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정수 인천 선관위 홍보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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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정정수 인천 선관위 홍보과장
  • 김도연
  • 승인 2010.05.2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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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선거 역사의 '산 증인'

취재 : 김도연 기자
 
인천시선거관리위원회 정정수 홍보과장이 인천과 인연을 맺은 때는 1987년 12월 1일. 인천으로 전입하면서다.
 
중간 중간에 경북 울릉군과 의령군, 경남 진해시 등에 나가 있던 3년을 제외하면 무려 20년간 인천시와 일선 구군 선관위에 근무하며 지역에서 벌어진 여러 선거를 치렀다.
 
그가 시 선관위에 있으면서 잊지 못하고 기억하는 것은 1996년의 청사 신축과 관련해서다.
 
"원래 중구 신흥동에 선관위 터를 확보하고 설계까지 완료했는데, 갑자기 그 터가 도시계획부지로 묶이며 청사 부지 위로 철도가 놓이게 된 거예요. 그래서 부랴부랴 다른 부지를 물색하느라 정신이 없었죠."
 
정정수 과장을 비롯해 당시 시 선관위 서무과 직원들은 부지 선정에서부터 청사 설계와 건축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3개월여 만에 끝마쳤다고 한다.
 
"당시 재정경제원에서 관리하던 현 부지를 어렵게 구해 바로 재설계에 들어가 12월에 기공식을 하게 됐습니다. 배정된 예산을 넘기지 않고 그 해에 다 쓸 수 있어 다행이었죠."
 
이미 배정된 예산을 불용처리하지 않기 위해 정 과장을 포함해 모든 직원들이 늦게까지 근무하며 애쓴 결과였다.
 
"직원들이 건축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거의 매일 공사업체나 시 건축관련 부서, 중앙선관위 건축담당 등에 문의를 하며 매달렸죠. 예산도 당초 규모보다 줄어든 상태여서 최소비용으로 건물을 지어야 했으니 어쩔 수 없었어요."
 
청사 건축은 비록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됐지만 모든 어려움을 뒤로 하고 이듬해 12월 준공했다. 1982년 신설 이후 매년 인천시청 건물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시 선관위가 '자기 집'을 갖게 된 것이다.
 
"개청 때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매달 월세를 내는 셋방살이를 하다가 좁더라도 자기 집을 갖게 됐을 때 기쁨이랄까요."
 
인천의 선거 역사를 직접 경험해 온 정정수 과장. 그가 시 선관위와 관련한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하는 또 다른 대표적 '레퍼토리'는 선관위 확대와 선거업무 다양화 등에서 겪는 격세지감이다.
 
"1988년에 처음으로 시 선관위로 배정받았을 때 직원들이 12명이었고 전체 구군 선관위 직원도 14명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시 선관위 직원만 30명이고 일선 구군 선관위 직원들도 80명으로 늘었습니다. 20년이란 세월동안 그만큼 선거 사무가 확대되고 다양화한 것이지요."
 
정 과장의 기억 속에는 20년이란 세월 변화를 거친 시 선관위의 활동상이 그대로 저장돼 있다.
 
"지금도 선관위 업무의 꽃은 관리업무라고 할 수 있지만, 예전보다 지도단속 업무가 많이 변했습니다. 사실상 이전에는 단속 업무가 그저 경찰에 인계하는 수준이었죠. 그러던 것이 1998년부터 조사권이 부여되면서 조사단속 활동이 급격하게 많아졌습니다."
 
시 선관위 지도단속 활동은 계속 발전해 왔고, 지금은 '예방'으로 그 흐름이 바뀌고 있다.
 
"시 선관위는 그동안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개선할 건 개선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시대 변화에 발맞춰 스스로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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