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영화로 읽는 추(醜)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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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영화로 읽는 추(醜)의 미학
  • 정민나
  • 승인 2019.07.05 06: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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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단] 환유적 시쓰기 - 정민나 / 시인


실재와 이상의 불일치에서 발생하는 ‘불쾌함’, ‘역겨움’, ‘피곤함’, ‘지긋지긋함’이나 ‘볼품 없음’ 같은 혐오발화가 ‘추의 미학’을 구현한다. 21세기를 ‘혐오시대’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시나 영화로 풀어내는 작품들을 우리는 종종 대면하게 된다.

최근에 개봉된 영화 〈기생충〉에서는 지하실에서 생활하는 백수 4인 가족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최첨단 자본주의 사회와 대별되는 생활을 하는데 홍수가 나면 화장실 하수구에서 검은 물이 콸콸 역류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정작 혐오의 감정이 드는 것은 그러한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빈곤한 삶의 모습이 아니라 이 가난한 사람들의 불확정성에 기인한 환멸과 욕망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꿈의 목표나 저항의식 없이 무개념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오직 먹이에 충실한 동물처럼 이웃을 밟고 올라서는데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추의 미학을 통해서 예술은 은폐된 진실을 드러낸다.

 
회복이 되기 전에 다시 병이 들었다
노란 열이 눈에 꽉 차올라 얼음물에 눈알을 넣고 뒤흔들고 싶은 날이었다
나는 왜 신앙심이 생기지 않는 걸까
이렇다 할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불만과 불행과 불감 속에서 나빠지기만 하는데
극복하지 못하는 것을 극복하려는 마음이 애초에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말뚝을 박고 빠지지 않는다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온화한 미소로 장도리를 들고 내게 와주지 않는 것이
내내 서운한 날이었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미안한 것도 아니지만
내 삶이 계속 누군가를 지치게 만드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실 나도 내게 지쳤다
회복을 이유로
누워 있는 일에 지쳤다
이런 이야길 아무렇지 않게 또 해대는 입에 지쳤다
그러다 갑자기 시야가 또렷해지는 순간에
벌레처럼 사람들이 날 징그러워할 것 같아
몸을 웅크렸다
체액이 흘러다니며 열을 발끝까지 전달했다
뜨거워진 발바닥을 식히러 맨발로 계단을 내려간 날이었다
지하보다 더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닫혀 있어서
오 하느님 하고 불렀다
부처님은 부르지 않았다
둘을 함께 부르면 더 큰 혼란이 찾아올 것 같은, 스승의 날이었다
절망과 수치를 가르친 스승에게 꽃을 보냈다
노란 장미를 노란 포장지에 싸서
적어도 노란 장미는 노랗게 아름답다,는 이유로
스승에게 편지는 쓰지 않았다
 
  김지녀, 「스승의 날」 전문


 
김지녀의 「스승의 날」은 역설적인 시이다. ‘스승’은 보통 ‘우리’나 ‘나’에게 잘 되라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절망’과 ‘수치’를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런데 시 속 화자는 그 반대로 말하고 있다. 자신이 지쳤다고 생각하고 또 누군가를 계속 지치게 만든다고 자학한다.

“극복하지 못하는 것을 극복하려는 마음이 애초에 잘못되었다는 / 생각이 내 머릿속에 말뚝을 박고 빠지지 않는다”는 시구에서 화자는 자신의 행위의 부질없음을 말한다. 그러한 자신을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장도리를 가지고 와서 고쳐주길 바란다. 바라는데 오지 않는 신을 원망한다. 그러한 자신을 사람들이 징그러워할 것 같아 몸을 웅크린다.

이 시에서 시적 자아의 혐오와 분열증의 원인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스승이 환멸의 나를 키워낸 장본인이라는 뚜렷한 정황도 없다. 위기 상황에서 하느님과 부처님 중 누구라도 불러도 되지만 둘을 다 부르면 더 큰 혼란이 올 것 같아서 하느님을 부른다. ‘아무나’, ‘아무거나’ 괜찮다는 논리다.
 
