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 삼능에서 부르던 노란 샤스 입은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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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 삼능에서 부르던 노란 샤스 입은 사나이
  • 양진채
  • 승인 2017.05.19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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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거기, 다다구미/ 이목연



우선 제목을 보자. 거기, 다다구미. ‘거기’와 ‘다다구미’.

‘거기’는 얼마만큼의 거리일까. 작가는 다다구미로 쑤욱 들어가려 하지 않는 듯 보인다. ‘거기’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다. 소설 속에 답이 있을 터이다.
 

소설은 홈스테이를 열고 있는 지숙과 미국에서 날아온 나이든 순자의 교차시점으로 이루어진다. 순자는 에스캄 근처 클럽에서 노래하던 가수였고, 삼능의 다다구미에서 살았지만 미세스 마틴이라는 이름으로 되돌아와 지숙의 집에 묵게 된다. 순자가 한국에 온 이유는 그때 자신이 살던 곳, 노래하던 클럽을 찾기 위해서다. 엄밀히 말하면 클럽에서 함께 기타를 치며 악단을 이끌었던 악단장이었던 그를 찾기 위해서다. 순자는 지숙의 도움으로 자신의 청춘이 묻어있는 곳을 찾게 되지만 결국 그는 만나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

 

일제는 이때 조선총독부는 국민총동원령을 공포하여 전국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근로보국대를 편성하여 부평에 무기를 제조하던 군수기지였던 조병창을 세우고 확장하는데 하청업자 다다구미[多田組]의 현장 사무소가 삼능에 있었다. 8·15광복을 전후하여 다다구미가 철수하게 되면서 빈터만 남아 있게 된다. 이후 조병창 기지에 미군 ‘에스캄’이 들어와 주둔하게 되자 사람들이 미군부대와 멀지 않으면서 빈터로 남아있던 다다구미 자리에 무허가 판잣집을 다닥다닥 짓고 살게 되었다. 이 동네를 다다구미가 있었던 곳이라 해서 다다구미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다다구미라고 불러야 그곳을 그나마 찾을 수 있다.


지금도 이 다다구미의 일부는 백운역 고가를 올라가다보면 볼 수 있는데 이상하게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고 희고 붉은 깃발을 내건 소위 무속인의 집들이 많아 괴이한 느낌을 준다.

 

“삼릉이라면, 이 동네에 무슨 유명한 능이 있었나보죠?”

갑자기 찾아온 침묵이 어색해서 내가 끼어들었다. 삼릉에 대한 유래를 한동구 씨가 풀어 놓았다. 일제 말 대륙진출을 꾀하던 일본이 우리나라에 히로나까라는 군수물자 공장을 세워 무기를 생산하다가 일본 패망 직전에 망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미쓰비시(三菱)중공업이 그 회사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 공장 주변에 노동자들을 위해 생긴 사택이 삼릉사택이었단다. 삼릉은 미쓰비시의 한자어였다.

 

삼능을 모르는 사람들은 다들 지숙처럼 능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곳을 다다구미라고 불렀어요. 미군부대 앞이었지요.”

그녀를 차에 태운 채 그 주소지를 찾아보려 애를 썼다. 하지만 부평 역 앞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곳에 대해 알지 못했다.

“미군부대는 저 아래로 내려가면 있어요. 그쪽을 신촌이라 부르는데…….”

인근 부동산에서 부평 토박이라는 사람을 만나서야 비로소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한동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예전의 부평이 아니지요. 전에는 부평 일대 60만평이 미군부대였어요. 어디를 찾는지 몰라도 60년 전에 살던 곳을 찾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지명은 생소했다.

“다다구미라면 일본 놈들이 물러가고 난 뒤에 생긴 판자촌인데. 저기 백운역까지 여기 산곡동 일대에 수백 채나 되었지요. 그땐 자고 나면 수십 채씩 들어섰으니까요. 거길 신촌이라 불렀는데…… ”

 

60만평의 미군부대가 있던 자리는 아파트와 백화점, 공원이 들어서 있다. 상전벽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녀가 순자가 아니라 미세스 마틴이 된 것처럼.

 

“나도 미군부대 식당에서 요리사를 했다우. 내 덕에 꽤 많은 사람들이 배를 채웠지. 엄청 빼돌렸어요. 너나 할 것 없이 굶주리던 시대였잖아요. 식당에서 남는 물건은 죄다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었지. 아주 못 먹을 건 따로 버리고 먹을 만한 걸 모았거든. 그날 쓰고 남은 건 새 깡통이고 뭐고 함께 넣었다니까. 초창기에는 감시가 그리 심하지가 않았어요. 나중에 너도나도 빼돌리다 못해 그걸로 본격적으로 장사를 해대니까 미군들의 감시가 심해졌지. 당시 미군부대로 들어가는 철로들이 이 바닥에 좍 늘어서 있었거든. 그 철로 위로 보급 열차들이 줄을 섰다니까.”

