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베테란급’ 가수 총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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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베테란급’ 가수 총출동
  • 유동현
  • 승인 2018.10.15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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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시민의 날




낡은 고교 앨범은 추억 저장소이다.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그대가 있고 분식집 문턱을 함께 넘나들던 그리운 친구들도 있다. 3년간의 발자국을 남긴 모교 운동장과 교실의 모습도 아련하다. 빛바랜 사진첩에는 ‘인천’도 있다. 교정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히 교문을 나서 사진사 앞에서 포즈를 취했던 그대들 덕분에 그때의 인천을 ‘추억’할 수 있다.    

 

낡은 고교 앨범은 추억 저장소이다.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그대가 있고 분식집 문턱을 함께 넘나들던 그리운 친구들도 있다. 3년간의 발자국을 남긴 모교 운동장과 교실의 모습도 아련하다. 빛바랜 사진첩에는 ‘인천’도 있다. 교정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히 교문을 나서 사진사 앞에서 포즈를 취했던 그대들 덕분에 그때의 인천을 ‘추억’할 수 있다.    

  

10월 15일은 ‘인천시민의 날’이다. 인천시의 ‘생일’이라고 할 수 있는 시민의 날은 시류(時流)에 따라 그 날짜가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그 곡절을 보면 인천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읽을 수 있다. 요즘은 각 군구에서도 ‘구(군)민의 날’을 각각 치르지만 예전에는 ‘시민의 날’만 있어 일 년 중 가장 큰 지역 축제였다. 볼거리 즐길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인천 시민의 날 가장 거리 행렬은 최고의 이벤트였다. 거리 행진에는 각 학교도 자주 참가했다.  

 

 

 

 1971년도 중앙여상 앨범.

1969년도 인천수고 앨범. 학교 특성에 맞게 어선을 꾸며 등장했다.

 
 

시민의 날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1965년 윤갑로 시장은 온 시민이 다 같이 하루를 즐길 수 있는 ‘시민의 날’ 제정을 고민한다. 당시 인천은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들과 산업화 시기와 맞물려 호남, 충청 등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향토애와 애향심을 고취할 ‘그 무엇’이 필요했는데 시민의 날이 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시정자문위원회는 의미있고 ‘유서 깊은 날’을 고른 끝에 ‘인천 개항일’을 택일한다. 개항일은 1883년 1월 1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1월 1일은 시민들이 다같이 하루를 즐기기에는 날씨가 너무 춥고 게다가 연초이기 때문에 모두들 바쁜 날이어서 적합하지 않았다. ‘조선사대계(朝鮮史大系)’에 의하면 인천항의 실질적인 개항은 1883년 6월에 비롯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이를 적용해 ‘6월 1일’을 시민의 날로 정했다.

 

1971년도 인천수고 앨범. 거북선 옆 전깃줄을 높여주는 장대 든 모습이 이채롭다.

 


1965년 제1회 시민의 날 행사는 그야말로 성대한 잔치였다. 오전 10시부터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앞 광장에서 경기도지사, 지역 국회의원을 비롯해 부평에스캄 미군들, 인천거주 화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시민의 다짐(헌장)’도 처음으로 공포되었는데 이 헌장은 지금까지 매년 시민의 날 행사에서 여전히 낭독되고 있다. 축하 공연 잔치는 이날 밤 8시부터 9시30분까지 공설운동장에서 ‘시민 위안의 밤’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한 지역신문은 ‘국내 베테란급 가수인 현미와 한명숙, 박제란, 최희준 등이 출연해 그칠 줄 모르는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라고 그날의 풍경을 전한다.


 

 

1969년도 박문여고 앨범. 시가지 가장 행렬이 지나가는 곳마다 인산인해였다.

1971년도 인천수고 앨범. 맥아더 동상 앞에서 치러진 제물포제.

 

인천시민의 날은 상공계의 제안에 따라 1968년 제4회 때부터 ‘항도제’를 겸했다. 항구 도시 인천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다. 이듬해부터 두 행사를 통합해 ‘제물포제’라 개칭했다. 이 제물포제는 1974년부터 동양최대 도크식 인천항 갑문 준공일인 5월 10일로 변경되었다.  

1981년 7월 1일 인천은 경기도로부터 분리돼 인천직할시가 된 날이다. 직할시 승격을 기념해 이 날을 시민의 날로 다시 제정했다. 이듬해에는 개항 100주년과 직할시 승격 2돌을 맞아 시민의 날인 7월 1일에 중구 항동 연안부두길 입구에서 시민 1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개항100주년기념탑’ 제막식이 열렸다. 7월 1일을 제정하자마자 계절적으로 폭염과 장마로 인해 행사를 치르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랐다.  


 

1971년도 인천수고 앨범. 단골 참가학교 인천수고의 아프리카 토인 춤.

 

90년대 들어서자 시민의 날에 대한 날짜 변경이 논의가 슬슬 시작되었다. 1994년 인천시는 시민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했다. 인천상륙작전기념일(9월 15일), 경인선개통일(9월 18일), ‘인천’으로 개칭한 날(10월 15일) 중 10월 15일이 선택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태종 13년(1413) 군이나 현에 주(州) 자가 들어있는 고을은 산(山) 자나 천(川) 자로 고치게 했는데 이때 ‘인주’가 ‘인천’으로 변경되었다. 이 날을 시민의 날로 택한 것이다.

 유동현 /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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