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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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불신
  • 송수연
  • 승인 2017.04.24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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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연의 영화읽기] (4) 분노 / 이상일 감독

‘송수연의 영화 읽기’는 남구의 예술영화관 ‘영화공간주안’과 송수연 평론가의 협약하에 <인천in>에 개봉영화를 리뷰하는 기획입니다. 매월 ‘영화공간주안’이 상영하는 예술영화의 예술적 가치 및 의미를 되새기며, 특히 영화와 아동청소년 문학의 접점을 독자와 함께 읽고자 합니다. 





언젠가부터 부모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들을 보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생각과 감정이 일었다. 단순화하면 일종의 경이라 할 수 있는 그 감정의 정체는 부모를 향한 아이의 전폭적인 신뢰가 주는 놀라움이다. 아주 작은 아가에서부터 꽤 자란 아동까지 보통 부모에게 안긴 아이들은 온 몸에 힘을 빼고 있다. ‘이 사람이 날 놓아버릴지도 몰라.’ 라는 의심(혹은 생각)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그렇게 자신을 온전히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을까. 정말 놓쳐버린다면 생명이 위태로울 텐데 아이들은 어떻게 부모의 품안에서 자신을 그렇게까지 놓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전폭적인 신뢰 만큼이나 의아한 것은 이 큰 믿음이 시나브로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믿음과 불신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영화 <분노>(이상일 감독)는 교외 주택가에서 벌어진 잔인한 살인사건에서 시작된다. 살인 현장에는 피로 쓰인 怒(분노)라는 글자가 남아있고, 경찰은 범인을 잡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지만 범인은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 이후 카메라는 각기 다른 지역에 사는 세 명의 의심스러운 인물을 쫓아간다. 도쿄의 나오토, 치바의 타시로, 오키나와의 신고. 경찰이 뿌린 수배사진은 이들이 조심스레 맺은 관계에 균열을 내고 사람들은 그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과연 누가 범인일까? <분노>는 스릴러물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정작 영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믿음’(과 그 짝인 ‘불신’)이라는 저 복잡한 행위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다.
 
우리는 보통 믿음과 불신을 단순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나는 너를 믿었는데, 그 믿음을 깬 것은 너’라는 식이다. 이 손쉬운 자기기만의 서사에서 믿음의 주체는 언제나 나이고, 불신의 책임은 항상 타자에게 있다. 그런데 믿음도 불신도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분노>의 인물 군상이 보여주는 것처럼 믿은 것이 나라면, 불신한 것도 나이다. 나오토나 타시로, 신고에게 다가간 것은 유마와 아이코, 이즈미(그리고 타츠야)였다. 그것이 사랑이건, 어떤 필요에 의한 것이건, 호기심이건 낯선 이방인(異邦人)에게 다가가 ‘믿음’이라는 이름의 관계를 개시(開始)한 것은 방인(邦人)들이었다.
 
그리고 이 믿음을 불신으로 바꾼 것 역시 방인들이다. 여기서 엽기적인 살인범의 수배 사진과 어딘지 닮아있는 세 사람의 얼굴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그러니까 불신의 근원은 살인범과 닮은 외모에 있지 않다. 진실은 나오토가 유마에게 보여주었던 진심이나, 타시로가 아이코의 과거를 알면서도 그녀를 사랑했던 것만큼 유마나 아이코의 믿음이 굳세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믿음은 사진 한 장에, 쑥덕이는 뒷담화들에 흔들릴 만한 것이었으며, 이는 이방인이라는 기표로 대표되는 타자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인 태도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믿음이 주는 안락함과 따스함 때문에 믿고 싶어서 믿고, 그 믿음이 버거워지는 순간 불신을 선택한다.



 
믿음의 연약함, 혹은 믿음의 자기기만과 관련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는 치바 사람들의 스토리였다. 가출해 몸을 파는 업소에 있었던 딸(아이코)을 찾아와 품는 아버지 요헤이는 대단한 아버지로 보인다. 요헤이는 아이코를 나무라거나 닦달하지 않고, 아이코가 타시로와 살고 싶다고 할 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아버지다. 그런데 막상 수배전단이 뿌려지고 타시로에게 살인범의 얼굴이 겹쳐지자 가장 먼저 무너지는 사람도 요헤이다. 얼핏 딸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요헤이의 내면에는 사실 살인범 만큼이나 무서운 편견과 불신이 숨어있다.
 
“아빠, 걱정해? 아이코라서?” “삼촌, 혹시 아이코가 행복해질 리 없다고 생각해요? 내 딸을 사랑해주는 놈은 제대로 일리 없다고 생각해요?” 극장에서 저 대사들을 들었을 때 나는 새삼 놀랐다. 아이코에게 씌워진 편견과 불신의 무게는 어쩌면 마을사람들보다 아버지 요헤이에게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좋지 않은 전력을 가진 내 딸을 어떤 제대로 된 사람이 사랑해줄까? 그럴 리 없으니 저 놈은 어딘가 문제가 있는 놈이다.’ 라는 생각이 요헤이 안에 있었고, 딸의 현재보다 과거에 묶인 아버지의 불신이 결국 아이코의 신고를 불러온다. 힘들어도 잘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언제나 아이코를 가장 믿지 못한 것은 요헤이였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믿음과 불신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분노>는 먹물처럼 스며든 작은 의심이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살인범이 아닌 두 명의 케이스는 불신이 부메랑이 되어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믿음과 불신에 대한 깊은 사유의 계기를 제공한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타시로를 찾아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코의 말간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을 때, 나는 움찔했고 비죽이며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화면 가득한 아이코의 얼굴이, 그녀의 눈이,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를 믿나요? 나 같은 사람도 보통 사람을 만나 행복할 수 있다고,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나요?’ 아이코의 눈과 얼굴 앞에서 나의 편견과 위선은 속절없이 까발려졌다. 가장 큰 불신은 요헤이가 아닌 내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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