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하고 슬픈, 기뢰폭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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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하고 슬픈, 기뢰폭발 사고
  • 류재형
  • 승인 2019.01.31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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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고 발생 56년만에 세운 예동해변 위령탑


인천168개의 섬들은 나름대로 이야기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를 지내며 소청도는 특별한 슬픈 역사와 질곡의 세월을 보낸 섬이다. 한반도 화해무드에 맞추어 [인천in]은 우리들이 알지 못했던 소청도의 역사와 삶을 조명하는 시리즈를 격주 연재한다.
[평화의 바다, 소청도를 보듬다]의 의미는 문화예술 접목을 통해 주민과 만나고 그들의 마음을 보듬고 풀어주어 화해와 상생의 평화 메시지를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프로젝트는 2018년 9월에서 4개월간 진행되었고 인천광역시, 인천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역협력형 사업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소청도 예동해변에 있는 기뢰폭발사고의 현장의 위령탑

 
1946년 10월 22일, 소청도의 예동포구 동쪽 끝자락 바닷가에 6-70명의 마을사람들이 모여 있다.
소청등대에서 가져온 도구들을 가지고 바다에서 떠밀려온 기뢰를 해체하고 있었다. 이미 1개는 백령도에서 온 최씨라는 사람이 해체하여 안에 들어있는 유황을 나누어 가졌다. 당시 성냥도 없었던 때라 유황을 끓여 관수리(소나무 옹이에서 나오는 진액이 붙은 나무 등걸)에 찍어 성냥 대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이번 두 번째의 기뢰도 유황을 나누어 갖기 위해 많은 마을사람들이 모였고 이윽고 해체한 내부에서 기름이 흘러나오자 호기심에 불이 붙는지 보려고 어느 마을사람이 불을 그어 대는 순간 어마어마한 폭발음과 함께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다.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 잠수함을 방어하기 위해 서해에 다량의 기뢰를 살포해 놓았다. 1945년 8.15해방을 맞고 이후에 예동 해변가에 떠 밀려온 기뢰 2정을 마을사람들이 목도로 육지에 올려놓았고 1년여를 두었다가 이를 해체하는 순간이었다.
기뢰의 크기는 장정 2사람이 양 팔을 벌려 감싸 안을 정도의 크기로 직경 1.5m정도이고 원구의 형태에 위쪽으로 10cm 정도의 붉은 색 뇌관 4개가 스크류 형태로 삽입되어 있었다.

 
기뢰의 모양
1960년대의 사진으로 기뢰가 방치되었던 곳(세모 표시)과 매장한 곳(동그라미 표시), 그 앞에는 일제 때 바닷가에 레일을 깔고 대리석을 실어 일본으로 나르던 선적을 위한 사각형의 석조물이 지금도 남아있다(김봉춘 소장사진).당시는 질 좋은 스트로마톨라이트(일명 대리석)를 일본으로 실어갔고 소청도의 집의 지붕들은 돌 너와로 얹었으나 지금은 한 채도 남아있지 않는다.

같은 시각으로 2009년도에 촬영된 예동 해변의 풍광
 
 
김상학(80) 어르신의 증언

당시 8살이었고 나의 형(김상섭)과 형의 동네친구 2명이 해체 현장에 갔다 오면서 무언가 잔뜩 가지고 집으로 왔다. 현장에 따라가려고 하는 나를 어리다고하며 거기가면 죽으니까 가지 말라고 해 친구와 반대편 해변 끝자락 달바위로 낚시밑감을 하기 위해 홍합을 잡으러 내려가던 중이었다. 별안간 꽝 하는 굉음과 함께 나는 넘어져 잠시 정신을 잃었고 잠시 후 하늘에서 무언가 후드득하며 떨어졌다.
우리는 울면서 기어서 현장으로 갔고 그 사이 동네 어르신들이 현장으로 달려 나오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찾아왔고 우는 나를 보고 현재의 위령탑 근처에 그대로 있으라고 했다.
조금 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김상호(2018년에 돌아가심)를 어머니가 울면서 업고 와서 우리 앞에다 내려놓았다. 충격에 머리가 타고 얼굴도 붓고 눈썹도 없이 울고 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떨어진 곳 모래밭에 있어서 살았던 것이다.
나의 형님 김상섭, 동네 형 봉진도 당시 장소에 있어서 돌아가셨다.
형의 신짝 하나만 현장에서 찾고 시신은 볼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나와 울면서 가족을 찾기 시작한다.
 
김봉춘(88) 어르신의 증언

당시 15살이었고 분바위 방향의 산에 있었는데 폭발된 순간 너무 놀랐고 현장을 달려가 보니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이제 이를 증언해 줄 마을 사람들도 5-6명에 불과하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마을사람들은 김봉춘(88세, 당시 15세), 김상학(80세, 당시 8살), 김주환(78세, 당시 6살), 나형철(현재 노인회 총무), 김명균, 김명남, 한명남(그 날 조부락잡이 나가 살았다 한다) 등이다.
 
