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복수하는 영화, 통쾌하거나 불쾌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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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복수하는 영화, 통쾌하거나 불쾌하거나
  • 박지수
  • 승인 2019.04.30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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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박지수 / 여성주의 운동가



영화 <리벤지>


최근 클럽 속 성범죄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사회에 존재하는 많은 여성 혐오가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이 사건으로 불법 촬영, 성매수, 강간, 스너프 필름 등 남성이라는 이유로 묵인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참고 살았던 당연하고도 불편한 성범죄가 알려지게 됐다. 스너프 필름이란 폭력, 살인, 강간 등의 범죄를 촬영한 영상이다.

스너프 필름은 상업적인 영상과 비상업적인 영상으로 구분된다. 상업적인 영상은 영상을 제작함으로 금전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비상업적인 영상은 정치적인 목적같이 금전을 얻지 않고 촬영 후 유포하는 영상을 말한다. 현재 스너프 필름이라고 돌아다니는 영상 대부분이 겉모습만 흉내 낸 거짓 영상이며, 영화로 제작된 경우도 많다. <세르비안 필름>, <살로 소돔의 120일>, <스너프 102>, <지네인간> 등이 대표적인 스너프 필름이며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리벤지>처럼 여성의 피해에 초점을 맞춘 복수 영화도 비슷한 분위기를 띌 수 있다고 생각한다.

 
ㅡ 여성 복수 영화가 스너프 필름과 비슷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성과 남성의 복수 영화는 설정 자체가 다르다. 남성의 복수 영화는 가족의 납치 혹은 죽음을 알리는 메세지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전화 한 통으로 모든 사람과 싸우면서 가족을 찾는 그에겐 영웅이라는 타이틀이 걸리지만, 여성 복수 영화는 다르다. 여성 복수 영화의 시작은 평범한 일상으로 시작한다. 평범한 주인공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살인마로 인해 목숨을 위협받고 도망가기 바쁘다. 여기서 살인마는 대부분 남성이며, 그들의 손엔 칼이 들려있다. 살인마가 집에 침입하면 주인공이 죽이지 않는 이상 살인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살인마를 죽인다고 해도 그들은 '피해자'라는 이름하에 계속해서 고통받는다. 이것이 여성과 남성 작품의 차이다. 주인공의 성별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달라진다.
 
살인마에게 쫓기는 사람은 모두 여성이다. 가해자가 대부분 남성인 것을 고려할 때 여성의 복수 영화와 스너프 필름은 공통점이 있다. 또한, 살인마는 칼을 들고 여성을 쫓는 것은 슬래셔 영화의 모습도 띄는데, 살인마가 칼을 들고 다니면서 무차별적으로, 혹은 타깃을 정해놓고 살인을 하는 영화를 '슬래셔'라고 한다. 여성 복수 영화는 슬래셔를 포함하고 있으며 슬래셔는 스너프와 폭력, 살해의 공통적인 부분이 있기에 여성 복수 영화도 스너프와 비슷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여성 혐오적인 작품을 소비하는 것이 취향이며 자유일까
 
여성을 이용하여 기득권들의 성욕을 만족시키는 감독도 문제가 있지만, 이러한 여성 혐오적인 영상을 보고 성적 흥분을 느낀다는 사람들이 제일 큰 문제다. 모든 활동엔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다. 남성들이 자유라는 이름하에 여성의 고문, 강간 영상으로 성적인 부분을 충족시킬 때 여성의 위치는 불안해지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현재 기득권 남성의 권력 구조 최하위에 있는, 즉 번식 능력이 떨어지는 남성들은 이성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신을 만나 주지 않는 여성을 향한 혐오가 급증하게 된다. 사회의 불만과 여성을 향한 혐오의 해소, 자신의 성적 만족감과 정복감을 느끼기 위한 활동이 늘어남에 따라 여성을 고문하고 강간하는 작품의 소비도 늘어나게 된다.
 
이들이 비정상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성 도착증을 가지게 만든 원인은 미디어에 있다. 여성차별을 당연시 여기던 사회에 등장한 미디어는 그 문화를 그대로 가져가 남성에겐 자유를 여성에겐 억압을 선사하게 된다. 그것을 보고 자라난 세대는 아래 세대에게 물려주고 반복되면서 여성이 혐오를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느끼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접한 미디어에서 여성을 폭행하고 강간하는 장면을 자연스럽게 접하기 때문에 문제의식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스너프 필름 및 여성을 폭행하는 장면이 등장해도 슬픈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이러한 미디어를 보고 자란 남성들은 피해자인 여성을 향한 공감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에 퍼진 여성의 복수 영화는 사회적으로 억압을 받던 여성들에게 통쾌함을 준다. 여성은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혐오를 벗어나지 못하며 남성들의 혐오 범죄에 노출되고 불안함을 느낀다. 이성과의 관계 형성에서 남성의 가스라이팅으로 통제력을 잃고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한다. 가해자인 남성보다 자신의 혐오가 쌓여 분노로 바뀔 때, 복수 영화의 등장으로 여성들은 분노의 방향이 잘못됐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여성이 남성에게 복수하는 것을 자신이라고 대입시켜 대리 복수를 느낀다. 사회의 여성 혐오가 심해질수록 여성들은 미디어로 분노를 다스리게 되고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여성 혐오가 담긴 영화는 여성의 새로운 도피처가 된다. 이에 익숙해버린 여성들은 통쾌하면서도 불쾌한 딜레마에 빠지게 되지만 시중의 많은 작품 중 여성을 위한 작품이 적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게 된다. 이것이 취향으로 존중할 수 없으며, 자유가 될 수 없다는 의견을 뒷받침해줄 수 있다.
 
2019년, 페미니즘을 접한 많은 여성들이 여성 혐오 작품을 소비하지 않고 여성을 위한 작품을 제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큰 소리를 내는 건 억압된 인권을 되찾기 위한 당연한 권리이며 그들에게도 사회의 문제를 비판할 자유가 있다는 근거다. 이들의 목소리를 들은 미디어의 많은 제작자들은 여성의 표를 얻기 위해 여성을 피해자가 아닌 영웅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의 침체된 미디어 시장을 밝힐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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