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는 촛불혁명에 이은 대한민국의 두 번째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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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는 촛불혁명에 이은 대한민국의 두 번째 혁명이다.
  • 김성미경
  • 승인 2018.04.17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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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칼럼] 김성미경 / 인천여성의전화 대표


 
요즈음 핫한 화두는 단연코 성폭력 피해경험자들의 말하기인 “#미투”를 통해 우리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여성들이 경험한 성폭력 범죄를 드러내는 활동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이미 페이스북 등 온라인 활동을 통해 빠른 시간 안에 전파된 해시테그 운동의 영향이기도 하다. #문단_내_성폭력을 필두로 #00_내_성폭력에 대한 고백으로 이어져 필자가 있었던 모 대학에서는 16년과 17년 대학 내 성폭력에 대한 대자보 고발이 연달아 터지기도 했다. 그 와중에 촛불항쟁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한국에서는 서검사의 검찰_내_성폭력피해 고백이 #미투의 봇물을 텄다. 이로 인해 남성들 사이에 “나 지금 떨고 있냐”라는 말이 농담으로 오고가기도 했다.
 
그런데 일각에서 진짜 농담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게 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지난 4월 5일 인천여성가족재단에서 “인천#MeToo with 仁”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행사였다. 여성가족재단의 주관으로 유정복 시장에게 파란색 카페트를 깔아 영접하며 시장의 정책홍보의 장으로 전락시켜 버린 이 행사에 대해 인천여성연대에서는 ‘미투의 본질을 왜곡하는 행사’라고 지적했다(4월 4일자 “인천시 미투 선포식, 팝페라 공연, 시장인사이벤트로 전락해”여성신문 기사참조). 문제는 인천시는 지역성평등 지수에서 17개 광역시 중 12위로 3년 내내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고 서울시와 경기도에 비해 인천지역의 변수들이 반영된 성평등 정책에 변화가 없다는 문제 지적(4월 19일 인천시성평등정책 평가와 제언 토론회)에도 불구하고 성찰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시장이 진짜 미투에 동참하려면 인천시청내 성폭력 실태 전수조사를 통해 조직내 강간문화를 없애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하는 것이다.
 
혹자는 “#미투”가 미국에서 건너온 것을 무비판적으로 따라하기라며 여성운동의 사대주의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다. 혹자는 정치적 악의를 가지고 남성들을 공격하며 정적을 제거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비난한다. 한편으로는 ‘권력형 성폭력’이라는 명명으로 사회적, 조직적 위계관계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으로 선을 그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여성젠더에 대한 폭력의 문제를 지워버리고 있다. 그러나 미투의 자기고백을 통해 여성들은 살아오면서 경험한 ‘남성’들에 의한 폭력임을 고발하고 있다. 여성운동이 제도화 되면서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라는 구별이 이루어졌을 뿐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모든 억압은 폭력이며 그것은 포괄적 의미로 ‘가부장적 체제’라는 권력에 의한 성폭력이다.

 


<사진 = 강영희 작가 제공>


미투 운동이 일어나면서 페이스 북에서는 자신의 아버지에 의한 학대에 대해 고백하고, 남편에 의한 폭력과 강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데이트 폭력, 스토킹, 미성년자 성매수 문제를 이야기 한다. 온라인 안에서의 피해 경험에 대한 고백들은 처절함 그 자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일상에게 경험했던 성폭력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허벅지로 다리로 등으로 오르내리던 담임 선생님의 손길을 피해 지낼 궁리를 해야 했고 막다른 곳에서 홀로 선생님과 마주치게 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다. 이후 아주 잠깐이었지만 회사를 다니게 되었고 조직의 단합을 위한 회식자리에 가면 늦게 가나 일찍 가나 부장님의 옆자리는 비워져 있었다. 술은 여자가 따라야 맛이라며 술 따르기 시중을 강요받았다. 이십대 어린 여직원은 아저씨들의 단합을 위해서 꽃이 되어야 했다. 그런 자리에서 시중에 대한 거부는 사회생활 부적응자라는 평가로 이어졌다. 그 뿐이랴, 등굣길, 출근길 할 것 없이 대중교통 안에서 비비적거리는 남성들의 신체접촉은 늘 신경을 곤두세우게 했다. 몸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사랑한다며 쫓아다니던 남성에게 자신의 구애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머리채를 잡히기도 했다. 어디에서든 남성들이 모여 있는 곳을 머물거나 지나치기 두려웠다. 그들이 내 몸을 훑는 시선을 견뎌낼 힘이 없었다. 여성으로서 살아야 하는 생이 좌절이고 두려움이었다. 그 모든 것이 내 탓인 것 같았다. 주변의 지인들은 ‘여자인 네가 조심했어야지, 남자들의 욕망을 자극하지 말았어야지’라고 충고했다. 그렇게 여성주의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존재 자체가 문제였다.
 
이러한 서사는 필자에게만 있었던 특수한 경험이 아니다. 필자가 여성운동을 하게 되면서 만났던 많은 여성들은 같은 경험으로 하나가 되었다.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일상의 성폭력들에 대한 경험의 공유뿐만 아니라 그 폭력이 대를 이어 우리 아이들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그것은 필자를 여성운동에서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사실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에 대한 폭로는 “#미투”가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이루어져 왔다. 이제와서 왜 그러냐는 질문은 무색하다. 가부장 체제의 중심은 남성들의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여성들의 경험은 종종 아주 특수하거나 사소하거나 꽃뱀으로만 해석될 뿐이다. 여성들의 폭력에 대한 경험은 기본적으로 권력의 불평등에서 발생한다. 성폭력이든 아내 구타이든 직접적인 폭력의 문제 뿐 아니라 임금차별, 독박육아, 유리천장, 저임금노동, 감정노동, 장애여성의 출산권, 낙태의 범죄화, 정치적 의사결정구조에서의 배제 등 여성들에게 강요해 온 성차별적 제도 및 문화가 모두 권력의 비대칭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인 것이다.
 
일각에서 이야기 하는 미투의 ‘권력형 성폭력’이라는 명명은 그래서 가정 내 아버지, 남편 등에 의한 가혹한 폭력을 분리하고 조직이나 위계에 속하지 않은 개인 남성에 의한 성폭력을 개인의 문제로 치환시킨다. 그리고 사회구조적으로 만연한 성차별의 문제와도 분리시킨다. 그래야 가부장적 권력구조에 복무하는 개인 남성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남성중심의 권력사회는 같은 상황에서 누구에는 되고 누구에게는 되지 않는 이중 잣대로 여성을 억압해 왔고 그 억압을 통해 일종의 기득권을 누려왔다. 그래서 남성 개인들도 #미투에 #위드 유를 선언하고 성불평등과 성폭력을 혁파하는데 동참해야 할 일이지 ‘나는 권력자가 아니기에 미투 대상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비겁하게 숨을 일은 아니다.
 
#미투는 국가와 개인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만 피상적으로 다루어 왔던 민주주의에 대해서 개인과 개인 간의 미시적 관계에서의 성찰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절규이다. 지난 2016년 정권을 바꾸어 냈던 촛불광장의 경험은 기존의 가부장적 권력구조에 도전하고 그것의 폐해를 드러내는 역동으로 이어졌다. 이로서 성 불평등을 해소하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향해 첫발을 내 딛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투는 촛불혁명에 이은 대한민국의 두 번째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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