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그래서 아름답고 멋진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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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그래서 아름답고 멋진 인생
  • 송수연
  • 승인 2017.10.12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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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연의 영화읽기] (9) <우리의 20세기> (마이크 밀스, 2016)


 ‘송수연의 영화 읽기’는 남구의 예술영화관 ‘영화공간주안’과 송수연 평론가의 협약하에 <인천in>에 개봉영화를 리뷰하는 기획입니다. 매월 ‘영화공간주안’이 상영하는 예술영화의 예술적 가치 및 의미를 되새기며, 특히 영화와 아동청소년 문학의 접점을 독자와 함께 읽고자 합니다.




10대 시절, 나는 내 미래가 궁금했다. 어떤 어른이 되어있을까? 누구를 만나 어떤 사랑을 할까? 나는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고, 일기장과 머릿속은 각종 청사진으로 가득했다. 20대의 나는 불안과 동거하며 전전긍긍했다. 10대에 꿈꾸고 상상했던 삶은 어디에도 없었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보이지 않는 미래에 짓눌린 채 항상 무언가에 쫓겨 다녔다. 그때 나를 쫓은 것들(정확히 말하면 내 스스로 쫓긴 것이지만) 중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불확실함이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그 무엇도 되지 못한 나를 견디기 힘들었다. 확실한 무언가를 붙잡고 싶었고, 명확한 어떤 것이 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도 나는 그것들에 가 닿을 수 없었다. ‘멋진 어른’이 된다는 것은 보송보송한 상상과는 다른 일이었다.

 

<우리의 20세기> (마이크 밀스, 2016)는 아들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엄마의 고민에서 시작된다. 쉐어하우스를 운영하면서 열다섯이 된 아들을 키우는 싱글맘 도로시아는 점점 달라지는 아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55세와 15세. 모자(母子)의 나이 차 만큼이나 두 사람은 매사 서로의 다름을 확인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영화는 대형 슈퍼마켓 주차장에서 불이 난 자신들의 차를 지켜보는 모자의 대화로 시작된다. 불타는 차를 보면서 도로시아는 애잔한 목소리로 ‘아름다운 차였는데’라고 말하지만 제이미는 ‘과열되고 기름 냄새 나는 고물차였다’라고 되받는다.





영화 초반에 보인 모자 사이의 어긋남은 영화 내내 반복된다. 아들이 자신과 같이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될까봐 두려운 도로시아는 아들을 돕고 싶어 한다. 그녀는 아들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라 생각해 두 명의 여성에게 도움을 청한다. 같은 집에 사는 페미니스트 사진작가 애비와 아들의 친구 줄리. 그러나 서로를 사랑하는 모자의 걸음이 계속 어긋나는 것처럼 이 두 사람의 도움도 도로시아가 원하는 것과는 점점 다른 방향으로 간다. 애비를 통해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은 제이미는 오르가즘과 클리토리스 문제로 동급생과 주먹다짐을 벌이는가 하면, 줄리를 향한 제이미의 마음은 끝내 제이미가 원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백인백색(百人百色)이라 했던가. 1979년 산타바바라의 쉐어하우스를 공유하고 있는 다섯 사람은 서로에게 모두 호의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호의와 바람은 상대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는 흔한 갈등이나 폭력 대신 다름과 차이들을 섬세하게 보여주고, 계속 미끄러지더라도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대사회를 구경하고 싶으니 오늘 밤 놀러가자.’는 도로시아의 나이트 나들이는 왜 듣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펑크음악을 들어보려 하는 그녀의 시도와 같은 선상에 있다. 도로시아는 제이미가 사는 세계(그녀는 아들이 사는 현실을 ‘무의미한 전쟁과 컴퓨터, 마약, 따분함으로 가득한 시대’로 파악한다)를 자신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더라도 그녀는 아들을, 아들이 속한 세상을 자기 식으로 바꾸는 대신 아들의 세계에 동참해보는 쪽을 선택한다.

 

이와 관련해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장면은 ‘생리’와 ‘댄스’ 시퀀스였다. 쉐어하우스에서 작은 파티가 벌어졌을 때 애비가 당시만 해도 지극히 사적인(사실 여성의 성이나 생식기와 관련한 단어들은 지금도 여전히 사적인 영역에서만 이야기된다) 생리를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하자 도로시아가 이를 제지하고, 그에 반발해 애비가 모든 사람들에게 ‘생리’라는 단어를 말해보라고 시키는 장면은 가출한 아이들을 찾아 나선 어른들이 아이들을 나무라는 대신 모두 함께 모텔 방에서 신나는 댄스파티를 벌이는 장면이 주는 감흥과 유사하다. 둘 모두 고정되고 확정된 것들에 의문을 던지는 장면이며, 확실한 것들이 뒤틀릴 때 새롭게 열리는 가능성과 소통의 찰나를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이 보여주는 것처럼 불현듯 찾아오는 우리 인생의 빛나는 순간들은 찰나에 불과하다. 그것은 고정되거나 확정적이지 않으며 당연히 영원하지 않다. 그러니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영원히 타인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일 수 있다. 어쩌면 평범한 이 진실을 <우리의 20세기>는 아름답고 우아하게 보여준다. 나직한 목소리로 1979년 이후 각자의 삶을 말해주는 엔딩 시퀀스의 목소리는 그녀들이 모두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으며,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으로 살았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녀들 중에서 우리의 도로시아, 아들 제이미가 말하는 그녀의 마지막은 뭉클하고 작지만 따스한 위로로 남는다. 도로시아가 죽고 나서 제이미는 아들을 낳는다. 그는 아들에게 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 주려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도로시아가 아들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음에도 그것이 제이미에게 최선이 아니었듯, 어머니가 떠난 후 아들은 그 어떤 말로도 어머니의 인생을 설명할 수가 없다. 설명할 수 없음,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순간순간 사랑했고 서로를 이해했다. 도로시아의 말처럼 “인생이란 거대하고…알 수 없는 것”이다. 확실한 단 하나의 정답이 없기 때문에, 수많은 예외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생은 아름답고 멋진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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