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고통을 재현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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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고통을 재현할 수 있는가
  • 이소영
  • 승인 2017.01.2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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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이소영 / 대구대학교 기초교육대학 창조융합학부 조교수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 행위는 타자를 이해하려는 관심의 표현이다. 하지만 듣고자 하는 의지와 상관없이 말하지 않는 타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주변화 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는 주류 미디어에서 배제되고 왜곡되어 의미 없는 소음으로 취급되거나 편집 대상으로 분류되곤 한다.

그렇다면 들리지 않는 타자의 목소리를 재현할 수 있을까? 예술에 있어서 재현이라는 화두는 참여적 예술가들의 실천윤리의 한계와 재현할 수 없음이라는 사태에 직면하게 한다. 그 까닭은 윤리의 측면에서 타자의 불행을 표층적으로만 재현할 경우 단순히 볼거리로 전락해버릴지 모른다는 우려와 더불어 타자의 존엄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소임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예술가의 자발적 윤리의식이 ‘재현 불가의 금기’, ‘비재현’의 윤리적 근거의 한 축을 형성해왔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고통 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라고 말하며, 고통을 증명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물음을 던진 바 있다. 지난 세기의 예술은 죽음의 순간이나 전쟁과 같이 고통의 순간을 포착하여 영원히 잊히지 않을 수많은 이미지들을 기록했다. 잊히지 않을 기억은 실재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카메라의 등장으로 개인의 죽음이나 고달픔을 넘어 사회적 참상으로 확장되지만,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사진의 의지가 현실의 직접적 재현으로 말미암아 시각적 폭력이라는 윤리문제와 맞물리게 된다. 나아가 좀 더 극적인 이미지를 찾아 나서려는 충동이 사진산업을 등장시켰으며, 사진산업은 곧 충격이 소비를 자극하는 주된 요소이자 가치의 원천이라고 여기게 되는 문화의 일부가 됐다. 그 결과 사진가를 치열한 사건 현장으로 침투시키고, 조작하게 하며, 그렇게 생산된 이미지를 유통하도록 설정된 구조가 카메라의 응시 뒤에 도사리게 되는 것이다.

고통과 분노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미지, 내 안의 불편함을 꺼내어 보도록 재촉하는 이미지, 평온한 일상을 불시에 침투하는 한 장의 사진은 종종 감당하기 힘든 세계의 진실 속으로 우리를 내몬다. 칠레 태생의 미국 작가 알프레도 자르(Alfredo Jaar)는 정치적 관심과 윤리, 그리고 미학 사이의 관계를 <르완다 프로젝트(The Rwanda Projct)>를 통해 구사한다. 그는 작품 <실제 사진(Real Picture)>(1995)에서 잔혹함의 현장을 입증하는 시각자료를 단 한 장도 노출하지 않은 채, 르완다 대학살의 기록사진 550장을 분류하여 수십 개의 블랙박스 내부에 감추어 전시장 도처에 배열한다. 시각 이미지들은 ‘매장’되고,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봉인된 블랙박스 표면에 명기된 흰색 설명문(학살의 생존자 이름, 나이, 만난 장소, 증언 등을 상세히 기록한)뿐이다.

대학살의 참상을 블랙박스에 봉인하여 보여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부재하는 존재의 ‘실제(real)’ 이미지를 눈앞에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보는 행위와 같은 방식으로 사건에 대해 우리의 감각이 생생한 이미지를 상상해내도록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한 재현성’의 힘으로 사건은 현전하며 일종의 아포리아를 형성한다.

작품을 통해 자르는 침묵을 강요당한 자들의 부재하는 목소리를 대리 증언하고 있다. 그의 발언들은 엄밀히 말해 유사증언에 불과하다. 말할 수 없는 자들의 증언이란 애당초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리 발화자의 지위는 바로 말할 수 없는 자의 ‘도래 불가능성’에 기인한다는 것과 역설적으로 바로 그 ‘불가능성을 토대로 증언의 가능성이 발생’한다는 지점에 있다. 침묵하는 자리, 그 빈 공간을 기입하기 위해 자르는 불가능한 것의 재현을 시도한다.

예술가의 고군분투는 허구적 상상이나 개인적인 식견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현실의 단편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현실을 그 경계까지 밀어 사유할 때라야 비로소 가능한 수행에 비할 수 있는 무엇이다. 진실로 이해하고자 하는 그 순간, 불가능성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분할의 구획선들이 자유로이 가로지르며 무수한 차이의 감수성들이 충돌하는 장, 그것이 예술의 공간이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 그러므로 도래 불가능했던 무수한 상상들이 작동하는 방식으로 예술은 그 존재의 역량을 증명한다. 예술적 재현의 대상이 해체될 때, 역설적으로 재현은 다시금 당위성을 획득한다. 재현을 포기한 예술이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는 것’에 대하여 다시 사유해야 하는 까닭이다.





(위) Alfredo Jaar, Real Picture, 1995.
(아래) Alfredo Jaar, The Eyes of Gutete Emerita, 1996.

1994년부터 2000년 초반까지 6년에 걸쳐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1994년 4월부터 약100일간 르완다에서 벌어진 대학살의 기록을 다매체적 설치예술의 형태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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