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특별한 존재다' 가 준 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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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특별한 존재다' 가 준 형벌
  • 최원영
  • 승인 2019.07.07 2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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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길가의 풀처럼





풍경 #115. 헌 옷걸이, 새 옷걸이
 
“사는 게 뭔지~”
사업에 실패한 친구가 술잔을 비운 뒤 한숨을 내쉬며 던진 말입니다. 자조적인 이 말을 곳곳에서 자주 듣는 요즘입니다. 그만큼 삶이 고되고 어렵다는 뜻일 겁니다.
 
왜 삶이 고되고 어려울까요? 기대와는 달리 삶이 왜 자꾸 궁지에 몰리는 걸까요? 누구나 기쁘고 행복한 삶을 원할 테고, 그런 삶을 누리기 위해 노력하는 데도 말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중의 하나는 ‘나’의 교만이 준 형벌일 수가 있습니다.
 
정채봉 시인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에 옷걸이에 대한 흥미로운 글이 있습니다.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 마디 합니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그러자 새 옷걸이가 반문합니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야.”
 
옷걸이의 본질은 새 옷걸이냐, 아니면 헌 옷걸이냐에 있지 않습니다. 옷이 훼손되지 않게 잘 보관하는 겁니다. 그런데 옷걸이들 끼리 다툽니다. 고급 드레스를 걸친 옷걸이는 자신이 고급 드레스인양 착각하고 교만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마치 고급 승용차를 탄 사람이 소형차를 모는 사람을 폄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동차는 그저 옷걸이일 뿐인데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나의 지위나 명예, 또는 재산이라는 옷걸이가 ‘나’는 아닙니다. 잠시 빌린 것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고급 드레스를 걸친 옷걸이이지만 다음번에는 값싼 셔츠를 걸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옷걸이는 옷걸이일 뿐입니다. 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옷걸이는 옷걸이답게 살면 됩니다. 그것이 최고의 삶입니다. 선생은 선생답게, 기업가는 기업가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사는 것이 최고의 삶입니다. 이렇게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곳에 행복이 찾아들고 해맑은 웃음이 머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분수에 맞지 않는 탐욕적인 삶을 살면 행복이나 웃음은 사라지고 말겠지요. 그리고 잠깐 동안의 희열을 맛본 후에는 탐욕이 몰고 올 먹구름과 폭우에 힘겨워할 일만 남아 있게 될 겁니다.
 
 
풍경 #116. 길가의 풀처럼
 
법륜스님의 글입니다.

“‘나는 특별한 존재다. 그래서 나는 특별해야 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자신의 하루하루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초조하고 불안하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알면 특별한 존재가 되고, 특별한 존재라고 잘못 알고 있으면 어리석은 중생이 되는 겁니다.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길가에 피어 있는 한 포기 풀꽃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자각한다면 인생은 자유롭습니다. 내가 남보다 잘 나고 싶고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인생이 피곤한 겁니다. 진정으로 자유를 원하고 행복을 바란다면 마음을 가볍게 하길 바랍니다. 그러면 스스로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삶이 별게 아닌 줄 알면 도리어 삶이 위대해집니다. 길가에 풀처럼 그냥 살면 됩니다.”

모든 일에 내 욕망을 담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욕심을 담기 때문에 힘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 욕심을 담는다’는 것은 ‘내’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특별하므로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 나는 특별한 사람이니까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착각하게 되는 겁니다. 나는 주인이어야 하고, 너는 나를 섬기는 하인이어야 한다는 이 ‘특별한’ 생각이 결국 너와 나를 갈라놓아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하인인 ‘너’가 주인인 ‘나’의 말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나를 실제로는 특별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는 불안하고 초조해지고 결국에는 화를 참지 못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감의 원인이 겉으로는 ‘너’의 태도와 행위에 있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너를 내 마음대로 조종하고 통제하고 싶어 하는 나의 교만함이 원인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스님은 그냥 들풀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높이는 것은 ‘교만’이고 나를 낮추는 것은 ‘겸손’입니다. 교만한 사람의 주변에는 진실한 사람들이 앉을 자리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함께 하면 나의 자존감이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늘 그 사람의 도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지위나 명예, 재산을 탐하는 사람들 만이 그 사람의 주변을 채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상징하던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곁에 있던 그들 모두도 함께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마치 고급 드레스를 걸쳤던 옷걸이가 이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옷걸이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들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가까이 머물면 머물수록 ‘나’의 자존감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별하지 않다는 생각이 결국에는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겸손한 삶이 오히려 수많은 이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이끌어내는 겁니다.

법륜스님의 말씀으로 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왜 사느냐고 인생의 의미를 묻습니다. 그러나 삶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인생은 의미를 갖고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사는 겁니다. 삶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마세요. 그러면 또 하나의 굴레만 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길가에 피어 있는 한 포기 풀꽃입니다. 그러니 길가에 풀처럼 그냥 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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