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쌀 씻어놨다. 저녁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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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쌀 씻어놨다. 저녁쌀."
  • 김인자
  • 승인 2018.04.10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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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쌀씻기 대장 울엄니

비가 온다.
비가 오면 난 마음이 뒤숭숭해지는데 울 심계옥엄니 맘도 그러신가보다.
해가 쨍쨍하게 맑은 날 보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울 심계옥엄니는 더 애기가 되신다.
비오는 일요일.
나는 평일보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더 바쁘다. 토요일과 일요일엔 심계옥엄니가 치매센터인 사랑터에 가시지 않는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난 심계옥엄니의 기상시간인 4시30분부터 주무시는 밤 9시까지 심계옥엄니 껌딱지가 되어야한다.

울 심계옥엄니는 쌀씻기 대장이다. 냉장고에 씻어 놓은 쌀이 그릇마다 그득한데도 울 심계옥엄니는 쌀 씻어놓은 걸 싹 까묵고 씻고 또 씻고 하신다. 쌀 씻은거 많다고, 그만 씻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려도 "알았다, 안 씻는다." 대답만 하시고 자꾸자꾸 씻으신다. 사랑터 가서 놀다 오시는 평일엔 서너 바가지를 씻으시고 집에 왠종일 계시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일곱 여덟 바가지를 씻으신다. 그래서 난 주말이 되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쌀을 자꾸만 씻는 엄니도 말려야하고 건조대에 금방 널어놓은 마르지 않은 빨래를 걷어 개키시는 것도 말려야하고 수시로 배고프다시니 식사도 자주 챙겨드려야하고 수시로 간식도 해드려야해서 잠시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어젯밤도 홀랑 샌 탓에 머리가 무겁고 설사까지 심해서 화장실에 들락거리는데 고새를 못참고 울 심계옥엄니가 또 일을 벌리셨다.
이일 저일 하면서 바쁘게 건조대에 널어 놓은 빨래를 심계옥엄니가 그대로 걷어 차곡차곡 개고 계셨다.
"엄니, 모햐?"
"빨래 개는데?"
"금방 널어놓은건데?"
"다 말랐어. 만져봐."
젖은 빨래를 다 말랐다고 개고 계시는 심계옥 엄니를 보는 순간 머리가 하애진다. 다른 날은 "아 울 엄니 왜 그랴~"하며 웃으며 넘어갔는데 비가 와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감정 봇물이 툭하고 터져버렸다.
"아 진짜 엄마 왜 그래에~ 내가 금방 세탁기에서 꺼내서 너는 거 봤으면서!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자꾸만 일을 벌리시면 어떻해 엄마!!" 이렇게 큰소리로 꽥 꽥 꽥 오리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내가 자랄때 엄마 힘들게 했어? 한 번이라도 엄마 속 썪인 적 있어?"
"아니, 너는 한 번도 내 속 안 썪였어. 동네 사람들이 인자엄마는 인자 거저 키운다고 그랬어." "그랬담서. 그런데 엄마는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해."
이렇게 막 원망을 했다. 물론 속으로. 겉으로 말 못하는 입 대신 큰 눈이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굵은 눈물을 뚝뚝뚝 흘리면서.


"이리 나와. 집에서 속상해하지말고. 나와서 기분풀고 들어가."
창밖에서 비가 어서 나오라고,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 못 나가. 내가 밖에 나가면 울 엄니가 또 뭘 하실지 몰라."
"그래도 나와. 안그러면 너 쌓인 그 스트레스를 어쩔건데."

다용도실에서 검은콩과 흰콩, 율무와 보리를 꺼내 바가지에 조금씩 넣어 한꺼번에 섞었다.
"엄니, 이거 봐봐."
"그게 몬데?"
"콩인데 이 흰콩은 흰콩대로 골라놓고 요 검은콩은 또 검은콩 대로 골라놔여. 그리고 또 이 율무는 율무 대로 따로 골라놓고 요 보리는 또 보리대로 따로 따로 골라 놔줘."
"흰콩은 흰콩 대로?"
"응, 색깔 같은거 끼리 따로 따로 골라서 이 병에 각각 담아. 엄니가 요것들 골라 놓는 동안 나 마트에 가서 밀가루만 금방 사가지고 오께."

