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짠순이? “짜긴 짜. 그래도 인상은 순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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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짠순이? “짜긴 짜. 그래도 인상은 순하잖아.”
  • 이재은
  • 승인 2016.12.26 07: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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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못하는사람들] (8회) 남동구 샤르망미용실 김영선 씨

“인천에서 태어나 58년을 살았어. 친구들은 다른 지역으로 시집도 가고 해외도 나가고 했는데 나는 인천에만 있었지. 아버지가 이북 분이에요. 홀연 단신 전쟁 통에 인천으로 내려와 결혼해서 5남매 낳고. 언니들도 다 인천 살고, 나는 인천 토박이에요.”

김영선(58 ·가명) 씨는 자유공원 인근 중앙동에서 태어났다. 동서남북, 인천에 4개 구밖에 없을 때였다. 남편도 인천 사람이다. 멀리 나가 살다가 고향 사람을 만난 게 아니라 구역에서 만난 거라 애틋한 마음은 없지만 인천 토박이 만나기가 쉽지 않다. “인천에는 충청, 경상, 전라도에서 올라온 외지인들이 많잖아요. 인천 토박이가 30%나 될까?”

1991년에 미용사 자격증을 땄다. 몇 해 전, 아파서 3년 정도 쉰 걸 빼면 20년 가까이 미용 일을 해온 셈이다. 식구들 머리 만져주려는 욕심에서 시작했는데 가족 소유 건물 1층에서 첫 개업을 하고 지금껏 ‘오너 겸 헤어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워낙 머리 갖고 노는 걸 좋아해서 적성에 맞았어요. 무리해서 일하면 아파서 그렇지 하기 싫거나 그런 적은 없어요.”


커트를 위한 가위들 ⓒ이재은


그는 인천이 시골스럽다고 한다. 발전이 더딘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금 살고 있는 남동구는 살아본 곳 중에 제일 문화혜택이 적고 ‘인천 짠순이’가 많은 곳이다. 미용 요금도 동네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20년 넘게 업을 이어오며 가장 싼 가격을 책정한 곳도 ‘이 동네(남동구 만수동)’다. 

부평에서 오래 살았고 남동구에 온 지는 6년 됐다. 남동구에 집을 사면서 미용실도 이전했는데 부평구랑 남동구는 손님들의 스타일이 다르다. 김 씨가 생각하기에 ‘다름’은 문화를 접하고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에도 있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가까이서 문화 혜택을 누린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랄까, 생활에 자유로움이 배어있다. 남동구에 와서는 힘들게 산다, 각박하다는 인상을 자주 받았다. 

“부평이라고 다 똑같진 않겠죠. 그쪽에서 미용실 하던 곳도 빌라촌이었는데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싼 것만 따지거나 저렴한 것만 찾지 않았어. 생활소득 차이 때문인 것 같은데, 어쨌든 발전은 여기보다 부평이 많이 됐지. 문화의 거리도 있고. 남동구는 주민이 많은데도 인천대공원밖에 갈 데가 없어요. 내가 살고 있는 곳 주변에 문화적으로 즐길 수 있는 혜택이 부족하다는 점이 가장 아쉬워요. 남동구도 발전이 됐으면 좋겠어요. 이 인터뷰가 기사로 나가면 변화가 있지 않을까요? 포부가 너무 큰가?”

그는 인천이 더 개발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천에 애착심을 갖고 있다면 좀 다를 텐데 정치인들도 인천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인천 토박이 정치인이 드무니 대충 펼쳐놓고 흐지부지 되고 만 게 너무 많다. 

 
김 씨는 본인 사진이 공개되지 않길 원했다.
샤르망미용실 내부 모습 ⓒ이재은 


“예전에는 경기도 중에서 인천이 최고였잖아요. 크기 때문에 직할시에서 광역시가 됐는데 지금은 경기도에도 미치질 못할 만큼 발전이 없어요. 호수공원 봐요. 양평 이런 데도 있는 사람들이 별장 짓고 살고. 인천은 큰 도시면서도 그런 게 없어. 없어, 없어. 눈 닦고 봐도 없어. 송도는 좀 다르지만.”

새 것, 새로운 것만 찾는 건 아니지만 변화가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은 있다. ‘서민적’이라는 것도 옛날 스타일, 올드한 것 아닌가? 그는 “자랑할 건 재래시장 하나뿐이고, 하여간 남동구에는 서민적인 것만 많이 생긴다”고 했다. “지하철 하나 들어온 게 다지, 뭐 있어?” 이 투정의 근원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생활에 쪼들림 없이 살았으면 하는 데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네 인천 사람들은, 예전에는 짠순이라고 했잖아요. 짜긴 짜. 그래도 인상들은 좋아요. 풍기는 거나 성격은 순박하고 부드러운 편이야. 인천 토박이들 봐 봐요, 참 순박해.” 

‘나는’이 아니라 ‘우리네’라는 주어를 사용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화법이었다. ‘우리네’는 한국인일 수도, 동시대 성인일 수도, 인천 토박이일 수도 있었다. 동네 주민들, 손님들…. 그가 자주 만나고, 인사하고, 마음에 품고 있는 모든 사람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고향이니까 부담 없이 편하게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마음이 놓이잖아요. 지하철 타고 서울 갔다가 부평쯤 오면 마음이 편해져. 부평만 들어서면 이제 다 왔다는 안도감이 생기고. 아직 집에 가려면 멀었는데도.”

남동생은 홍콩에 살고, 아들은 북경에서 오래 공부했고, 대구, 경주 등에도 친척들이 있다. 인천을 떠나고 싶은 적은 없었을까?  

“떠날 용기가 없어. 겁나. 너무 여기에 묻혀있어서 그런가 봐요. 중국인을 비롯해서 외국인들이 한국 와서 사는 거 보면, 고향 버리고 말도 안 통하는 남의 나라 와서 사는 거 보면, 용감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떠난다면, 또 다른 시작은 제주도나 강원도에서 하고 싶다. 바닷가 옆 조용하고 공기 좋은 마을. 

“우리네가 삶에 찌들어 있다가 강원도 같은 데 한번 가면 코도 뻥 뚫리고 숨통이 트이잖아요. 도회지에서 벗어나 살고 싶어요. 노후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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