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쇠락한 양키시장에서 “어쨌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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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쇠락한 양키시장에서 “어쨌든 살아간다”
  • 이재은
  • 승인 2016.11.2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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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못하는사람들] (6회) 평양 수선집 高 할머니

“여기서 아이들 다섯을 길렀어. 스무 살에 피난 나와서 여태까지 이러고 살아. 나가 지금 여든여섯이니까 몇 년이냐? 피난 나와서 일하기 시작한 것을 여태까지 했어. 그거밖에 자랑할 거 하나도 없어.”

스무 살에 부모님과 함께 강화로 피난 와서 2년을 살았다. 돈을 벌기 위해 고 할머니만 이모가 사는 화수동으로 왔다. 바느질 배울 곳을 알려달라고 했고, 거기서 일하다가 할아버지를 만나 스물다섯에 결혼했다. 그때는 양키시장이 다 양복점이었다. 제대로 된 건물도 없고 비가 오면 그대로 비가 샜다.

“처음에는 무척 어려워서 그냥 진짜로 밥을 굶었어. 그런데, 에효, 큰 딸 낳고서… 집 사야한다고 맨날 국수를 끓여 먹었어. 비가 쏟아지기에 물 받아갖고 빨래를 하는데 캄캄하고 눈이 안 보여. 그거이 영양실조래. 애기 낳고서 일만 하고 국수만 먹고 하니까. 그러고는 조금씩 조금씩 (생활이) 폈지.”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오래고, 지금은 동생하고 수선집을 운영한다. 아침 9시에 나와서 8시까지, 쉬엄쉬엄 가게 한 편에서 눈을 붙이기도 하면서 주말에도 문을 연다. 365일 중 쉬는 날은 단 6일. 추석 3일, 설날 3일 뿐이다.

이제 막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것 같은데, 기계로 바느질을 하고 있던 동생이 “무슨 이야기를 그리 오래해? 빨리 빨리 하고 말아. 에이. 그 간첩들 나와서. 사람들도 오고 그러는데. 고만 얘기해. 에잇.” 투덜댄다. 무슨 말씀이냐고, 간첩 이야기는 또 뭐냐고 묻지만 대답을 듣지 못하고, 그의 사나운 어투 때문에 거듭 물을 용기도 나지 않는다. 일 하는 데 방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이제 고만 얘기하래.” 
할머니가 동생의 눈치를 본다.
 
50여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킨 양키시장 내 수선집 ⓒ 이재은


“여행은 저거 다 갔더랬어. 젊어서 다 다녔지. 금강산도 갔드랬고, 중국도 갔드랬고, 저기 저 백두산 꼭대기잖아. 나 개성도 갔드랬어. 여기서 차로 실어다줬어. 개성 갈 사람 오라고 그래서. 옛날 일이지.”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작업대 위 벽에는 오래 전에 찍은 사진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또 한 번 “이제 고만 물어봐. 다 했어 얘기.”하고는 다시 “이건 박연폭포, 이건 천지연, 이건 만리장성.” 하면서 젊은 시절을 회상한다. “이거 하나에 7천 원씩 주고 찍었어.” 

“얘기 다 했다”는 할머니의 삶을 캐묻는 일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떠나지 못하고,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의 힘겨움을 다시 들려달라는 욕심 아닐까? 미진하게 붙잡고 있는 어떤 삶을 인정하라는 추궁 아닐까?

사진가 김보섭은 3년 전 ‘양키시장’을 전시했다. 정확히는 양키시장의 삶을 담은 사진을 전시했다. 그의 전시 서문을 쓴 이세기 시인의 글은 길었다. 그의 글에 있는 곰보스킨, 네보릉 샴프, 도꾸리 미앙쓰, 동동구루무, 강가루잠바 같은 단어들. 지금은 없는 시절들. 한때 웅성거렸던 추억들.


'양키시장' 사진전 포스터 ⓒ 사진공간배다리 제공


혼자 사시냐고 물었더니 할머니가 펄쩍 뛴다. “혼자 살긴 왜 혼자 살아. 작은 아들이 공군 대령이야. 큰 아들은 선생이고. ” 혼자냐고 물은 게 아니고 혼자 사시냐고 여쭤본 건데….

