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루 슬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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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루 슬픔이”
  • 최일화
  • 승인 2019.05.17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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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단] 전미정 시집 『봄볕 환한 겨울』/ 최일화 시인


작품이 좋고 감동적이어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 시인들도 있다. 그러나 가끔 유명하지 않은 시인들에게서 탁월하고 감동을 안겨주는 시를 발견할 때가 있다. 전미정 시인도 그런 경우다. 몇 해 전 경인교육대학에서 열리는 인문학 강좌에서 시로서 마음의 갈등과 번민을 다스리는 시 치료에 대한 강의를 듣고 처음 전미정 시인을 알게 되었다. 그의 강의를 들은 후 그의 시집 『봄볕 환한 겨울』과 시 치료에 관한 책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 이 시집의 장점은 삶의 진실이 진하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그 진실은 시인의 절실한 체험에서 우러난 진실이며 감동은 인식의 즐거움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안개 속에 갇힌 듯 불투명하던 일상에 깨달음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슬픔과 절망에서도 헤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 그루 슬픔이 / 전미정
 
나는 슬픈 나무
슬픔을 견딜 수 없을 때마다
가지들을 잘라 내었다
열심히 가지를 잘라내며
몇 해가 지났는지 모른다
모든 슬픔을 털어내었으니
내 몸은 얼마나 가벼워졌겠는가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어디선가 어린 나무들이 하나 둘씩
내 품속을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가지를 잘라내는 일이
슬픔을 꺾꽂이하고 있었던 것이라니
내가 낳은 슬픔이
거대한 숲으로 부풀고 있었는지도 몰랐으니
한 그루 슬픔을 견디지 못하더니
이제 수천 그루
수만 그루 대가족의 슬픔을 짊어지게 되었으니

 
삶의 비극은 숙명적인 것인지 모른다. 아무리 슬픔을 없애기 위해 발버둥 쳐도 또 다른 슬픔이 샛길로 다가와 우리를 차지하곤 한다. 우리는 슬픔과 함께 슬픔 속에서 사는 법을 익혀야 하고 슬픔을 삶의 숙명적 동반자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해설을 쓴 한명희 교수의 지적대로 슬픔은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남과 나누는 것이라면 반으로 줄어들 수 있을까. 줄어들기는 하겠지만 타인과 슬픔을 나누어도 여전히 슬픔은 남아 다시 나의 것이 되고 나의 곁에서 꺾꽂이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시인은 그래서 그 슬픔을 승화시켜 견디는 방법을 찾아 나선 것인지 모른다. 그의 저서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는 슬픔과 고통이 어떻게 시 속에 나타나 있으며 시를 통해 어떻게 해소되는지를 아주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겨울 나뭇가지들이 아름다운 것은/전미정
 
사람들은 대개
겨울 나뭇가지에서 앙상함만을 본다
나뭇잎도 다 떠나가고
민망하게 혼자 남겨진 나뭇가지들
그래도 다음해
햇살과 더 가까이 더 좋은 곳에
나뭇잎들 데려가 주려고
막막한 허공에서
첫 걸음마 떼듯
아찔하게 한 발씩 길 트는
그 앙상한 발끝
그 황홀한 식은땀
겨울 나뭇가지들이
아름다운 것은

 
나목이 된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에서 희망을 발견해 내고 있다. 겨울 나뭇가지는 세상의 모든 외롭고 쓸쓸한 것들의 대명사인 셈이다. 그것을 외롭고 쓸쓸한 것으로 방치할 때 거기엔 아무런 전망도 미래도 없다. 그 쓸쓸한 풍경 속에서 내년 봄 수많은 잎사귀들을 햇살 가까이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가 주려는 희망을 발견할 때 그 겨울 나뭇가지는 더 이상 슬픔도 절망도 아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사랑과 희망을 발견해 내는 힘, 그것이 시인의 사명이 아닐까 싶다.
 


하산길 / 전미정
 
산행에서 내려오는 길
미끄럽고 가파른 길목마다
어쩌면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내미는
오래 된 나뭇등걸이나 나뭇가지들
나보다 앞서 하산한 사람들도
아찔한
한 고비를
매달렸던
 
반들반들
빛을 발하는
그 나뭇가지들을 붙잡을 때마다
같은 길로 하산한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토해내는
참으로
징허고 친숙한
그 느낌
그래서인지
하산길은 늘 따뜻하다

