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여행은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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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여행은 계속 된다
  • 서진완
  • 승인 2017.01.22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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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서진완 인천대 교수(행정학)는 지난 2013년 1월 3일부터 2014년 1월 2일까지. 365일 간의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왔다. 중·고등학생이던 두 아이와 아내까지. 온 가족이 함께 1년이란 시간을 붙어 있었다. '24시간 365일'을 꼬박 함께 여행하며 경험하고 느꼈던 감정들의 기록을 <인천in>의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국립 인류학 박물관에서 ⓒ 서진완

 

다시 멕시코시티로...

멕시코시티행 버스에 올랐다. 멕시코시티로 돌아와서 아내와 아이들 모두 새로 구한 숙소를 맘에 들어 했다. 하지만 여유도 잠시, 카드 분실 문제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지역 경찰서에 분실 신고를 하러갔지만, 결국은 그곳에서 처리되지 않아 다른 공공기관을 찾아야 했다. 그나마 이 서류를 해당 은행에 제출하면 끝나는 일이라고 하니, 맘이 좀 편해졌다.

작은아이는 국립인류학박물관을 제대로 보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며 하루를 할애했다. 국립인류학박물관은 멕시코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하는데, 마야문명, 아즈텍문명, 테오티우아칸유적 등 멕시코의 다양한 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 곳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박물관 중앙에 위치한 아즈텍 전시실이었다. 전시실로 들어가는 중앙에 위치한 태양의 돌(Stone of the Sun)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외에도 각종 형태의 돌에 새겨진 섬세한 조각과 뱀 형상의 조각상 등은 현재에서도 그 상태가 완전하게 확인 가능할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국립 인류학 박물관의 '태양의 돌' ⓒ 서진완


박물관에는 돌로 만든 유물들만 남아있지만, 돌에 새겨진 문양과 각종 장식을 보면 당시 스페인 군대가 침략했을 때 아즈텍인들이 얼마나 화려하게 생활을 했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스페인 침략 이전의 멕시코를 알고 싶다면 반드시 이곳에서 그들의 유물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화려한 과거의 영화를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복원할지, 지금의 멕시코가 할 일이 너무나 많을 것 같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멕시코의 역사가 말해주듯, 박물관에서 본 유물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그림들이 대체로 암울하고 어두운 느낌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숙소 근처에 있는 디에고 리베라 박물관(Museo Mural Diego Rivera)에서 본 벽화도 그랬고, 시내를 다니면서 보았던 여러 화가들의 벽화와 그림에서도 해골, 절규하는 듯한 얼굴들, 그리고 짙고 어두운 색감들을 사용한 경우가 많아, 나도 불편한 느낌을 갖고 있었었다.

“난 밝은 그림이 좋아!”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처럼 말이다! 나와 아내의 그림에 대한 편견이 이곳 멕시코에서는 유난히 크게 나타난다. 어두운 그림은 싫다!


여기는 또 다른 세상...

멕시코 사람들에게 추천을 받은 도시 탁스코(Taxco)를 찾았다. 멕시코시티에서 180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탁스코에 이르자 산 전체에 하얀색 집들로 덮여있다. 어떻게 이런 가파른 곳에 이렇게 많은 집들이 지어졌을까 신기하기만 했다. 뜨거운 햇살로 흰색 집이 멀리서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탁스코 정상에서 바라본 시내 전경 ⓒ 서진완

시내라기엔 길들이 좁아서 차량 두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였고, 버스가 지나가려면 잠시 다른 차들은 멈춰서야할 정도였다. “이런 가파르고 좁은 곳에 버스정류장이 어디 있을까?” 버스가 정차했다. 더 이상 버스가 갈 곳은 없다. 이곳에서 어떻게 버스가 돌아서 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공간이 너무 좁다. 산 위로 그리고 산 아래로 모든 건물은 하얀색에다, 거리를 달리는 택시도 모두 하얀색 폭스바겐 딱정벌레다.
 


일명 딱정벌레 택시. 이 좁은 차에 우리 가족이 모두 올라탔다. ⓒ 서진완

 

작은아이는 이곳에 오면 딱정벌레 택시를 한번 타보고 싶다고 했다. 아이의 바람대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예수상까지는 택시를 타고 가기로 하고 차를 잡았다. 차문을 열었더니 운전석 옆 좌석이 없다. 좁은 뒷좌석에 아내와 아이들이 타고, 택시기사는 보조의자를 펼치더니 타라고 했다. 아이들도 웃고 아내도 웃었다. 택시기사는 너무나 당연하듯이 앉을 수 있다면서 손으로 바깥문을 꼭 붙들고 가면 된다고 했다. 택시는 가파른 언덕길을 힘차게 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낡은 차로 이런 가파른 길을 오르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엔진소리가 숨에 닿을 듯 하면서 길을 올랐다. 창밖에 잡은 나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와~아!” 정상에 도착하고 내려다보는 순간, 산 아래로 펼쳐진 탁스코의 하얀색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산 아래로 펼쳐진 이 모습을 보기 위해 아침부터 여기까지 버스를 타고 온 것이다.