그렇게 심계옥엄니에게 혼합 곡물을 제각기 따로 따로 병에 담아 달라 부탁을 해놓고 나는 우산을 받쳐들고 무작정 집밖으로 나왔다.
막상 밖으로 나오니 딱히 갈 곳도 없었다. 그냥 인도따라 걷다보니 눈앞에 벚꽃이 하얗게 피어 있었다.
어제 그제 그렇 게 바람이 불었는데도 벚꽃은 별로 떨어지지 않았다. 바람이 제법 심술궂게 흔들어 댔는데도 벚꽃은 의연하게 나무에 그대로 매달려있었다. 하얗게 웃고 있는 벚꽃을 보니 심계옥엄니에게 화를 냈던 못난 마음이 부끄러웠다.
"벚꽃아,네가 나보다 낫다야."
이쁜 벚꽃을 쳐다보며 걸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걷다보니 어느새 약국 앞이다. 심계옥엄니 사랑터 친구셨던 박담이 할머니 따님이 하는 약국. 그러고 보니 박담이 할머니를 뵌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연세가 많으신 박담이 할머니는 사랑터에 가시면 금새 집에 가고 싶어하셨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빨리 집에 가시겠다고 떼를 쓰셔서 요양사선생님들이 담이 할머니에게 흰콩과 검정콩 그리고 쌀을 섞은 곡물을 담아 할머니 앞에 놓고 제각각 고르라고 드렸단다. 그러면 담이할머니는 바닥에 지팡이를 두들기며 "이년들이 곡식을 죄다 섞어놓고 나보고 고르라냐? 날 골탕 먹이려고 아주 작당들을 했구나." 하시며 머라머라 하시지만 이내 곧 고개를 수구리시고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열심히 콩을 고르셨단다.
약국 앞에 서 있자니 담이할머니가 그립다. 담이 할머니는 지금은 사랑터에 나오지 않으신다.

오랜만에 담이 할머니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심계옥엄니다.

"어디냐?나 콩 다 골랐다."
"벌써 다 골랐어?"
"그래, 다 골랐다. 근데 약국 머냐? 오다가 파스 하나 사와라."
"파스? 왜 엄니?"
"쪼그리고 앉아 콩을 골래서 그릉가? 다리가 안펴진다야."
이런, 내가 무슨 짓을 한거냐? 순간 머리가 하애졌다. 안 일어나진다고 애쓰시다가 옆으로 넘어지기라도 하시면~
집까지 어떻게 뛰어왔는지 모르겠다.

"비오냐? 우산 안 갖고 갔어?"
"갖고 갔는데."
"근데 옷이 왜 다 젖었냐?"
다리가 안펴진다던 우리 심계옥엄니는 싱크대에 서서 쌀을 씻고 계셨다.
"엄니, 다리 펴져?"
"어, 조금씩 주물름서 일어났드니 펴지던데.
내가 쌀 씻어놨다. 저녁쌀."
"어?어?"
냉장고에 심계옥엄니가 씻어논 쌀이 네 바가지다. 그러나 그깟 쌀이 대수더냐?심계옥엄니가 안 넘어지시고 잘 일어나셨는데.
"잘했쓰요, 엄니."
"잘했지? 쌀 안 씻어놨으믄 어쩔뻔 했냐? 저녁도 못해먹을 뻔 했다."
심계옥엄니가 애기처럼 웃으신다.
"엄니, 시장하시지요?내 얼릉 엄니가 씻어논 쌀로다 저녁해드리께."
그러자 쌀바가지를 내밀며 심계옥엄니가 이러신다.
"근데 마리다. 비가와서 그릉가 나 밥 말구 수제비가 먹구 싶다. 김치 많이 넣고 감자도 많이 넣은 칼칼한 수제비가 먹구싶다."
"아 ...수제비? 그르지머. 내 얼릉 밀가루 반죽해서 뜨끈 뜨끈한 수제비 해드리께 엄니."
"그래. 얼릉해서 묵자."
심계옥엄니가 또 애기처럼 웃으신다.
그 모습을 보니까 눈물이 났다.
"엄니, 뭐든 잡숫고 싶은게 있음 말씀만 혀셔요. 내가 싹 다 해드릴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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