꿍짝꿍짝, 엉덩이 들썩이게 한 ‘뺀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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꿍짝꿍짝, 엉덩이 들썩이게 한 ‘뺀드부’
  • 유동현
  • 승인 2018.12.10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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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밴드부


낡은 고교 앨범은 추억 저장소이다.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그대가 있고 분식집 문턱을 함께 넘나들던 그리운 친구들도 있다. 3년간의 발자국을 남긴 모교 운동장과 교실의 모습도 아련하다. 빛바랜 사진첩에는 ‘인천’도 있다. 교정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히 교문을 나서 사진사 앞에서 포즈를 취했던 그대들 덕분에 그때의 인천을 ‘추억’할 수 있다.
 
 
60~70년대 대부분의 남자 고등학교에는 밴드부(흔히 ‘뺀드부’라 했다)가 있었다. 한국의 아저씨들에게 교련복의 ‘제식훈련’과 밴드부의 ‘행진곡’에 대한 기억은 쉬 지워지지 않는다. 애국조회 시간, 졸업식 등 집체(集體)교육 현장에는 항상 밴드부가 있었다. 그들은 학교 행사뿐 아니라 간혹 지역 행사에 ‘출장’ 가기도 했다. 수업 시간 빼먹고 멋진 밴드부복 입고 정문을 나서는 그들이 한없이 부러웠으리라. ‘나도 북치는 법을 좀 배울걸…’
 


1972년도 인천공고 앨범. 교련복 입은 밴드부.

1974년도 인천수고 앨범. 컨덕터 겸 색스폰 주자의 멋진 포즈


학교에 야구, 축구 등 인기 구기 종목팀이 있으면 밴드부의 효용성은 한껏 올라갔다. 경기가 치러지는 공설운동장에서는 밴드부가 그간 익힌 모든 레퍼토리를 쏟아냈다. 배우고 익힌 레퍼토리가 동이 나서 같은 음악이 지루하게 몇 번씩 반복되어도 응원은 밴드부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았다. 혹시 상대편 학교에도 밴드부가 동원되었다면 선수들이 치르는 필드의 경기 보다 응원석에서 벌어지는 밴드부간의 ‘배틀’이 더 치열했다.



1974년도 인천수고 앨범. 인천공설운동장 응원석에서

1963년도 동산고 앨범

 
경기에서 메달을 따거나 콩쿠르에서 상을 타면 시내에서는 카퍼레이드가 열렸다. 대열 맨 앞에 밴드부가 앞섰다. 지나가는 곳마다 아이고 어른이고 고개를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자동차들은 구경도 할 겸 그들에게 모두 길을 내줬다. 행진길은 늘 인산인해였는데 특히 사내아이들은 출발지부터 종착지 까지 주먹으로 빈 나팔을 불며 따라 붙었다.
거리의 환호성에 ‘필’ 받은 컨덕터(흔히 ‘꼰닥터’라 불렀다)는 제 흥에 겨워 지름길보다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 순간 맨 뒤 엄청나게 큰 나팔 ‘수자폰’을 든 덩치 큰 형은 땀을 비 오듯 쏟아내고 있었다.

 

1964년도 송도고 앨범. 공설운동장으로 향하는 밴드부와 그를 따르는 아이들.

 1967년도 송도고 앨범


거리에서는 멋지고 화려했지만 밴드부는 학교 안으로 들어오면 그 어느 단체보다 ‘규율’이 셌다. 우리나라 밴드부는 대한제국 ‘군악대’에서 시작되었다. 그 ‘군기’가 규율로 전해져 온 것이다.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는 도제식 교육도 밴드부의 ‘군기’를 만드는 데 한 몫했다. 그 과정을 거친 밴드부원 중에는 음대에 진학을 했거나 바로 음악을 생업으로 삼은 사람도 적지 않다.
요즘은 밴드부 있는 학교가 별로 없다. 악기 배우고 싶은 아이들은 동네 음악학원에 간다. 전국대회 우승을 해도 밴드부를 앞세운 멋진 시내 카퍼레이드를 할 수가 없다.



 1970년도 인천공고 앨범

 
유동현 /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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