성당 주변은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좁은 거리에는 난전이 들어서서 은으로 만든 각종 액세서리를 파는 사람들로 붐볐다. 차들이 지나칠 때면 도로 옆으로 바짝 붙여야할 만큼 도로는 좁았지만, 옛 모습 그대로 돌로 만들어진 거리를 걷기에 더 없이 운치가 있다. 수도원으로 이어지는 길 주변에는 예쁜 집들과 가게들이 이어졌다. 현재의 이 시가지 전체가 식민지시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멕시코정부가 이 지역을 문화재로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좁은 골목길을 걸으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이곳은 사진을 찍기에 정말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색 작은 돌로 아스팔트 포장을 대신해서 만든 길들은 탁스코 만의 독특한 모습을 연출하고, 그 위에 다양한 흰색 건물들과 흰색 딱정벌레 택시가 멋지게 어울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탁스코의 좁은 골목 ⓒ 서진완

해가 지기 직전에 버스에 올라서 탁스코를 떠났다. 멕시코시티에 도착하자 해는 완전히 지고 어둠이 깊어져서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서로가 너나 할 것 없이 바짝 붙어 섰다. 지하철 입구에는 경찰들이 서 있어서 한편으로 안심이 되었지만, 그만큼 이곳이 위험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기에 지하철역을 나와 종종 걸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벌써 숙소 주변 가게들은 문을 닫았다. 숙소의 불빛을 확인했다. 가족이 함께 할 때는 무조건 안전이 우선이다!

앗! 이건 또 뭐야? 어찌 이런 일이...

우리 집에 머무르고 있는 제자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아파트관리비가 미납 처리되었다고 했다. 그럴 리가! 월급이 들어오는 계좌에 자동이체를 시켜두었기에 그럴 리 없단 생각만 들었다. 인터넷으로 계좌를 확인했다. 이-럴-수-가!

순간 몸이 굳어졌다. 인터넷뱅킹 사고다. 누군가 7월 21일 새벽에 내 이름으로 공인인증서를 발급받고 그 시간 이후 계좌 내에 있는 모든 예금과 마이너스통장 한도액까지 인출해 가버렸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한 번도 인터넷뱅킹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보안카드를 분실한 적도 없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 게다가 아내가 사용해왔던 컴퓨터는 6월 마이애미에 들어갈 때 고장이 나서 사용을 하지 못했었고, 플로리다에서 제자부부를 만났을 때 한국으로 이미 보냈지 않았는가! 한국시간으로 자정이 다 되어갈 즈음에 국제전화로 은행거래를 정지시키고, 인터넷뱅킹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이제부터는 무엇을 어떻게 하지? 이미 사건은 벌어졌으며,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가 더 중요했다. 여행경비를 넣어둔 다른 은행계좌도 확인했다. 그곳은 이상이 없었지만, 그래도 공인인증서를 발급받았다면 타 은행에 등록해서 또 다른 범죄도 가능할 것 같아서 그 계좌에 대한 인터넷뱅킹도 불가능하도록 보안카드 분실신고를 해두었다.

한국시간으로 자정이 넘었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지인에게 연락해서 몇 가지 추가적으로 부탁을 했다. 그리고 이런 일을 잘 알 것 같은 친구에게 메모를 남겼다. 한국과 이곳 멕시코와의 시차가 14시간이 되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오후부터, 한국은 오전 업무시간이 시작되면서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전화에 매달렸다.

은행거래가 중지되면서 본인 확인 없이 거래내역을 알려줄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듯 했다. 친구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다행히 오랫동안 거래했던 지점의 팀장과 직접 통화를 해서 급한 상황을 처리했다. 사고신고를 하고 경찰에도 신고를 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자동이체를 신청해둔 거래 모두 문제가 되었고, 특히 카드대금이 결제되지 않아 연체 위기에 있다는 연락도 받았다. 추가적인 문제가 연쇄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한국에서 직접 나를 위해 뛰고 있는 제자에게 미안하고 또 고맙기도 했다. 이곳에서 한국의 상황을 페이스북으로 보고 받고, 알아보게 부탁하고, 그리고 또 전화했다.

