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글징글 지겨운 책 읽기’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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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글징글 지겨운 책 읽기’의 자화상
  • 고보선
  • 승인 2017.01.10 09:0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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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논단] 고보선 / 인천석남중학교장

<인천in>이 인천석남중학교 고보선 교장의 [교육논단]을 시작합니다. 이달부터 매달 한차례 싣습니다.
고보선 교장은 전남대 사범대, 인하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인천시교육청 장학사. 만수고 교감, 청라고 교장 등을 거쳐 현재 석남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주말이다. 오랜만에 딸과 사위가 친정에 들렀다. 이른 저녁을 먹자마자 딸과 사위가 TV 앞에 리모컨을 끼고 앉는다. <쓸쓸하고 찬란한神 도깨비>라는 드라마를 봐야 한단다. 이 드라마를 처음 보는 나로서는 맥락 없이 얻어 보게 된 드라마 내용이 낯설고 어리둥절하다. 드라마 촬영지가 내가 살고 있는 청라 호수공원이라니, 아침저녁 걸으며 보던 낯익은 공원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이는 것만으로 반갑다.
드라마 말미, 남자 주인공이 사랑스럽게 나풀거리는 여주인공을 보며 읊조린다. 멋진 영상에다 사랑에 끌려 들어가는 마음을 읊조리는 남자주인공의 근사한 목소리가 금상첨화다. 주인공의 마음을 대신한 것은 어느 시인의 독백이다.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사랑의 물리학, 김인육-

 
백 마디의 서사보다 짧은 시 한 편이 전하는 울림이 얼마나 클 수 있는지 실감하는 순간이다. 2012년 「잘 가라, 여우」에 수록되었으나 별 주목을 받지 못하던 이 시는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사랑의 물리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재출간 되었다고 한다.
이 드라마를 쓴 김은숙 작가는 올 초 ″~했지 말입니다.″라는 군대 말투를 유행시킨 <태양의 후예>부터 최근 대통령의 닉네임으로 재조명을 받은 <시크릿 가든>까지 모두 그의 작품이라 하니. 대한민국의 대표적 스타 작가라 할 만한다.
이 작가의 작품 속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매력적인 남녀 주인공의 대사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는 주술은 바로 ‘책’이다. <시크릿 가든>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한 구절이 읽혀지고,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다소 무겁고 생경한 주제의 책도 등장한다. <신사의 품격>이라는 드라마에서는 소설가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라는 소설의 일부분이 주인공의 입을 빌어 낭독된다.
드라마에서 살아있는 등장인물의 나레이션과 행동으로 구체화되어지는 문학작품은 그 로맨틱한 매력을 배가시킨다. 그가 다른 드라마들과 차별화되는 독보적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는 이유는 어쩌면 꾸준한 독서를 통해 마음속에 꽉 채워진 빛나는 어휘와 수많은 명인들의 지혜가 어우러진 결과가 아닌지, 작가의 서재를 보고 싶어진다.

독서는 삶의 언저리를 풍요롭게 한다. 책 속에서는 아이들이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가 장엄하게 펼쳐지는가 하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옛 선현을 만날 수도 있고, 인류사에 영향을 끼친 수많은 위인들도 만날 수 있다. 독서를 통해 아이들은 내 눈앞에 펼쳐진 조악하고 위태로운 현실을 시·공간적으로 뛰어넘어 폭과 깊이를 가진 사람으로 성장한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꿈을 꾸게 하고 새로운 호기심을 갖게 한다. 삶이 지쳤을 때는 따뜻한 덕담을 건네는 친구로, 길을 잃고 헤맬 때는 선명한 이정표를 보여주는 길잡이로, 때로는 무릎을 탁 칠만큼 내 마음을 잘 표현해주는 중개자가 되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고 한 것처럼 수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길러주고 싶은 가장 중요한 습관으로 ‘책 읽기’를 꼽는 것은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독서의 중요성을 파악했기 때문이리라. 또한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거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와 같은 독서에 관한 명언들은 시대를 넘어 변치 않는 독서의 효용을 후대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리라. 이쯤 되면 독서의 중요성을 재론할 필요는 별로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고민이 시작된다. 책 읽기의 중요성은 아는데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책을 읽혀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스마트 폰만 잡고 있는 아이들만 보면 가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이 훅 솟구치고 이유 없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래서 아이들만 보면 ‘책 좀 읽지?’라며 뜨악한 눈빛에 잔소리만 늘어놓게 된다. 아이들은 슬금슬금 부모의 눈치만 살피며 책 읽는 시늉만 할 뿐 점점 책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이제는 돌아보아야 한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몇십년의 삶이 찬란하게 남아있는데 마치 우리의 삶은 이미 가망 없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치부하며, “너희라도 책을 읽어라!”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부모는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에, 스마트 폰에 눈을 고정하고 있으면서 앵무새처럼 아이에게만 책 읽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바담 風‘ 하지만 너는 ’바람 風 해라’라는 속담의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건 아닌가?
 
