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와 은모래, 그 속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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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와 은모래, 그 속의 역사
  • 송정로 기자
  • 승인 2017.05.21 17:3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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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섬네트워크, 2번째 섬순례 덕적도 일주



덕적 삼보(三寶). 해송, 맑은 물, 은모래다.

사단법인 황해섬네트워크가 20일 아침 8시 배로 2번째 순례 섬 덕적도를 찾았다. 도우선착장에서 내려 현지 레트카로 5분이 안되어 도착한 곳이 덕적초·중·고등학교 교정. 바닷가 펜스 안쪽 교정에 150여 그루의 사구 적송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앞마을(진마을)에 올라서 보니 더 말할 것 없는 방풍림, 그것이다. 나레이터 이세기 시인이 순례를 시작하면서 덕적 삼보를 화두로 꺼낸 이유다.

 

이 일대를 걸으며 순례자들(18명 참석)은 해송와 삼일독립만세기념비, 진마을을 둘러보았다. 이세기 시인은 다시 덕적 삼비(三碑)를 말한다. 삼일독립만세기념비와 최분도 신부 공덕비, 조난자(어부)위령비다.

 

삼일독립만세기념비는 덕적초·중·고와 인접해 있다. 해송 150여 그루가 있는 곳은 진리 송정으로 불리는데, 3.1운동 당시 명덕학교 임용우, 합일학교 이재관, 차경창 선생 등이 명덕, 합일, 명신 등 세학교의 춘계운동회를 개최하여 학생과 주민을 모아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곳이다. 임용우는 수감 중 고문으로 옥사했다. 삼일독립만세기념비 옆길은 학교가 세워지기 오래전부터 비석거리로 불렸는데, 이곳에는 임용우, 수군첨절제사 김학성 등을 기리는 3개의 석비(石碑)가 줄지어 있다.

 

바로 길 건너 진마을. 1652년부터 1894년까지 덕적수군진이 설치되어 진영이 있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덕적면 행정과 관공서, 학교 등 주요 기관이 몰려있는데, 1930년 초 건립된 어업조합도 이곳에 남아있었다. 지금은 리모델링돼 팬션으로 쓰이는데, 빨간 벽돌의 굴뚝만이 그 시절의 일단을 드러내고 있다.



<덕적초중고등학교 앞 해송. 150여 그루의 해송이 건너편 진마을을 보호해준다>




다시 차로 이동하여 밭지름 해변에 닿았다. 이곳은 서포리해수욕장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로 역할을 한 곳이다. 여기 바로 앞에 먹염(묵도)이 보이는데, 1950년 8월 보도연맹 수장사건이 발생한 작은 섬이다. 이세기 시인은 이를 '덕적군도의 4.3사건'으로 부르며 이곳에 위령비라도 세워야 한다고 안타까워 한다.

여기서는 얼마전까지 채석장이 추진됐다 포기한 선갑도가 멀리 보이고, 가까이에는 문갑도가 보인다. 그리고 눈 아래, 은빛 모래와 해당화를 비롯한 모래씀바귀, 갯메꽃, 갯완두 같은 해안 사구식물들이 정겹게 자리를 잡고 있다. 갯티와 사구는 신이 섬에게 준 특별한 선물인 것 같다.
 


<밭지름에서 보면 수장사건이 발생한 먹염이 바로 앞에 보인다. 멀리 선갑도와 오른쪽 문갑도가 보인다>

<밭지름 사구식물. 해당화가 아름답다>


순례자들은 서포리해수욕장 앞 공원에 자리한 최분도(1932~2001, Bebedict A. Zweber. 미국) 신부 공덕비로 이동했다. 덕적도 본당 주임신부로 ‘덕적의 슈바이처’라 불리며 병원, 전기, 해태양식, 호안공사 등을 통해 헌신적인 마을공동체를 일궈온 최분도 신부의 흔적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점심 식사 후 그 최분도 신부와 50년 인연을 맺어왔던 서재송(89) 어르신 댁을 방문해 1시간 가량 머물수 있었다. 방문객들은 더욱 실감나는 두 분의 ‘스토리’를 육성으로 들으며,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이어 방문한 곳은 중국인 묘지. 서포2리 벗개해변에는 어디가 묘지이고 어디가 사구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관리가 안된 중국인 묘지가 있다. 묘지에 누운 이들은 원래 중국 산둥(山東)인들이어서 이곳 바다는 산둥반도쪽이 훤히 틔여있다.

1885년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따라 들어온 청국 거상들의 일꾼들이 이들의 시초라고 한다. 육체노동 이민자인 이들은 중국 웨이하이(威海)에서 오는 선박의 하역노동자나 축항 노동자로 일하다 덕적에 주저앉았다. 무기력해진 이들을 거두고 무덤까지 극진히 모신 이도 최분도 신부였다.

 

<최분도 신부 공덕비 앞에 순례객들이 모였다>


<산둥반도 쪽으로 트인 벗개해변. 중국인 묘지가 있다. 관리가 안돼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다>


렌트카는 북쪽으로 핸들을 돌려, 북리항을 조망할 수 있는 산중 도로에 멈췄다. 60년대 민어 등 풍어기 때, ‘작은 인천’이라 불릴 정도로 번화했었던 곳이다. 공중목욕탕, 다방, 이동주막 등 사람과 집들로 바글바글했던 빛나는 60, 70년대를 보내고 지금은 기록만 간직한 채 수채화 같은 한적한 포구가 되었다.

 

순례객들의 렌트카 3대가 마지막 닿은 곳은 선미도가 바로 보이는 북2리 능동자갈마당이다. 이곳에 ‘조난자위령비’가 있다. 1931년 중국쪽으로 조업 나갔던 어선이 지독한 악천후로 악험도 부근에 대피했으나 56명의 어부가 목숨을 잃었다. 2년뒤 경기도, 경기도수산회, 덕적면 어업조합 등이 이 비를 세웠다. 악험도는 그 후 이름을 선미도로 바꾸었다.

 

순례객들은 자갈마당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 도우선착장으로 달렸다. 4시30분 배를 탔다.


 


<북리항. 60년대 풍어기 '작은인천'으로 불릴 만큼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덕적도 북단 능동자갈마당. 선미도가 바로 앞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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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숙 2017-05-22 07:11:17
감사합니다.
잘 정리된 글 소중하게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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