무엇보다도 공증위임장을 만드는 것이 급했다. 다행히 다음 날 미국 댈러스(Dallas)로 들어가기 때문에 도착하는 즉시 바로 한국영사관으로 가야했다. 한국에 있는 대리인에게 나의 법적 권한을 위임해서 나를 대신해서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해줘야 했다. 이곳 시간으로 새벽 2시에 제자가 페이스북에 문자를 남겼다. 관할 경찰서에 신고를 직접 하러 간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페이스북에 남겨진 문자를 보고 다시 한국에 전화를 했다.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해주고, 아이들을 깨웠다. 밤을 꼬박 새운 셈이다. 아침을 어떻게 먹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배낭을 정리했다.

지하철역까지 작은아이가 앞장을 섰다. 아침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대신 물건을 파는 잡상인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지하철 내는 조용했다. 멕시코시티의 공항역은 에스컬레이터가 없어서 무거운 짐을 지고 계단으로 올라가야만 한다. 게다가 공항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카트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국제공항이냐?" 큰아이는 투덜거리며 이러저리 찾더니 앞서 걸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제가 찾아 볼게요”

아이들은 카드분실에 이어 이번 인터넷뱅킹 사고로 인해 힘들어하는 우리 부부의 심기를 가능한 살피는 눈치다. 티켓팅을 하고 배낭을 부쳤다. 그리고 탑승구역으로 들어왔다. 이제 멕시코를 떠난다. 이런 사고만 없었더라면 좋은 기억만을 간직하고 떠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빨리 이곳을 떠났으면 하는 마음이 앞섰다.

그래도, 여행을 즐기자!

댈러스를 통해 미국에 다시 들어왔다. 큰아이는 렌트카에 배낭을 익숙하게 정리했고 공항을 나섰다. 아내가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Mrs. Raymond를 만나기로 했다. 특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녀와 남편 모두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는데, 실제 나이보다는 훨씬 젊게 사는 듯 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멕시코에서 일어난 사고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을 해주며, 당신들 집에서 머무르라고 했다. 결국 비용을 지불하고 예약해둔 숙소는 포기했다.

급한 일부터 먼저...

아침 일찍 한국영사관이 있는 휴스턴(Houston)으로 가려고 했었는데, 최근 댈러스에도 영사업무를 도와주는 곳이 생겼다고 했다. 저녁 늦게 한국의 사이버수사대 수사관과 다시 통화를 하고, 위임장 건을 설명해주었다. 다음날 업무가 시작하는 시간에 맞추어 영사관에 도착했다. 댈러스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서 이곳에도 영사관 출장소가 생겼다고 했다. 나로서는 정말 반가운 일이었다. 주중이고 오전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이 없어서 바로 신청을 했고 제자를 법정대리인으로 하는 위임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체국에 들러 가장 빠른 국제우편으로 한국에 보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부는 스캔해서 이메일로 보내고, 또 다른 한 부는 팩스로 거래은행에 보냈다.

“커피 한잔하고 숨부터 돌려요!” 맞는 말이다. 급하게 처리해야할 일들을 끝냈다. 이제부터는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래 다시 여행을 즐기자!” 아이들과 함께 한인 타운에 가서 한국음식을 먹고 멕시코에서 고장 난 큰아이 안경도 고쳤다.

Raymond 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한인 타운에 먼저 들러 아내는 앞으로 4주 동안 서부여행에 필요한 물자를 보충했다. 떡을 먹고 싶어 하는 작은아이를 위해 인절미와 가래떡도 샀다. 배낭정리는 역시 큰아이의 몫이다. 우린 그렇게 댈러스를 떠났다.


늑대와 춤을


배드랜드 국립공원 ⓒ 서진완

날씨가 더울 줄은 알았지만 정말 너무 덥다. 다만 습기가 많지 않기 때문에 건식사우나에 있는 느낌이다. 아침인데도 이 정도라면 한 낮에는 과연 어떨까 싶다. 그래도 차 안에서 에어컨을 켜고 있으면 쾌적하게 바깥 경치를 볼 수 있어서 좋다. 텍사스 주와 오클라호마 주를 지나 북으로 캔자스 주까지 가는 길은 아무것도 볼 것 없는 평지다. 그래도 아이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지겨운 줄 모르고 갈 수 있다.

아이들은 멕시코에서 있었던 황당한 일을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았다. 어느덧 작은아이는 잠이 들었고, 큰아이도 책을 보다 잠이 들었다. 바깥 풍경을 보면서 조용한 시간을 가지는 것은 갖가지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된다. 지난 며칠 동안 정신없이 지냈던 일들을 정리 하고,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생각했다. 네브래스카 주를 지나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로 들어서자 주변 경치가 달라졌다. 차들도 집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도 가도 끝없는 들판이 이어졌다. 아내가 운전대를 잡아주어 나도 잠시 눈을 감았다.
 


