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올챙이’를 메달리스트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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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올챙이’를 메달리스트로 만들었다
  • 유동현
  • 승인 2018.08.20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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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학교와 스포츠 - 유동현 /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


낡은 고교 앨범은 추억 저장소이다.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그대가 있고 분식집 문턱을 함께 넘나들던 그리운 친구들도 있다. 3년간 발자욱을 남긴 모교의 운동장과 교실의 모습도 아련하다. 빛바랜 사진첩에는 ‘인천’도 있다. 교정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히 교문을 나서서 사진사 앞에서 졸업앨범 포즈를 취했던 그대들 덕분에 그때의 인천을 ‘추억’할 수 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이 지난 토요일 개막해 16일간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총 39개 종목에 선수 807명이 참가한다. 그중 인천 연고 선수는 71명이다. 인천은 전통적으로 스포츠에 강한 도시이다. 그동안 여러 종목에서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의 국가 대표를 많이 배출했다.
 


1964년도 대건고 앨범. 레슬링부원들이 ‘오묘한’ 포즈를 취했다.

1958년 무선고(현 재능고) 앨범. 교모 쓴 공수도 부원들.
 
 
학교는 ‘인큐베이터’다. 키가 크거나 덩치가 좋아서 우연히 코치의 눈에 띄어 유니폼을 입었다. 운동부에 들어가면 간식을 먹을 수 있어 친구 쫓아서 운동장으로 나간 경우도 있다.
이렇듯 학교는 평범한 일반 학생을 유망 선수로 선발해서 훈련시키고 국가 대표로 성장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낡은 앨범에는 그들이 거친 숨소리와 굵은 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들의 ‘올챙이’ 시절을 엿볼 수 있다.

 

 1968년도 박문여고 앨범. 고2 때의 백옥자 모습.

1975년도 박문여고 앨범.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후 모교 방문.

 
박문여고는 ‘아시아의 마녀’를 키워냈다. 69년도에 졸업한 투포환 선수 백옥자는 10여 년 동안 아시아에는 적수가 없었다. 박문여고 시절인 1968년부터 정식으로 포환을 던지기 시작해 그해 열린 경기도체육대회에 나가 14m02로 한국 신기록을 수립했다. 내친김에 같은 해 열린 전국체전에서 14m75으로 아시아 최고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는 1970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건국 이후 국제대회에서 우리나라 여자 선수가 딴 최초의 금메달이었다. 4년 후 74년 테헤란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16m28,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면서 우승했다. 그때부터 ‘아시아의 마녀’라는 별명이 붙었다.

 

1969년도 동인천고 앨범. 당시에는 보기 드문 사이클 복장이다

 
신문물 유입의 창구였던 인천은 자전거의 출현도 타도시보다 빨랐다. 빠르게 자전거가 보급되었던 인천에서는 자연스럽게 자전거 경주대회도 빈번하게 열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우편배달부와 양조장 혹은 냉면집 배달원들은 '인천자전거점원구락부'라는 일종의 동호회를 조직하고 ‘전(全)조선남녀자전거경주대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인천의 각 학교에서는 걸출한 자전거경주 선수들이 배출되었다.

 
 1967년도 송도고 앨범. 작은 운동장 ‘덕분’에 농구 최강고가 되었다.

1975년도 송도고 앨범.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뽑힌 후 모교를 방문한 김동광, 유희영 선수.

 
‘농구’ 하면 송도고, ‘송도고’ 하면 농구다. 유희형, 김동광, 이충희, 강동희, 정덕화, 김승현… 한 시대를 풍미한 송도고 출신의 농구계 ‘지존’들이다. 신흥동 시절 송도고의 좁은 운동장 때문에 농구는 교기로 적극 육성되었다. 체육관이 없던 초기에는 야외코트에서 운동을 했다.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농구대 백보드에 전등을 매달아 놓고 훈련을 했다. 그 결과 송도 농구부는 전국 최강으로 우뚝 섰다.
 
 

1973년도 인성여고 앨범. 경기도(인천 포함) 대표로 출전한 제 7회 쌍용기 대회.

 
여고부 농구도 남자부 못지않게 인천이 강팀이었다. 인성여고는 1964년 농구부를 창단했다. 1년 뒤부터 5년간 계속해서 경기도 대표로 전국체전에 참가할 정도로 강팀이 되었다. 인성여고의 최고 전성기는 80년대 후반이었다. 정은순(국가대표, 올림픽 2회 출전), 유영주(국가대표, 올림픽 2회 출전) 등 걸출한 스타가 등장하며 전국대회를 모조리 휩쓸었다.
 
 

1964년도 무선고(현 재능고) 앨범. 골인 지점 인천공설운동장으로 들어오는 마라톤 선수

 
인천은 일제강점기부터 마라톤의 도시였다. 광복 후에도 그 열기는 이어졌다. 그 덕분에 전국 고교 마라톤에서도 강자 축에 속했다. 그 중심에 ‘무선고(현 재능고)’가 있었다. 특히 인천~서울 구간을 나눠 달리는 역전마라톤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인천 출발지는 중구 해안동로터리나 동인천역전이었다.
 


1968년도 인천(기계)공고 앨범. 럭비 선수들.

1962년도 제물포고 앨범. 역도 선수들.
 
     유동현 /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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