말씀에 북쪽 억양이 별로 안 남아있다고 하자 할머니가 또 펄쩍 뛴다. “개성 사람들이 무슨 억양이 있어. 나는 개성 사람이고 할아버이는 평양 사람이기 때문에. 할아버이는 억양이 좀 있었지.”

“고만 좀 허고 가셔. 사람이 좀 오고 그래야지.”
차가운 동생의 목소리.
“나보고 잔소리 한다고 그러는 거야. 옛날 얘기 헌다고.”

할머니는 적극적이었고, 듣고 싶은 사연이 넘쳤지만 더는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을 수 없었다. 나 때문에 손님이 오지 않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어르신 때문에 뻔뻔하게 버틸 수가 없었다. 멋진 갈색 중절모를 쓴 동생분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던 찰나에 수선을 끝마쳤다. 기다리던 손님에게 옷을 건넨 뒤 또 한 번 “에잇” 하신다. “술 먹어야 하는데 이야기를 왜 이리 오래 해.” 

고 할머니는 나를 따라 문밖으로 나온다. 나는 연거푸 죄송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인다. 고맙고 미안해서 뭐라도 사드리고 싶은데 동생이 또 화를 낼 것 같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 하고 돌아선다. 

희미한 알전등, 습하고 좁은 골목, 지루한 텔레비전 불빛, 손님을 기다리는 목소리 사이로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걷는다. “뭐 사러 왔수?” “뭐 찾어?” 할머니들이 호객한다. 수입과자며 사탕을 파는 가게 앞에 선다. 버터 캔디를 집고 가격을 물었더니 “천 원이야. 100원밖에 안 남아.” “이 과자는 얼마예요?” “천오백 원. 남는 것도 없어.” 잘 나가는 거라며 선반에 있는 코코넛 과자를 꺼내놓는다. “그것도 주세요.” 남는 것도 없다더니 작은 봉지에 든 캐러멜을 슬쩍 넣어주는 건 또 뭔가. 부피가 큰 검정비닐을 받아들고 이걸 평양 수선집 할머니에게 갖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대로 집까지 들고 온다. 집에 와서 뜯은 쿠키는 달아도 너무 달다. 

해방 후 미군부대가 들어오면서 형성된 양키시장. 전쟁의 폐허에서 살기 위해 양키 물건을 팔았던 송현동 100번지. ‘사진 찍지 마시오’라는 경고(?) 때문에 골목 사진 하나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 사람을 찍는 게 아니라면 골목이야 몰래 한 장 찍어도 그만일 텐데, 그만하라는 수선집 어르신의 목소리가 나를 막았다. 

나처럼 기자들이 이야기 들으러 많이 찾아오느냐고 했을 때 고 할머니는 그런 사람 별로 없다고 했다. 사진 찍는 사람들은 많이 오지 않느냐고 묻자 “사진 많이 찍어. 여기서 촬영도 하고 그래.” 하면서도 “여기 사람들이 좋아하진 않아. 그지 같으니까. 못 사는 거 찍어가니까 싫어하지.” 

‘그지 같은 거’, ‘못 사는 거’를 담으려는 것만은 아니었을 텐데, 진심은 알 수 없다. 누군가의 진실조각을 붙들어 살피는 삶도 쉽지 않다.

“까마득한 골목 끝쯤 환한 빛이 걸어오고 있다. 굳게 닫힌 입이 열리는 환영이 들린다.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삶이니까. 그것이 길이니까. (중략) 그게 삶이고 생활이니까. 삶이 곧 어둠이고, 어둠이 곧 삶이다. 침묵의 말들이 어둠 속에서 환하게 걸어 나온다.” 이세기 시인의 문장처럼 2016년의 양키시장에도 빛이 있다. 어쨌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인천의 어떤 모습이다.

“다 했어! 뭐 헐 거 있나? 다 얘기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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