운전중에 마주친 버팔로때 ⓒ 서진완

창밖으로 펼쳐진 블랙힐스(Black Hills) 일대는 바로 영화 ‘늑대와 춤을(Dance with Wolves)’을 촬영한 곳이다. John Barry가 작곡한 영화의 주제음악이 떠올랐다. 문명과 자연이 어떻게 만나 동화하고 서로를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자연은 문명의 파괴적인 힘 앞에서 힘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을 보여준 이 영화를 난 가장 좋아한다. 이어지는 배드랜드(Badlands)국립공원 입구에서 노루 떼를 만났다. 이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 넓은 땅에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들만의 자유를 만끽하는 듯 했다. 배드랜드에 들어서자 황량하고 절망스러운 느낌이 든다. 광활한 대지에 메마른 흙산이 기묘한 모양을 하고 늘어서 있고, 저 멀리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아내와 아이들이 잠시 잠을 청한 사이에 멀리서 검은색 무리가 보였다. 순간 버팔로라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차를 몰았다가, 바로 앞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을 깨웠다. 언덕 전체를 버팔로가 뒤 덮고 있다.

수(Sioux)족 인디언들이 버팔로 무리를 쫓는 영화 속 장면이 연상되었다. 버팔로가 도로 옆에 있는 연못에 물을 먹으러 왔다. 중간 중간 새끼 버팔로까지 보였다. 아이들과 함께 연못 근처까지 카메라를 들고 내려갔다. 이 넓은 들판에 생명체 하나 보이지 않았는데, 언덕 전체를 덮고 있는 버팔로 떼는 경이롭다. 우리가 차를 세우는 바람에 앞뒤로 오던 차들도 멈춰 섰다. 그리고 모두 내렸다. 들판에 바람이 분다. 이 땅의 주인이었던 수족 인디언들이 이곳 어디에선가 고스트 댄스(Ghost Dance)를 추는 것 같다.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자 잡초들이 이러 저리 흩날렸다. 이제 들판에는 더 이상 인디언도 버팔로도 보이지 않았다.

래피드시티(Rapid City)를 중심으로 펼쳐진 블랙힐스 일대는 미국의 인디언 역사를 설명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큰 바위의 얼굴과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로 대표되는 이곳에서 현재의 미국과 과거의 미국을 동시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큰바위 얼굴-워싱턴, 제퍼슨, 링컨, 루즈벨트의 얼굴이 세겨져 있다. ⓒ 서진완

아침 일찍 가벼운 차림으로 숙소를 나섰다. 러시모어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들어서자 눈앞에 4명의 미국대통령 얼굴이 큰 바위에 새겨져 있다. 얼굴 하나의 크기만 해도 거의 20m나 되는 정도의 크기라고 하지만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눈과 코, 그리고 얼굴 전체의 모습이 실제 모습 그대로 정교했다. 큰 바위의 얼굴 아래까지 내려가서 위로 쳐다보기도 했다.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George Washington),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제퍼슨(Thomas Jefferson),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흑인 노예제를 폐지했던 링컨(Abraham Lincoln), 파나마 운하 구축 등으로 미국의 지위를 세계적으로 올려놓은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의 초상이 산 정상에 있는 거대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인디언들이 신성하다고 믿고 있는 바로 이 블랙힐스 일대에 왜 미국 대통령의 얼굴을 새겼을까?” 이들 대통령들은 과거 서부개척시대에 인디언들을 현상금을 붙여서 토벌했던 바로 그 시대의 역사적 인물들인데 지금 이곳에서 이렇게 이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모습은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러시모아 곳곳에 미국의 정신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많지만, 아이들에게 미국이 숨겨온 인디언의 역사에 대해서도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 4-5백만 명에 달했다는 미국 인디언들이 3-40만 명으로 줄어든 그 비극의 역사를 말이다.

큰 바위의 얼굴(Mount Rushmore)를 본 인디언들의 요청에 따라 시작된 크레이지호스 기념관(Crazy Horse Memorial)은 이곳 블랙힐스에서 살았던 수족의 추장 크레이지호스가 말을 타고 호령을 하는 듯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현재는 얼굴 부분이 완성되고, 전체 윤곽만을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언젠가 원래 의도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때는 역사적인 조형물이 될 것이다. 한 개인과 그 가족이 정부의 도움 없이 입장료 수입으로 이 사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인디언 수족들이 마음껏 뛰어 다녀야 할 그들의 땅이었기 때문에 이 기념비적인 조형물이 완성되는 날에는 인디언들의 자존심이 조금이나마 회복될 수 있을 것 같다. 윈드케이브(Wind Cave)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다시 버팔로를 만났다. 블랙힐스 일대를 지나는 4일내내 우리는 자연과 인디언들의 소리를 엿들었다.

<정리=이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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