김주환(78) 어르신의 증언

바닷가에 있는 큰할아버지 처갓집에 내려가는 도중 꽝 소리가 나 벌떡 자빠졌다. 거리는 멀었지만 하늘에서 돌멩이들이 떨어졌다.
할아버지 댁에 간신히 들어갔으나 마을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나의 매형이 사촌누나와 북한 기린도에 살았는데 이 연기를 거기서도 보았다고 한다. 폭발소리는 백령도까지 들렸다고 한다.

 
김봉춘 어르신(88) 부부, 인터뷰를 위해 프로젝트 팀이 메이크업을 하고 있다.
김봉춘 어르신(88)
김상학 어르신(80)
김주환 어르신(78)
 
 
67명의 사상자가 났다. 마을 전체가 초상이 난 것이다.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집집마다 마을이 울음바다로 변했다.
어느 집은 부모와 자식 등 4명이나 희생이 되었다. 당시 현장에 나간 마을사람들은 형제나 가족끼리 나갔기 때문에 같이 희생된 가족들이 많았다. 특히 어린 아이들이 많았다. 움푹 들어간 우물터에 있었던 2사람만 기적적으로 살았다.
일부 부상당한 마을 사람들은 치료하지 못하고 집에서 있다가 7-10일 후에 사망하기도 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살점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는데 배에서 홍어를 잡아 올리는 갈고리로 사람을 살점을 찍어 가마니에 넣고 부근 우물터에서 5m 바로 위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현재 해수담수화 시설이 들어선 건물의 부근이다.
벌렁벌렁한 살점들을 동네 개들이 물고 다녔는데 동네청년들은 그런 개들에 화가 나 돌이나 몽둥이로 개를 때려서 잡았고 도망하는 개를 산으로 몰아 벼랑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시신이 누가누군지 구분할 수가 없어서 부모나 형제들은 나중에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추정할 수 밖에 없었다.



예동해변의 폭발 현장이 바로 앞이고, 오른쪽 해수담수화 시설이 있는 곳의 뒤쪽에 시신이 묻혀있다. 멀리 서쪽으로 마을이 보인다.
 
 
당시 예동의 인구수는 7-800명가량 이었고 1970년도에는 1,200명까지 살았다.
이후 피해자 후손들은 한 번도 소청도에서 위령제를 지내 본 적이 없었다. 2002년도에 와서야 김봉춘(88)어르신과 이성만 이장이 마을을 다니며 돌아가신 분들의 명단을 수집하여 위령탑을 만들었다.
당시 피해자인 김주석의 아들 김은직(영흥도에 살고 있다)이 위령탑을 세운 것에 기뻐하며 와서 위령탑에 술을 부었다.
현재는 피해자의 자식들도 대부분 돌아가신 상태이고 세월이 흐르다보니 사고사로 처리해 아무 보상도 못 받은 상태이고 2002년에 와서야 위령탑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소청도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희생자들의 후손들이지만 지금 이런 사실들에 별로 무관심하다. 아니 체념을 한듯하다. 그 이유는 소청도에서의 오랜 세월동안 환경에서 겪은 많은 죽음의 경험과 ‘삶의 극한적 겪음’ 때문에 생긴 굳어진 마음의 상처들 때문이다.
순식간에 마을사람들이 사라짐, 기뢰폭발사건에서 희생된 67명, 돌풍으로 가리비조개잡이와 홍어잡이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50여명 등.
더군다나 6.25이후 서해5도 특별관리구역이라는 미 군정하에 있기 때문에 아침에 바다에 나가면서 부대에 신고하고 저녁에 들어와 노를 보관하였던 고기잡이 시절도 겪었다.
이러한 ‘삶의 겪음’을 스스로 털고 움직이고 추슬러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너무 크고 쌓여 있어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슬픈 역사이긴 하지만 역사의 흐름 앞에서 이런 불행한 일이 소청도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어느 섬이든지 다 그렇겠지만 인천의 바다 끝자락, 소청도에서만큼은 유난히 심했던 것이다.
 
2018년 12월1일에 문화예술행사로 마을 분들과 함께 위령제를 지냈다. 서해평화프로젝트라는 주제로 인천문화재단이 주관하고 사진가 류재형이 행위예술가와 함께 진행하였다. 마을 분들은 매일 위령탑을 앞을 지나다니면서 마음 한 구석에 게름직한 부분이 남아 있었는데 위령제를 지내게 되어 매우 고마움을 표시한다.
‘삶의 겪음’ 때문에 생긴 굳어진 마음의 상처를 깨고 녹이는 촉매제 역할로서 아프고 고통스러워 멀리했던 것들을 불러내어 대면하고 서서히 받아들이는 과정을 문화예술로 풀어가는 과정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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