 특혜입학 사실을 보도한 <한겨레신문> 1988년 6월 24일자 기사 

1988년 3월 제6대 총장에 연임됐던 박태원 총장이 중도에 물러나게 된 계기는 그 해 6월에 터진 부정입학사건 때문이다. 이 또한 한진그룹이 인하대를 사기업화해서 벌어진 일로, 그해 입시에서 한진그룹 임직원 자녀 22명을 특혜입학시켜준 사실이 학생들의 본관 점거농성 과정에 드러난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인하대 남종우 부총장, 전용수 기획실장, 배용득 학생처장, 이본수 교무처장 등 교무위원급 교수들이 사표를 내고 박태원 총장도 11월 사퇴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문교부 감사결과 총장에 대해서는 경고처분이 내려졌다. 학생과 일부 교수들의 퇴임요구가 빗발치는 가운데 인하대 교수협의회는 총장 유임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학생들의 퇴진요구는 수그러들지 않아 결국 6대 총장 임기 만 2년을 남기고 사퇴했다.  

박태원 총장에 이어 제7대 인하대 총장으로 원영무 총장이 1990년 3월 취임했다. 원 총장은 인천기계공고 출신으로 인하대 54학번 1회 졸업생이며 인하대에서 석박사를 모두 받은 순수 인하대 출신 총장이었다. 한진그룹 임원들의 특혜입학이 불어닥친 수년간의 학내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한 조처였다. 원 총장은 1994년 2월가지 4년 임기를 마치고 당시 대학가에 불었던 총장직선제에 따라 제8대 총장 선출이 예고됐다. (2회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