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깊었던 원통함을 푸는 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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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깊었던 원통함을 푸는 의례
  • 심형진
  • 승인 2018.01.06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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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 심형진 인천햇빛발전협동조합 이사장





"지옥이 무엇인지 아나.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죽고 형이 죽고 누이가 죽어가는 데도 아무 소리 못하고 있는 게 그게 지옥이야."

극중 남영동 대공분실을 책임진 대공수사처장의 발언이다. 자신이 해방공간의 북한에서 지주의 자식으로서 겪은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한 말이다. 이 사람은 엄청난 트라우마를 겪은 환자다. 한마디로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정신병자가 치료를 받지 않고 권력을 갖게 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를 이 사람이 보여준다.

이 영화의 주인공 한 명을 뽑으라면 단연 이 사람이다.
정신병적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이데올로기라는 환상 속에 외부의 적을 설정한 사람이다. 따라서 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끊임없이 적을 생산하고 생산한 적을 때려잡는 일뿐이다. 따라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것이 불법이건 탈법이건 상관없이 돌진해야만 한다. 목적을 이루는 데는 당연히 희생이 따른다는 논리로. 그러나 그 희생이라는 것이 인간이 지녀야 할 존엄한 가치를 짓밟고 무시하고 까뭉갠다는 점에서 그는 악의 화신이며, 당시 지배 권력이 갖고 있는 맨얼굴을 날것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악의 현신에는 저항과 반항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일, 사람들은 "그날이 오긴 올까"라는 의문을 가슴에 품고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조건반사적 반응에 몸을 맡겨 이 악의 체계를 극복하는 민주화운동에 알게 모르게 투신한다.

따라서 영화 1987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지옥도를 연출하려는 독재정권에 맞서 인간의 얼굴, 인간의 목소리를 되찾고자 애쓴 모든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이다. 

그래서 그들이 <그날이 오면> 꿈꿨던 세상은 바로 인간의 목소리가 온 세상에 퍼지는 사회였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단순한 구호 "호헌철폐! 독재타도!"로 가득찬 광장은 그래서 지옥도에서 해방된 인간의 사회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또 한 명 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사람은 교도계장이다.
"나는 가두고 지키는 일만 합니다."

교도소 근무자의 일을 한 마디로 딱 잘라 정리한 그는 앉은 자리에 풀 하나 안 날 만큼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다. 송곳하나 안 들어 갈 이 사람은 민주 사회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일 수 있다. 자기 직분에 충실한 사람이 자기 직분에 열과 성을 다해 전력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민주사회 아닌가? 이런 점에서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직분에 충실하지 않다. 교도관은 '가두고 지키는'일에서 벗어나 다른 일을 하고, 학생은 배우고 익히는 일에서 벗어나 화염병을 던진다. 신부는 절에 수배자를 만나러 다니고, 범죄자를 잡아야 할 형사는 무결한 사람을 고문하여 범죄자로 만든다. 자기 권한과 권위를 무시당한 검사는 이를 항의하다 자리에서 쫓겨나고, 생업에 종사하는 서민들은 형제자매를, 자식을 찾으러 거리를 헤맨다. 어느 누구 하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 못하는 사회, 제자리를 지킬 수 없게 만드는 사회가 바로 독재사회다. 따라서 교도계장의 역할은 짧지만 굵게 독재사회에서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가를 웅변한다.

논어에서 제자가 공자에게 정치를 맡게 된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시겠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그 때 공자는 말한다. 이름을 바로 세우겠다고. “임금을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하는 정명을 하겠다.”는 말로 자기 직분에 충실한 사회가 정치가 바로 서는 사회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영화 <1987-그날이 오면>은 모두가 자기 직분에서 벗어난 사회를 모두가 자기 직분에 충실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인간들의 노력을 보여주는 영화이며, 이런 맥락에서 교도계장의 역할과 말은 울림이 크다. 

1987년에 일어난 일을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전개하는 영화는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어 보일 만큼 시나리오나 편집이 훌륭하다. 또한 그 이야기를 끌어가는 배우들의 연기가 매우 사실적이고 훌륭하여 사람을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대단하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과 연계되어 있던 분이 많은 사람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영화라며 입장권을 사주어 함께 보았다. 본인은 시사회부터 나와 함께 본 영화까지 세 번을 보았다고 한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자신이 구원받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두 번째는 가족과 함께 보았는데 처음 보았을 때와 달리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다고 한다. 비로소 마음 속 응어리가 풀어진 것은 아닐까? 세 번째로 영화를 보고 뒤풀이를 갔는데 오히려 담담하게 영화의 뒷이야기나 당시 상황들에 대해 설명하는데, 아마도 잘 만든 영화가 인간을 어떻게 정화시키는가를 보여주는 예 같다.

역사의 아픔과 시련 그리고 그 속에서 겪은 트라우마가 존재하는 사회일수록 그를 해원하는 행사나 의례가 꼭 있어야 한다. 근현대사에서 엄청난 격변을 겪은 우리 사회가 어찌 트라우마가 없을 수 있겠는가? 어느 다른 나라의 백성들보다도 더 많으면 많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영화가 시작이 되어 하나씩 묵은 원통함을 풀어나가면 좋겠다. 미래가 그냥 오지 않는다. 과거를 잘 정리하고 치유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많을 때, 극중 김윤석이 연기한 대공수사처장과 같은 인물은 등장하지 않을 것이며, 비로소 미래의 문은 열릴 것이다.

영화를 만든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 목소리로만 출연하여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친 문소리씨에게도 감사하다. 영화를 제작한 감독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는데, 얼굴 없는 민초들의 목소리와 외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관계자의 이름 자막을 보면서, 도대체 문소리는 언제 나온 거야라고 질문을 하는 동행처럼 우리는 이름을 가진 모든 인간들이 도대체 이 사회에서 어디에 있는 거야 찾아보고 둘러볼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상품화 하고 사유화 하여 시민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사회에서 지옥도가 연출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1월 2일, 
<1987-그날이 오면>을 보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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