독서가 중요하고, 책 읽는 습관을 우리 아이들에게 길러주고 싶다면 부모가 먼저 책 읽기를 시작해야 한다. 책을 읽으며 혼자 꿈꾸는 듯 미소 짓는 엄마의 모습, 일 하는 틈틈이 한권의 책을 놓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아이들은 독서가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배운다. 배움은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두 다리로 행하는 삶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아이가 맨날 만화책에, 가치 없어 보이는 판타지만 읽는다고 푸념하지 말라. 어느 저녁의 밥상머리에서 아버지가 읽은 책의 한 장면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해 보라. 아이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어렵고 따분하게만 느껴지는 책의 세계로 훌쩍 뛰어 들어갈 수 있다. 어린 시절, 선생님이 들려주시던 책 이야기를 듣고 어려운 고전도 용기를 갖고 읽을 수 있었던 것처럼, 엄마는 아빠는 아이들의 독서 세계를 확장시키는 가교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어른과 나누는 책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은 또래 대화를 통해 사용하는 한정적이고 낮은 차원의 어휘를 넘어, 고차원적인 어휘를 습득할 수 있다. 어휘가 사고의 도구가 된다고 할 때 풍부한 어휘의 사용은 곧 사고력의 확장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책 읽기는 강요가 아니라 습관이어야 한다. 하루에 10분이라도 꾸준히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학교에서, 가정에서 책 읽는 분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어른의 눈높이에서 ‘좋은 책(良書)’을 정해놓고 윽박지르지 말자. 몇 년 전 서울대학교 필독서를 보고 아연실색한 적이 있다. 평생 읽기 어려운 고전들이 수능 전 읽어야 할 도서로 망라되어 있었다. 과연 이 목록을 만든 사람들은 정녕 이 책들을 다 읽은 것인지 묻고 싶다, 책 수집광처럼 ‘3년 동안 100권 읽기’ 방식의 책 읽기를 강요하는 것은 아이들을 책에서 만정이 떨어지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단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아이들이 스스로 책을 선택하고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독서의 출발점이다.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즐겁게,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웹툰, 게임 소설을 읽고도 평생의 이정표를 얻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생각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마음껏 말해보게 하자. 책을 읽고 난 후의 나의 생각과 느낌을 아이들끼리 나눠보게 하면 효과는 배가된다. 자신은 별다른 주목 없이 스쳐 지나간 장면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내용을 말하는 친구의 모습을 통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작가의 이야기를 듣게 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차이를 통해 배우고 사고력을 확장시켜 간다. 이런 의미에서 독서토론은 차이를 통해 외연을 확장시켜가는 탁월한 독서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인백색(百人百色)의 책 읽기, 정해진 목록이 아니라 자신이 읽고 싶고 마음을 담을 수 있는 책 읽기, 내 맘대로 읽을 수 있는 자유가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드라마에서 ‘사랑의 물리학’을 읊조리는 도깨비를 보며 나도 이 시가 실린 시집을 읽고 싶어진다. 작가가 멋지게 건네는 책의 한 구절을 통해 내가 새로운 책 속으로 훌쩍 뛰어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처럼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어른이 되어주고 싶다. 내 손에 들린 책을 보며 우리 아이들이 ‘책 읽기는 참 폼 나는 것, 삶을 풍요롭고 멋스럽게 하는 것, 그래서 자연스럽게 손이 가게 하는 것’, 그렇게 느끼게 해주고 싶다.

아이에게 책을 읽히고 싶다면 지금 당장 돌아보자. 나는 책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영혼 없이 공허한 혀의 놀림으로 ‘징글징글하고 지겹고 정 떨어지는 책 읽기’를 우리 아이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초등학교 때는 책을 좋아하던 내 아이가 점점 책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느낀다면 나의 모습부터 거울에 비추어볼 일이다.   



고보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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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석 2017-02-14 12:00:23
와우.... 내 버킷리스트가 하나 추가 되었다... 공정작가가 되어 보는 것이다. 한 지역에 가서 6개월 이상을 살며 그 지역 주민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 보는 것이다.... 책은 영원한 나의 친구이다.... 참으로 멋지고 고마운 일침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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