화자의 정체성을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다. 자신이 잘못 살고 있는 것은 그렇게 가르친 선생님 탓이고, 자신이 이러한 환경에 처한 것은 구원하러 오지 않는 신 때문이고 제 뜻대로 되지 않아 열나는 몸을 식힐 수 없는 것은 지하실의 문 때문이다. 이렇게 화자는 ‘불만’과 ‘불행’과 ‘불감’ 속에 빠져 있다. 독자는 이러한 존재를 살아 있으되 살아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나 김지녀 시인의 〈스승의 날〉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목표나 중심이 없는 허무주의적인 인식이라 할 수 있다. 〈기생충〉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난관에 봉착한 아들이 “다음 계획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무계획이 계획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가족의 행위를 통해 “~2MB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 라는 지난 시절 유행했던 풍자적인 댓글이나 유행어를 떠올리게 한다. 현실을 비틀어서 당면한 사회와 인간을 보여주는 위의 시나 영화는 그럼에도 구체적인 미래의 전망은 제시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영화와 시를 제작한 감독과 시인은 우리에게 왜 이런 환멸의 세상을 보여주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런 정서에 빠져드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려는 것일까? ‘추의 미학’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고 그를 통해 새로운 통찰에 이르게 하려함일까? 그리하여 사회와 개인 모두에게 자정의 시간을 갖게 하고, 이 자체로 영화와 시의 효용성을 살릴 수 있다면 그들은 의도한 목표를 달성한 것이리라.

 
이 무더위 속으로 누가 자꾸 나를 토해내고 있어
만년 후의 인사동 거리를
실엿 파는 좌판을
꾀죄죄한 골동품들을
 
우글거리는 토사물 속을 걸어가고 있었어
다홍치마에 노랑 저고리를 입은 여자가
국적 불명의 얼굴을 들이밀며
오천원!
하고, 웃을 때까지
 
그 얼굴에 내 얼굴이 철썩 붙어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내 얼굴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을 때까지
 
맞은 편에서 승복을 입은 가면이 다가오는데
왜, 뜬금없이 ‘나’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직전들이 자꾸 옷깃을 스치며 지나갔어
은하가 자자한 네거리
사실 네거리 같은 건 없었어
그저 가면에 눈물이 핑 돌때까지
 
 이경림, 「직전」 전문

 

추의 대표적인 미학 이론가 칼 로젠크란츠(Karl Rosenkranz)는 추의 긍정적 기능으로 “미가 추를 통하여 코믹으로 넘어간다”고 하였다.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라고 한 김수영 시인의 시처럼 이경림의 시 〈직전〉 역시 코믹을 매개로 속세의 속박(“누가 자꾸 나를 토해내고 있어”)으로 부터 벗어나고 있다. 가면의 눈물! 그것은 추의 부정이다.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면서 추를 증폭시키는 것은 시인이 지닌 시적인 기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 시인들은 아름다운 풍경이나 휴머니즘의 완결된 이야기보다 불완전하고 불유쾌한 인간상을 묘사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연극에서처럼 비극과 희극이 함께 상존하는 공간을 꾸미기도 한다. 무대 한편에서는 가장 비속한 언어가 난무하고 한편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속삭인다.
 
개그맨 오정태나 정종철은 TV에 나와 포복절도할 정도로 우리를 웃게 한다. 시청자들은 오정태나 정종철의 못 생긴 인상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의 못생긴 점이 배가되어 연기력을 드높였기 때문이다. 자기 부정을 통해 미로 환원하는 것이 그들의 최종 목표라면 그것 역시 '정 - 반 - 합'의 원리인 셈이다.
 
비천하고, 조야하고, 부조화하는 것은 추의 범주에 들어간다. 시인들은 이러한 인간 존엄의 제한에 맞서는 행위를 가져와 기꺼이 시를 쓴다. 오히려 이런 왜곡과 비틀림이라는 추의 영역을 비껴가지 않고 현실세계와 불화하는 반인간주의 모습을 그린다. 그 이유는 그것이 비극적 인간까지 고스란히 포함하여 인간을 이해하는 ‘숭고’의 정도에 도달하는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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