 
우리는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게 조차도 늘 은혜를 입으며 살고 있다. 산을 오르거나 하산하다 보면 아찔한 비탈길에 반들반들 닳은 나뭇가지나 나뭇등걸이 우리를 부축하여 안전한 등산이나 하산을 돕는 경우를 종종 본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나뭇등걸에 힘입어 무사히 산행을 마쳤을 것이다. 이 나뭇등걸은 때로는 우리를 위로해 주는 시 한 편, 음악 한 곡으로 대체될 수도 있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우리 사회의 많은 의인으로 바꿔 볼 수도 있다. 독립운동에 헌신했거나 조국수호에 목숨을 바친 무명의 용사들도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지탱해주고 있는 든든한 버팀목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분들의 희생과 헌신에 힘입어 우리는 인생이라는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가족, 친구, 이웃들이 모두 그런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性書 시편·8 / 전미정
―도서관에서

 
수십 개로 빼곡이 이어져 있는
골목골목마다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지
잠시라도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 달라는 애타는 눈길
이왕이면 이 컴컴한 도서관을 떠나
며칠 동안 당신 집에 동거하면서
당신의 품에 파묻혀 지내고 싶다는 표정들
하지만
순결한 첫인상과 달리 너무 불결하거나
청순한 눈빛을 가지고도 너무 위선적이거나
너무 나약해 보이지만 교활한 경우가
너무 잦아
외모와 첫인상만 보고는 쉽게 결정할 수가 없어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다리가 빠지도록
진실한 정신의 창녀를 찾아다니다
낭패를 본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이 시를 읽으면 창녀촌의 풍경과 도서관 서가의 풍경이 동시에 클로즈업 된다. 창녀촌에 가면 거의 유사한 쇼윈도를 갖춘 집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서 있다. 그 모습이 마치 도서관 서가의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사람들은 창녀촌을 찾기도 하고 도서관을 찾기도 한다.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찾아가는 창녀촌과 정신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찾아가는 도서관에서 시인은 욕구충족이라는 동질성을 발견하고 있다. 화자는 결국 낭패를 본다. 욕구충족을 위해 창녀촌을 찾아가지만 그곳에서 얻는 것은 정신의 타락과 환멸과 허무일 뿐 진정한 쾌락은 찾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도서관 서가에서 발견하는 것도 불결하거나, 위선적이거나 교활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우리의 정신을 윤택하게 해줄 진실한 정신의 창녀 즉 맞춤형 좋은 서적을 찾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나는 이 시인의 고백을 이해할 것 같다. 이 시인의 저서인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를 읽으며 많은 독자들에게 꼭 집어 추천해주고 싶도록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진실한 정신의 창녀를 찾아내고 싶다는 갈증이 그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가 아니었을까 짐작을 해볼 따름이다.

 
이 시대 시의 독자 여러분께 / 전미정
 
이 시대 시는 한 마디로
이상기온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희망이 내리지 않아
가물어 죽은 시들
폭설로 미래와 고립된 시들
욕망의 지진으로 산산이 갈라진 시들
폭우에 꿈 다 떠내려간 시들
이런 시의 행간 사이에서
독자 여러분이 일으키는
절망이나 충격 따위는 물론
자살 충동이나 불안증 내지는 두려움
그 어떤 부작용도 보상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의 시는
어떤 보험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의 종말을 보상 받을 수 없듯이
독자 여러분이 시의 행간 사이에서
실종되거나 병들어도
현실 세계로 끝내 복귀하지 못하여도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이 시는 전미정 시인의 시론에 해당하는 시다. 처절하리만치 이 시대의 시에서 절망을 느끼고 있다. 이상기온에 시달리는 시, 희망이 내리지 않아 가물어 죽은 시, 폭설로 미래와 고립된 시, 폭우에 다 떠내려간 시, 이런 시를 접하다가 독자가 경험하게 될 절망이나 충격, 자살 충동이나 불안증을 보상 받을 수 없다고 일갈한다. 마치 지구의 종말을 보상 받을 수 없듯이 독자가 이 시대의 시를 읽다가 실종되거나 병들어 끝내 현실 세계로 복귀하지 못해도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시인의 진단은 매우 시니컬하다. 그렇다면 시인이 추구하는 시는 어떤 시일까. 시는 어떤 모습으로 독자에게 다가가야 할까. 해설을 쓴 강원대 한명희 교수의 진단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그가 말하는 이 시대 시의 문제점들과 정반대되는 곳에 그가 원하는 시가 놓여 있다. 꿈이 남아 있는 시, 독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시. 현실에 발붙이고 있는 시, 나는 이 시를 전미정 시인이 독자들에게 건네는 약속으로, 또 자기 스로에게 하는 약속으로 읽고 싶다.”
 

*전미정 시인: 1994년 《현대시학》 등단. 인천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인천대 교수로 재직 중. 시집으로 『유년의 서가로 가는 길에』 『봄볕 환한 겨울』 기타 저서로 『한국 현대시의 에로티시즘』 『에코토피아의 몸』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 『들어줄게요, 당신이 괜찮아질 때까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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