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피스의 '좋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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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피스의 '좋은 사람들'
  • 김연식
  • 승인 2017.05.22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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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여유와 재치, 대가(大家)의 비결


국제환경보호단체 그린피스의 에스페란자호 항해사 김연식씨와 함께 하는 <위대한 항해>는 지난해 3월부터 연재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환경감시 선박 에스페란자호에서 부딪치며 겪는 현장의 이야기를 한국인 최초의 그린피스 항해사의 눈으로 보여드립니다.



그린피스에서 일한 지 이태 째다. 이 단체에서 일하는 좋은 점을 꼽으라 하면 보람이나 값진 경험, 오지 탐사 등을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난다는 점을 내세운다.


좋은 사람에는 선한 사람, 똑똑한 사람, 솔직한 사람, 열정적인 사람, 따뜻한 사람, 경험 많은 사람 등 다양한 부류가 있다. 그 중에서도 나는 한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대가(大家)들에 대해 말하고 싶다. 보통 사람인 내가 평생 만나지 못할 한 분야의 대가들과 생활한다는 점이 좋다. 더 정확하게는 대가들의 민낯을 본다는 것이다. 그 민낯을 조금 설명해보자.


# 닉 코빙(Nick Cobbing)

지난해 북극에 갔을 때 만난 영국인 사진가.
전 세계 극지를 다니며 자연경관을 담아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BBC방송 등에 제공하는 베테랑.
타임(Time)지와 뉴스위크에서 올해의 사진가로 선정되는 등 유럽과 영미 지역에서 실력을 인정받음.

이렇게 설명하면 대단히 거창하고 진지할 것 같지만 그의 일상은 정반대다. 늘 뒤통수에 까치집을 달고 다니고, 텅 빈 눈으로 터벅터벅 걷는다. 그런 꼴로 종종 얼토당토한 말을 하니 사람들을 웃기기 일쑤다. 한번은 새벽에 혹등고래를 발견해서 그를 깨우러 갔는데, 어찌나 깊이 자는 건지 문을 발로 차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정신을 놓고 산다.
작가의 그런 면을 알고 나서 작품을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지구의 절경을 훌륭하게 담았다. “저 느림보 까치집이 이런 사진을 찍었단 말이야?”, “과연 대가는 품 안에 발톱을 숨기며 사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엔가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번쩍 날카롭게 사진기를 드는 작가를 보면서 “저 사람이 사진가이긴 하구나”싶었다. 작가의 외모나 행동거지는 작품과 상관관계가 없는 모양이다.

 독일 출신 사진가 율리 쿤즈(Uli Kun)가 귀마개를 엉뚱하게 쓰고 익살스런 춤을 추고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사진을 제공하는 독일 출신 사진가 율리 쿤즈(Uli Kun)가 귀마개를 엉뚱하게 쓰고 익살스런 춤을 추고 있다.>


# 후안(Juan)

국제 뉴스 통신사 로이터(Reuter)의 사진기자.
55세 배 나온 대머리 아저씨. 늘 다리를 쩍 벌리고 다님.
그러다 사람을 만나면 원숭이 흉내를 내며 끝내 웃기고야 맘.
웃길 때까지 바보짓을 하니 웃어 줘야 할 때가 많음.
자주 졸고, 더 자주 빈둥거림.
늘 장난감 같은 사진기를 목에 메고 다님. 사진기자들이 쓰는 커다란 사진기는 가져 온 건지, 잃어버린 건지, 원래 없는 건지 모르겠음.
그러고도 좋은 보도사진을 찍는 게 신기함.

대충 이렇다. 사진가 뿐 아니라 교수, 다이버, 비행기 조종사, 심지어 유명한 배우와 작곡가까지.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한 달이 넘게 환경감시선에서 같이 지내는데, 대다수가 근엄이나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유쾌하고 때로는 바보 같기까지 하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했고, ‘잘하는 사람이 오래 남는 게 아니라, 오래 남는 사람이 잘하는 것이다’라고도 했다. 가까이 여유롭고 재치 있는 대가들을 만나면서, 일에 악착같기 보다는 주변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즐기며 제 보폭으로 꾸준히 걷는 게 한 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뤄내는 비결이 아닌가 싶다.

여유와 재치를 배우는 게 여기서 일하는 가장 좋은 점이다.

(우유를 먹지만 키는 크지 않고, 재치를 배우지만 늘지는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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