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부두엔 춘자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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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부두엔 춘자가 산다
  • 양진채
  • 승인 2017.04.21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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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춘자/ 이수조

 

ⓒ문경숙

 

전 달에 연재했던 김미월 소설가의 소설 <중국어 수업>이 타지에 사는 사람의 시선으로 인천 연안부두를 바라보았다면, 이수조 소설가의 <춘자>는 연안부두에서 제왕여인숙을 운영하는 춘자를 통해 연안부두를 보고 있다. 이수조 소설가는 오랫동안 연안부두 근처에 살면서 누구보다도 연안부두에서 느껴지는 삶의 생리, 바다의 생리, 부두의 생리를 잘 아는 작가가 되었다.

 

학교에선 선생님들이 질문할 때마다 저 뒤에 키 큰 춘자가 말해볼까, 하고 쉽게 지목했다. 동네 어른들도 춘자를 불렀다. 장기 둘 때나, 화투를 칠 때 패가 잘 나와도 불렀고 잘 못 나올 땐 욕을 섞어가며 불렀다. 심지어 술을 마실 때도 불렀다. 남자아이들은 집 밖에서 춘자야 놀자 하며 큰소리로 부른 후 달아나곤 했다.

 

어쩐 일인지 춘자라는 이름은 이렇게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장난처럼, 놀림처럼, 감탄처럼 불린다. 왜 그럴까. 이쯤에서 연안부두를 생각해보자. 연안부두는 배들이 들어와 사람들을 싣고 섬으로 떠나고, 또 섬에서 나온 사람들을 부리는 곳이다. 매일 많은 배가 들고 나지만 누구도 연안부두 자체에 묶이는 법은 없다. 종착지가 아니라 간이역처럼 부두는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가 빠지기를 반복하는 곳이다. 어쩐지 이름 자체로 불리지 못하는 춘자와 부유하는 인간들이 중심이 되는 부두가 묘하게 닮아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지.


작가가 그리고 있는 연안부두는 여인숙을 중심으로 바닥의 삶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폭력을 일삼았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로 인해 생을 버린 엄마에 대한 상처와 남편의 폭력을 폭력으로 맞선 춘자, 아이를 낳은 얼마 뒤 집을 나간 아내를 10년 넘게 찾아다닌 정, 남자에게 몸을 팔아 돈놀이를 하는 늙은 해파리 모두 지독한 삶을, 그러나 최소한 남 등쳐먹지 않고 성실하게 사는 인물들이다.

아내를 쫓던 정은 연안부두에 와서야 자리를 잡는다.

 

연안부두 좋네요. 파도 소리도 들리고요.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서 좋네요. 훨훨 나는 갈매기도 보기 좋심더. 풍경도 좋고, 누님 인심도 좋아서 그만 떠돌아 댕기고 여기 주저 앉을람니더.

 

연안부두는 그런 곳이다. 떠나든 머무르든,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저 닻을 내릴 수 있게 자리를 내어주는 곳.

할머니 해파리는 어떤가.

 

여자는 이곳 연안부두에서 잘 알려진 할머니 해파리다. 해파리는 어시장에 즐비하게 들어선 회 센터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 말하자면 삐끼다. 여자는 해파리 노릇으로 번 쥐뿔도 안 되는 돈을 가지고 뱃사람을 상대로 돈놀이를 한다. 어시장 앞에서 덩치 큰 남자와 드잡이를 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았다. 오래전에 남편과 아이들을 버리고 해파리로 살아가는 여자였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자식과 남편을 버리고 해파리로 살아가는 여자다. 회 센터 앞에서 호객행위를 하지만 때때로 늙음을 화장으로 가리고 빨간 하이힐을 신고와 젊은 남자와 제왕여인숙에서 죽을 듯 욕정을 풀기도 하는 해파리야말로 삶의 직선에 닿아 있다. 부두의 삶은 가식이 없다.

 

남편이 떠난 후에도 바다는 연일 흙으로 메워졌다. 창문만 열면 바로 앞에서 출렁대던 바다는 자꾸만 멀어져 갔다. 바다가 육지로 변한 자리에는 모텔과 해수탕과 대형 음식점과 해양광장 까지 완벽한 위락시설을 갖춘 관광위락단지가 형성되었다. 지난해엔 썬팅지로 안을 가린 이층 창문에 ‘장기방 우대 월 30만원’ 이라고 써 붙였다.
 


춘자의 삶 역시 다를 바 없다. 출렁이는 바다가 육지로 변하면서 모텔과 대형 음식점들이 들어서면서 제왕여인숙은 제왕의 자리를 내놓은 채 월방을 놓아야 하는 신세로 바뀐다. 그 제왕여인숙은 우람한 은행나무에 가려져 제왕여인숙의 ‘왕’자와 ‘숙’자가 가려져 ‘제 여인’으로 보인다. 여인숙의 주인이든, 손님이든 제왕을 꿈꾸지만 그 누구도 제왕이 될 수 없는 삶. 그래서 망망대해의 바다가 아니라 바다와 육지의 경계, 배가 닿았다가는 떠나는 부두의 무수한 발자국들처럼 삶은 스산하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덩치 큰 남자는 작고 늙은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남자의 품에 안겨 걸음을 옮기던 여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스트레스를 맘껏 풀고 난 다음의 밝은 표정이다. 마지막 남은 노을 한 자락이 그 여자의 머리위에 걸린다. 빨간 구두소리가 당당하게 들려왔다. 해파리 여자는 그 순간 사실상 제왕이었다. 그들은 바다로 난 길을 따라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연안부두의 ‘연안’과 ‘부두’는 그 단어들을 가만히 발음해보면 뭔가 따뜻하고 둥근 느낌이다. 어쩐지 내겐 그들 단어 속에서 파도치는 거친 삶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연안부두’는 늘 뜨내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정작 뜨내기는 잠깐 회를 먹거나 사러 왔다가,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섬 어딘가로 갔다 나오는 이들이 뜨내기일 뿐, 부두는 늘 묵묵히 제 자리에 있는데 말이다.

 

정은 처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누님요. 쇳덩이는 아무것도 아니라예. 해머로 두들겨 패고 불로 녹이면 안 되는 기 없심더. 쇳덩이보다 더 무겁고 단단한 기 사람 맘인기라요.

 

이수조 소설가는 연안부두의 제왕여인숙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인간군상의 삶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터넷이나 뒤지고 자료조사를 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아예 삶의 한 공간을 그곳에 몸담고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언어와 문장들이 소설 속에서 바닷물보다 더 높게 출렁인다. 연안부두 뒷골목 어디쯤 가면 제왕여인숙도 그 여인숙의 카운터에 앉아 있을 ‘나’도, 늙은 해파리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생동감이 들어, 소설을 읽는 내내 연안부두로 달려가고 싶게 한다. 부두에서 바람이 방향을 바꾸는 것도, 방파제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도, 노을이 내리기 시작하는 바다도 보면서 ‘정’처럼 ‘연안부두 좋네요.’ 말하고 싶다. 그러면서 그들과 질펀하게 소주잔을 돌리며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를 외쳐 부르고 싶다.
 

‘사랑해, 사랑해. 죽도록 사랑해. 춘자야 보고 잡다. 시팔. 안타까움을 깡소주를 비우며 토해냈지만 결국 모두가 떠난 자리에 나는 여인숙 허름한 벽에 낙서처럼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한 춘자도 그때쯤이면 투명한 소주를 들이켜고 저 떠나는 배를 아쉬움 없이 털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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