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는 내 인생, 다른 건 상상도 못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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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는 내 인생, 다른 건 상상도 못했지
  • 강영희
  • 승인 2017.08.10 08: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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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통신 6] 미스박 의상실, 박태순님 이야기


올 봄부터 배다리 도로 뿐 아니라 송림동 재개발 등 여러 가지 문제로 동구가 들썩이며 마음을 많이 쓰고 계신 박태순(65)님. ‘배다리 도로를 막은 세 명의 여인’ 중 한 명이시다. ‘미스박 의상실’을 운영하다가 결혼하고 ‘박의상실’로 이름을 바꿔 올해로 40년, 그중 10년을 배다리도로 반대운동과 함께 해온 이야기를 들었다.


@배다리 텃밭 옆 개코막걸리, 지성문구사 옆, 셔터문에 그려진 바늘꽂이 그림이 있는 곳이 박의상실이다. 8월 중순부터 '손맛나는 교실-드륵드륵 재봉틀 바느질'수업이 진행될 예정이다.



개발? 발전? 그 이상의 소중한 것이 있어
 

"10년인데 여전히 제자리 같아. 그때 내가 암투병 중이었잖아. 그 와중에 그렇게 싸울 때 우리 아저씨가 나더러 미쳤다고 했었어.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내가 이렇게 계속 미싱을 돌리고 있을 줄 몰랐지. "하며 말씀을 이으셨다.

암투병 중 집 앞에 거대한 도로가 생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던 싸움이었는데 '환경'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셨다. 젊어서는 살기 바빠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생명권', '환경' 같은, 잘 느낄 수 없어 아주 작게 느껴지는 그것들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후 계속 환경에 대한 고민을 지속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신다. 또 하나는 마음을 의지했던 성당에서 무심히 들었던 공동체의 의미를 도로 싸움을 하며 느끼셨다고 한다.


‘행정이나 정치가 시민들이 사는 걸 돕는 게 아니라 망치는 것 같아!’ '개발을 하면 다 잘 살게 된다.'는 게 있었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닌데 이해할 수 없다며 답답함과 속상함을 표했다.


박태순님은 항상 경쾌한 말소리와 웃음 띤 얼굴이지만 한이 많으신지 눈물도 많으시다. 그렇게 여린 듯 하면서도 강단도 있으셔서 암투병과 긴 도로 싸움으로 단단해지셨겠지 짐작만 할 뿐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그 시절의 어른들처럼 어렵고 힘들었던 어린시절의 애환이 깃들어 있었다.

 


@2007년 도로반대 싸움 당시 암투병 중이었던 박태순님과 당시 함께 싸웠던 이웃 하유자님, 방옥자님이 인천지역 연대모임에 참여한 모습.



경제개발이 밀어내고, 밀린 서민들의 삶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는데 그 지역 개발이 있었는지 부모님이 집과 땅을 팔고 당신 3살 때 인천 중구의 사동으로 이사를 와서 신작로 길모퉁에서 구멍가게를 하며 꽤 넉넉하게 지내셨다고 한다. 헌데 여기에 큰 길을 내면서 보상을 해준다는 게 당시에는 허허벌판이었던 남구 학익동 일대였고, 연세가 많으셨던 아버님이 그곳에 살기는 어려워서 이사 간 곳이 지금은 길이 된 동구의 동산고 뒷편 송림 3·5동 쪽이었다고 한다.


헌 판잣집을 사서 고치고 이사 온 게 당신 10세 때라고 하신다. 헌데 이 집이 있던 땅이 인천시의 땅이어서 도로를 내며 다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인근 빈 터를 찾아 집을 옮겨 살았지만 이 과정에서 진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고 하셨다.


도시의 각종 개발과 맞물려 제대로 보상을 받지도 못하는데도 제대로 항의도 할 수 없는 시대였는데 어린 나이에 집을 허물라는 시공무원에게 항의하며 지붕위로 올라간 아버님도 별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4학년 이었던 박태순님은 “왜 나이든 아버님을 괴롭히고 우리집을 허물라 하냐!”며 큰 소리를 쳤었다고 하신다. 당신이 울보에 못 배운 컴플랙스가 있긴 하지만 할 말은 하고, 따질 것은 따지는 기질은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거 같다고 하신다.


결국 가세가 많이 기울어 중학교 진학 대신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 동일방직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156cm가 돼야 취업이 가능했는데 1cm가 모자라 들어갈 수 없었다는 말씀을 곁들이신다. 156cm 이상이 되어야 했던 기준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문득 궁금하다.





@길 하나를 두고 풍경이 이렇게 다르다. 녹지가 부족한 이 곳에 배다리 생태공원은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 '소방도로'라는 핑계 양쪽 주택가에 각각 7-10여미터의 길을 내면 덩그러니 가운데 30여미터 공간이 남게 된다면 그것을 녹지로 두지 않고 철도 건터편 길과 이어지도록 할 게 뻔하다. 그동안 너무 많이 속았고, 약속도 많이 어겨온 상황에서 '배다리구간 지하화'도 언제 없었던 말이 될 지 모른다. 주민들 속이는 게 일상화된 지자체와 관공서의 말을 더이상 믿을 수 없게 된 상황에 배다리 삼총사, 세 명의 여인이 다시 뭉쳤고, 더이상 필요하지도 않은 도로를 내지 않도록 하겠다는 결의를 했다.

 

송림동 뉴스테이 반대 운동도 같이 하게 된 사연


10년 전 암에 걸렸을 때 보험금이 나왔는데 본인은 죽을 것으로 생각하고 남편과 자녀들이 따듯한 집에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 딸 돈을 보태서 송림동에 집을 구입했다고 한다. 헌데 다행히도 건강해져서 일을 계속해서 딸 돈을 갚고 노후대책으로 생각하고 계셨다고 한다.


