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한 생애를 지고 다닌 흰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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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한 생애를 지고 다닌 흰 신
  • 최일화
  • 승인 2017.03.17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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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단> 흰, 신 / 정우영
흰, 신
                         정 우 영                    
 

나는 내가 신을 신고 댕기는 줄 알았는디이.
어느 날 보니께 신이 나를 지고 다니는 거시여.
쉬는 참에 벗었는디 고것들 어깨에 핏물이 들었더라고.
평생 얼매나 무겁고 힘들었을까이.
독헌 시상 신통히도 견뎠구나 싶더랑게.
그짝부텀여, 신고 벗고 할 적마다 신께 빌었제.
고맙구만이라, 오늘도 편허니 잘 살았십니다.
 
동네 초입에서 태워지는 흰 신,
할매 태우고 승천중이시다.
                                                        『작가들』 2016년 겨울호


* 정우영: 1960년 전북 임실 출생. 1989년 『민중시』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살구꽃 그림자』 『집이 떠나갔다』, 시평 에세이 『시는 벅차다』등이 있음.  jwychoi@hanmail.net
 

<감상 노트> 

할머니는 신을 신고 다니고 신은 할머니를 태우고 일생을 살았다는 얘기다. 신은 할머니를 대신하는 환유(metonymy)다. 그런데 할머니가 신을 신고 다니는 것보다는 신이 할머니를 태우고 다녔다는데 무게 중심이 있다. 신이 할머니를 태우고 다녔다면 할머니의 무엇을 태우고 다녔다는 것일까. 단순히 할머니의 육신을 태우고 다닌 것은 아닐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다만 핏물이 들고 얼마나 무겁고 힘들었을까 하는 강한 연민의 언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고마움을 깨닫게 되고 신(神)께 빌게 되고 신은 마침내 할머니를 태우고 승천하기에 이른다.

이 시는 할머니의 고단한 한 생을 신발에 담아 노래한 시가 된다. 한 평생을 살면서 할머니는 어떤 가시밭길을 걸어 왔을까. 일제 치하에서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을 것이고 해방 공간과 6.25 전쟁 중에 생사를 넘나드는 고난을 겪었을 것이고 남녀불평등과 가난의 굴레에서 겪었을 그 쓰라린 삶을 우리는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주렁주렁 매달린 자식들 혼자 키우며 많은 고단한 밤을 지새우기도 했을 것이다. 허리는 끊어지고 무릎은 저려오고 자식 한둘 먼저 가슴에 묻기도 했을 것이다. 한(恨)이라는 말은 독특하게 우리민족에게 적용되는 말이라고 한다. 남자에게 해당되기 보다는 여자에게 주로 적용되는 말이다.

나에겐 큰어머니가 계시고 고모와 여러 명의 이모가 계셨다. 이웃에 사시던 친척 할머니 아주머니도 계셨다. 이미 연로하여 모두 작고하셨지만 그분들의 삶을 떠올릴 때 마다 우리 민족의 한이라는 정서가 자연스럽게 떠올려진다. 남편이 일찍 죽어 여러 자식들 키우기에 숱한 고난을 겪으신 분이 계신가 하면, 남편의 축첩으로 숱한 마음고생을 하시기도 했다. 가정을 거들떠보지 않는 남편을 대신하여 자녀를 키우고 대소사를 챙기는 일이 모두 여자들의 몫이었다. 지금도 큰어머니 어머니를 생각하면 먼 산에 가서 삭정이를 주워 머리에 이고 오시던 두 분의 모습이 한 편의 다큐멘터리 풍경처럼 떠오른다.

뙤약볕 아래 온종일 고추밭을 매고 따가운 가을 볕 아래 콩 팥을 거두고 참깨를 터는 일이 모두 여자들의 몫이었다. 그런 고난을 겪은 어머니를 오래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자식들이다. 이 시도 어쩌면 시인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지었을 개연성이 높다.
  
전라도 토속어가 한층 시의 효과를 높이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각 지방의 사투리를 보존할 방법도 어려운 상황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우리나라를 하나의 고장처럼 일일 생활권으로 만들어 놓았다. 언어는 사회적 영향을 받아 발달해 간다. 부모가 사투리를 써도 아이들은 부모의 말 보다는 자신을 둘러싼 광범위한 언어적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유독 전라도 사투리가 정감이 가는 것은 ㄹ(r) 발음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스어에 유독 r 발음이 많아 세계의 사교 언어가 되었듯이 전라도 사투리가 부드럽고 정겨운 것도 마찬가지다.
   그 정겨운 말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애석한 일이고 말을 다루는 문인들에게는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문학 작품 속에서라도 오래 그 명맥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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