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부지 어디까지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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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부지 어디까지 가세요?"
  • 김인자
  • 승인 2017.02.14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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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지하철의 할아버지

감기로 며칠째 끙끙 앓다가 나선 한양가는길. 멀미 때문에 버스는 엄두도 못내겠고 전철을 타고 가야지 생각하며 얼마나 걸리려나 소요시간을 확인해보니 두 시간도 넘게 걸린단다. 그것도 두시간 넘게 전철을 타고 가서는 거기서 또 마을 버스를 타야 한다는데 길치인 내가 맨정신도 아니고 독한 감기약을 먹고 제대로 찾아갈 수 있으려나 걱정하며 일단 집을 나서긴 나섰는데...
집밖에 나오니 북풍 한파가 뼈속까지 파고 들어 가득이나 주둑든 몸이 바짝 움추러 들었다. 목적지 까지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 런지 걱정이 태산인데 날씨까지 쨍하게 추우니 겁이 덜컥났다.
목소리가 맑고 깨끗한 상태로 녹음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심한 목감기까지 걸렸으니 이 상태로 약속장소에 가는게 옳은가에 대한 고민은 전철을 타고 가면서도 계속되었다. 목은 점점 더 기침가래로 막혀가고 이래저래 몸땡이까지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나 하나 때문에 여러사람 피해줄 수 없고 약속은 하늘이 두쪽 나도 꼭 지켜야한다고 생각하는 성정인지라 가던 길을 멈출 수는 없다 생각하고 계속 가는데, 술취한 사람 처럼 땅바닥이 흔들거리는거다. 그래도 어찌어찌하여 인천지하철역까지 잘 걸어와 전철도 잘 타고 7호선까지 무사히 잘 와서 환승도잘했다. 왕길치가 단 한번도 헤매지 않고 말이다. 7호선은 쾌적한 실내에 출근 시간도 막 지난 오전 시간대라 그런지 지하철안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부터 시작되었다.
 
전철이 들어와 서고 자리가 나믄 좋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문 사이로 보니 진짜 빈자리가 보였다.두 시간이나 가야하는데 참 잘 되었다 좋아하면서 앉으려고 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옆에 와 서신다.
 
"할아부지, 여기 앉으세요."
"됐거던. 학생이 앉아."
"아니예요. 할아부지가 앉으세요." 하고 보니 발밑에 임산부자리라고 빨갛게 써 있는 글씨가 보인다.
아 그래서 할아부지가 앉지 않으시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나도 쭈삣쭈삣 할아부지 옆에 서니 할아부지가 갑자기 내팔을 확 잡아 끌어다 자리에 앉치신다.
"여기 임산부 자리에요... 할아부지"
하며 다시 엉거주춤 일어서니 할아버지가 다시 팔을 잡아 자리에 앉치신다.
"임산부고 뭐고... 앉는 사람이 임자지.
그나저나 뭔 땀을 그리 흘려?
많이 안좋은가? 얼릉 앉어."
"네 "
 
녹음하러 서울가는길
감기땜에 무리해서 나선 길
본의아니게 앉게된 임산부자리
마음이 영 불편해서 궁디를 자리에 제대로 딱 붙이지도 못하고 엉성하게 앉아있는데 할아부지가 내 어깨를 지긋이 누르신다.
할아부지가 지키고 계셔서 일어나지도 못하겠고 한 시간 반을 우짜면 좋냐... 그런 것도 잠시
 
내가 할아부지빽을 믿고 잤나부다. 거기다 꿈까지 꾸어가며 아주 달디 달게 잤나보다. 어수선한 소리에 깜짝놀라 일어나보니 태능이란다.
 
"잘잤어? 많이 아픈가보네.. 끙끙 앓는 소리 내면서 자더만."
내 앞에 앉아계시던 할아부지가 어느새 옆에 앉아계셨다.
"아고 죄송해요, 할아부지 많이 시끄러우셨지요?"
"시끄럽긴. 젊은사람이 얼마나 아프면 저런 소리를 낼까 내 걱정했지."
드디어 내가 내릴 목적지 안내방송이 나온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는 내게 할아버지가 웃으시며 인사를 받으신다.
"잘가시게. 입마를 테니 이거 가믄서 까먹어 .."
할아부지가 주머니에서 귤 하나를 꺼내주셨다.
"멀리가시네요, 할아부지 어디까지 가세요?"
"나?ㅎ 나는 벌써 갔다왔지."
 
갔다왔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내 이제서야 알았다. 바보 등신 그때는 왜 그 말이 무슨 뜻인줄 몰랐을까
내가 할아버지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을 잤나보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내리실 곳에서 내리지 못하셨나보다.
아 이 쥐정신 귤할아버지를 다시 또 어디서 만나나... 죄송해서 어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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