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라는 지도를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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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라는 지도를 들고
  • 양진채
  • 승인 2017.02.17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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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너의 도큐먼트 / 김금희
 

<너의 도큐먼트>는 김금희 소설가의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작이다. 김금희 소설가는 1979년 부산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성장했고, 지금도 인천에 살고 있으며, 현대문학상,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신동엽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받는 젊은 소설가로 성장하고 있다.
 

김금희 소설가의 등단작 <너의 도큐먼트> 외에도 <아이들>, <장글숲을 헤쳐서 가면> 등에서도 인천의 여러 곳이 인상적으로 등장하고 있어 퍽 관심이 간다.


<너의 도큐먼트>에서는, 사업 실패로 신용불량자가 되어 괴도 ‘뤼뺑’처럼 사라졌다가는 몇 달 만에 한 번씩 집에 들르는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이야기를 큰 축으로 하고 있다. 아버지를 찾아 인천을 뒤지는 것이다. ‘부채처럼 착착 접으면 세로가 삼십 센티미터쯤 되는’ 지도를 들고 말이다. 엄마가 갈산, 계산, 계양 등을 뒤지고 내가 주안, 신포동, 자유공원 등 항구 쪽으로 뒤지기 시작한다.

 

전화기에 찍힌 발신번호는 ‘76’으로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가 동인천 근처에 있다고 확신했다. 항구로 향하고 있던 내 지도상의 추적 라인은 정확했던 셈이다. 역에서 신포동까지, 다시 차이나타운까지 걸으며 만나는 공중전화마다 내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나는 아버지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엄마 말을 믿지 않았다.
 

중구청을 지나 차이나타운으로 향하는 길은 자동차 하나가 겨우 지날 만큼 폭이 좁았다. 옛 조계지 시절에 지은 건물들을 따라 오르면 치파오와 중국신발, 효자손과 나무칼 같은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이 나온다. 나는 그 앞을 기웃거리다 손지갑을 하나 샀다. 낮에는 자유공원에 올라 장기 두는 노인을 지켜보거나 파라다이스호텔 주차장에서 항구를 내려다보았다. 저녁에는 얕은 둔덕을 줄지어 오르는 가로등이 나를 자꾸 걷게 했다. 쇠락한 거리와 어울리게 내 걸음도 느릿느릿했다. 박문사, 중구대서소, 칠성통상, 신공항공인중개사, 중앙동커피점을 지나 드디어 홍등의 무리가 나타나면 하루의 추적을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인용이 길었다. 요즘은 가족 모두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어 소위 집 전화가 없는 집이 많다. 한때는 집 전화의 앞 번호로 지역을 파악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다. 주인공은 전화번호의 앞자리를 통해 아버지가 동인천 근처에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그 주변을 뒤진다. (내가 아버지를 찾아 뒤지는 거리를 사진으로 보는 것처럼 묘사를 해놓아 독자에게도 저절로 그림이 그려진다.) 그리고 아버지를 발견한다. 곳곳에서 아버지와 비슷한 뒷모습을 만난 지 한참만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발견했지만 아버지와 마주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버지를 보았다는 얘길 하지 않는다.
 

다시 찾아갔을 때에도 아버지가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앞에서 걷는다. 부녀의 만남은 좀처럼 성사되지 않는다. 망설일 뿐이다. 중화가 입구 야외공연장에서 경극을 보고 써커스를 보고 그러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같은 거리를 ‘밀며’ 걷는다. 아버지도 나도 그 거리를 가로 지르지 않는다. 내내 그 간격을 유지하다 나는 버스에 올라탄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동안 나달해진, 속지가 드러난 지도를 찢어 버린다. 그러면서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아채며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 남은 텅 빈 도큐먼트야말로 네 것이라고.’


이렇게 아버지 찾기가 지도 위의 동그라미나 엑스를 표시해가며 찾는 일이라면, 갑자기 죽은 친구인 여미를 찾아가는 길은 주소가 있다. 여미의 집 앞에는 여미와 같은 성을 가진 문패가 있다. 그러나 여미와 꼭 닮은 동생은 여미의 존재를 부정한다. 나는 그 집에서 생선을 굽고 된장찌개를 끓이는 냄새를 맡는다. 돌아오는 길, 여미를 잊고자 하는 감정과 기억하고자 하는 감정 속에 얼굴이 젖었다 마른다. 이는, 아버지를 만났을 때 끝내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만나지 않는 감정과 겹친다. 이 소설은 시종 차분하게 나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지 않은 채 일상을 드러낸다. 감정을 과잉하는 일도 없이, 일상을 소설화 하는 일도 없이 그냥 보여준다. 그냥 보여주고 있는데 써커스 장에서 훌라후프를 떨어뜨린 소녀처럼, 밴댕이 횟집이 몰려 있는 곳에서 ‘청추우운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노래하는 여장을 한 남자를 보는 것처럼 뭔가가 아슴하게 훑고 지나간다.

 

소형 트럭을 몰고 싶어하는 엄마는 가게에 차양을 달 것이다. 여미가 죽었어도 녹색 대문 집 사람들은 저녁이면 생선을 구울 것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 주용의 카메라는 계속 여미를 찍을 것이다. 심지어 시간이 흐르면 씰리콘 밴드와 풍선조차 채주의 몸이 될 것이다.

 

어쨌든 삶은 지속된다. 그것이 어떤 방향이냐와 상관없이, 각자의 몫대로. 각자 자신이 만든 지도를 들고.


이 소설은 아버지 찾기를 통해 삶은 격동적이지도, 슬프지도, 아름답거나 슬프지도 않은 채 담담히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장면을 위해 배경이 된 차이나타운은 절묘하다. 중구청에서 차이나타운, 밴댕이 거리까지, 옛 조개지 시절의 건물의 쇠락과 야외공연장의 공연으로 등장하는 경극과 써커스, 여장 남자의 청춘을 돌려달라는 트로트, 이 모든 것들이 만들어내는 부조화는 덤덤한 듯 걷는 나의 심정처럼 얽혀 있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문득 이형기 시인의 시 <낙화(落花)>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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