송림동 재개발은 송림동 뉴스테이로 바뀌었고, 너무 낮은 보상가로 분양을 받아도 큰 빚을 져야 살 수 있는 상황에 보상을 받고 나올까 분양을 받을까 고민하고 있던 중에 반대 집회가 시작되었고 배다리 싸움을 했던 사람으로 집회를 하면서도 마음에 갈등이 많았다고 하셨다.


어느 날 시청 앞 집회에 가는 길, 호호백발의 허리 굽은 어르신이 자신은 그 보상을 받고 어디 가서 살 수가 없다며 고이 접어둔 5만 원권을 꺼내 집회 경비로 내더란다. 그 모습을 보며 보상도 분양도 포기하고 재개발을 반대를 하기로 마음 먹으셨다고 한다.



@배다리 생태공원과 그 가운데 있는 정자는 주민들이 모이는 하나의 광장이 되었다. 회합의 장소이며, 식사나 차를 나누는 곳이기도 하고, 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배다리는 내 인생, 다른 건 상상도 못했지


“아이들이 다 이곳에서 나고 자랐어. 결혼할 생각도 없었는데 그래서 ‘미스박 의상실’도 냈던 거야. 혼자 먹고 살 작정을 했던거지. 아저씨가 나를 많이 위해주셔서 결혼도 하게 되고 ...”


동일방직 취직을 실패하고 서울 사촌 언니네 가서 일을 돕다가 엄마가 보고 싶어 다시 돌아온 인천. 결국 신포동 의상실에서 '시다' 일을 배우며 의상업계에 발을 들이시게 되셨다.


당시 송림동에서 신포동에 있는 직장(의상실)까지 걸어서 다녔는데 판잣집만 있던 송림동과 달리 창영동과 배다리는 헌책방 뿐 아니라 아이스케키 공장이며 양장점, 양화점, 양복점 등 상점이 많은 번화가였어. 상점이 많은 그 길을 오가며 자연스럽게 의상실을 내게 되면 여기(배다리)에 내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고도 하셨다.


기성복이 없던 시절 가난한 사람이고, 부자고 모두 옷을 해입던 시절이라 의상실이 꽤 잘 돼서 처음엔 ‘학생사’ 자리에 마련해 미스박 의상실을 열었고, 결혼하고 잘 나갈때는 일하는 사람 몇명을 두고 ‘명진스포츠’ 자리를 아벨서점과 반반으로 나눠서 썼다고 한다.


지금의 집은 길가의 판잣집과 안채인 한옥으로 되어 있었는데 90년대 후반에 경인전철 복복선 공사하면서 이 집 안채가 헐렸고,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항의를 해서 받은 보상으로 재건축을 해 다시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하신다.



@배다리도로 지하화가 결정되고 2014년 8월 30일 사무실로 쓰던 컨테이너를 치우라는 연락을 받고 아벨형님이라 불리는 곽현숙님과 함께 여름 새벽에 물건을 정리하고 컨테이너를 팔았다.













배다리 도로반대 운동?
환경, 공동체 이런 의미를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


시민들은 성숙해진 거 같은데 정치인들이나 행정은 옛날식이야. 옛날에는 국가가 하는 일에 반대한다는 건 상상도 못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국가도 서민들 힘들고 어렵게 만들어서 힘 있는 사람들 이익을 봐주는 거였고, 문제도 많고... ‘개발하면 이익’이라는 그런 생각 이제는 안해. 왜 그걸 모를까?


이 운동 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이라는 게 생긴 것 같아. 정부(국가)가 하는 일이 꼭 주민들을 위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 ‘내 삶의 주인은 나다!’ 하며 살아. 근대 개인은 힘이 없잖아. 성당 다니면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의미를 많이 깨달았고, 도로를 막고 마을을 지키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에 힘을 깨달았지.


아이들은 결혼하고, 나는 병이 낫고,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내가 다시 미싱을 돌리며 살아. 집안이 어려워져 진학을 못한 게 평생의 한이 있었는데 지난해에는 4월에 중학교 검정고시 합격하고, 기대도 안했는데 10월에 고등학교 검정고시도 합격했잖아. 가슴에 커다란 바위 하나를 내려놓은 것 같았어.

 





@사진_민운기. 송현터널을 개통하고 송림로와 연결하면 배다리 가운데 공원은 언제든 도로가 될 수 있다는 위협에 주민들이 다시 모이고, 현수막을 붙히고 있다.



어쩌다 보니 ‘배다리 도로반대 운동 10년의 이야기’는 당신 삶의 궤적을 따라 걷는 시간이 되었다. 옷 짓는 기술로 지금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시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고, 개발에 밀리고 밀려 어렵게 살아온 도시민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과정에서 시민으로서, 주인으로서 각성해가는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사람의 편리함을 위해 있는 차를 위해 도로와 주차장이 필요했고, 아파트가 필요했다. 언제까지 차와 집의 노예로 살아야 하는 걸까? 넘치는 차와 남아도는 집은 누구의 것일까? 요즘엔 사람을 위한다는 차와 도로, 주차장과 아파트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의 삶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진_청산별곡 "이렇게 옷 만드는 재주 하나로 강의도 다니고 수업도 하고 얼마나 좋아, 깨끗하고 평온한 여기 배다리에서 남은 생 건강히 살고 싶어. 도로는 이제 안내도 돼잖아! 얼마나 좋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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