부대로 들어가는 기차에는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들러붙어 물품을 약탈했다고 했다. 심지어 기차에 실려 가던 짚차의 변속기까지 뜯어내 논바닥에 던질 정도로 한국인의 약탈이 심했지만 망을 보던 군인들은 기차를 앞으로 뺐다 뒤로 뺐다 하며 시간을 끌어주며 물건을 빼돌리는 걸 모른 척 해 줬단다.

 

소설 속에는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가난한 삶의 모습들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순자는 미군부대의 요리사였던 한동구를 통해 그 당시를 회상한다. 그러나 순자가 클럽에서 일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당시 악단장을 소개시켜주겠다는 한동구의 말에는 서둘러 자리를 뜬다.

 

“노오란 셔츠 입은 말 없는 그 사람이……”

앞좌석의 등받이를 잡고 몸을 앞으로 숙여 부르는 노래는 나도 귀에 익은 노래였다.

“내가 가기 전까지 무대에서 부르던 노래예요. 아직도 그 노래는 기억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주 좋아했어요.”

 

90이 넘은 순자를 다시 이곳으로 부른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래된 깍두기 노트에 적은 <인천 부평 신촌 네거리 애스캄 앞 화이트로즈 클럽> 주소 한 장을 들고 찾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때 사랑했으나 미워하고 질투했던 ‘그’를 다시 찾게 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70년의 세월에도 놓지 않는 그 무엇. 그것은 사랑일까.


나는 올해 초에 내 유년의 장소인 주안 신기촌에 가본 적이 있었다. 신기촌의 항운노조주택에 살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한 편 쓰고 나자 그곳에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다. 우리가족은 아버지의 오랜 실직으로 신기촌을 떠나왔고 더 작고 외진 변두리로 떠돌았다. 그리고 신기촌에 가보지 못했다.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삶이 그렇게 흘러갔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다. 그런데 소설을 쓰고 나자 거기가 궁금했다. 그래서 길을 더듬어 찾아갔다. 이 길이었지, 5번 버스 종점에서 내려 신기시장 길을 따라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꺾여 더 올라가던 곳. 우리집 바로 앞은 공동묘지가 있던 야산으로 향하던 길이었고, 그렇게 더듬으면서 갔다. 그리고 내가 살았다고 생각되던 근처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가끔 꿈속까지 찾아오던 그 집. 그 집이 남아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내가 살던 집 근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내 꿈에 가끔씩 나타나던 집과 비슷한 집을 발견했다. 저렇게 안방 창문과 거실 창문이 있었고, 현관문이 있었고, 마당이 있었고, 무엇보다 붉은 벽돌이 있었지. 그러다 대문 옆 기둥에 붙어 있던 번지수를 보고 놀라고 말았다. 내가 기억하는 그 번지수였다. 세상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거길 떠난 지 35년만이었다. 그런데 집이 일부 리모델링되었긴 해도 내가 살던 집 모양 그대로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그 집이 내 기억대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 집과의 추억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떠나고 한 번도 찾지 않았는데 너는 그대로 있었구나. 그 집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자 그 집은 세상에는 없는 소중한 가치가 되어 내게 다가왔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을지라도 나만의 집을 한 채 갖게 된 것이다. 그 집에 살고 있을 누군가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거기 있어주어 고맙다고. 오랫동안 보지도 못하고 잊고 살았는데 나를 위해 늘 기도해주고 있었던 누군가를 만난 기분이었다.


순자가 그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새삼 어떤 사랑이 아니라 먼 타국에서 다시 돌아와 찾고 싶었던 그 무엇은 기억을 받쳐줄 추억이 아니었을까. 그때의 삶이 괴롭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내나라 내 고향의 한 장소였고 삶이었던 곳을 찾고 싶은. 생의 마지막에 찬란했던 청춘이 있던 장소로 돌아가 보고 싶은.


그래서 순자는 다다구미 근처에서 내내 살았던 한동구의 말에 연신 박수를 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작 그때의 ‘그’와 연관이 있을 수 있는 누군가를 소개시켜준다고 할 때는 덜컥 겁이 나는 것이다. 추억이 현실 앞에 발가 벗져지고 나면 더 이상 추억이 아닐 수 있기에.


그래서 소설 속에서 악단장이었던 ‘그’의 이름은 끝내 드러나지 않는 것이고, 다다구미는 제목처럼 ‘거기’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부평구문화재단에서 만든 창작음악극 <당신의 아름다운 시절>이 호평을 받았었다. 1950, 60년대 부평의 에스캄부대를 배경으로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음악이라는 희망으로 치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음악극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부평의 에스캄 부대 주변 50여개 음악 클럽에서 많은 밴드와 가수들이 활동했고, 전국의 쟁쟁한 가수들이 부평으로 몰려들었다고 하니, 한국 대중음악 60년의 뿌리가 되었다고 보는 것도 일리 있었다.


음악극에서는 그 당시를 회상할 수 있는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물론 <노란 샤스의 사나이>도 있었다. 추억은 노란 ‘샤스’를 ‘셔츠’라고 부르지 않는 어떤 지점에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만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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