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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서 받은 삶의 위로, ‘아프리카 엔젤’을 꿈꾸게 하다

동네 ‘홍반장’ 자처하는, 목공소 ‘아프리카’ 김영수 사장

16-07-01 14:36ㅣ 배영수 기자 (gigg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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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소 ‘아프리카’를 지키는 김영수 사장. ⓒ배영수
 
몇 년 전부터 동인천역 대한서림과 학생교육문화회관 사이를 거쳐 홍예문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나무로 만든 특이한 광경이 보이곤 한다. 골목 중간 약간 너머 아이들이 나무에 그린 듯한 다소 ‘어설픈’ 분위기의 그림들이 빽빽하게 걸려 있는데, 정작 나무 자체는 무척 정교하게 재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아이러니함에 발길을 흠칫 멈추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기자가 발길을 멈추는 그 곳은 최근까지도 동네 주민 누구나 와서 쉴 수 있는 일종의 ‘카페테리아’와도 같은 테이블도 있었다. 올라오는 어느 순간 정겨운 나무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그림 건너편에, 아이들이 나무에 그린 그림을 완성시켜주는 목공소 ‘아프리카’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나무에 그린 그림을, 목공소 아프리카의 김영수 사장이 정성스럽게 재단해 골목 벽면에 전시해 놓았다. 이 골목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다. ⓒ배영수
 

◆ 부산서 자란 사나이, 아이 위해 ‘인천행’
 
혹여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이 아프리카의 김영수 사장을 처음 만난다면 뭔가 당황할 수도 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 즈음에 봤던 그는 짧게 깎은 머리에 런닝 티셔츠를 즐겨 입고, 팔뚝에 가득한 다소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문신을 하고 있었고, 이후 다시 만났을 때도 이는 변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문신 등의 외모를 아무렇지도 않게 접할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도 사실. 그런데 김 사장을 인터뷰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 동네 주민 몇몇 분들을 다른 일로 잠깐 만날 수 있었는데, 대화 도중 그들이 우연히 김 사장 이야기를 꺼내면서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맛있는 음식을 접하면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을 음식”이라고 하지 않던가. 흔히 접할 '비주얼'을 갖고 있진 않지만 그만큼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크다는 것이리라.
 
어렸을 때부터 동인천과 신포동을 누비고 다녔던 기자로서도 오래 전부터 본 인물은 아니기에, 고향을 물어보니 역시 태생이 인천은 아니었단다. 태어나기는 서울 성북구에서 태어났고, 아기 때 부산에 내려간 이후 성인이 될 때까지 다대포 해수욕장 인근에서 자랐다고 한다. 당시 집안은 물론 동네 자체가 무척 가난했기에 초등학교 때부터 신문배달은 물론 파래나 미역, 곰피 양식장에서 일하면서 용돈을 벌어야 했다. 인근 조선소나 공장에서 쇠붙이를 ‘슬쩍’해 팔아 용돈도 마련해 봤고, 겨울에는 해수욕장엘 가서 모래사장을 뒤져 동전(예상외로 많이 나온단다)도 줍고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어렸을 때는 줄곧 부산에 있었지만, 인천에 첫 발을 디딘 시기는 그래도 꽤 오래 됐다. 바로 해병대에 지원해서 백령도에서 복무를 하게 된 것. 물론 인천에 대한 특별한 추억을 남기며 제대를 하지 않았다보니, 군복무를 마치고는 서울로 가서 자동차 영업을 하다 결혼을 하게 되면서 부천에서 생활을 했다. 그런데 첫 아이를 낳고 아이를 위해 볕이 제대로 드는 집을
구하려니 마음처럼 되지 않던 차에, 인천 신기촌에 볕이 괜찮은 집이 있어서 이사를 했다.

그렇게 인천과의 본격적인 첫 인연이 시작된 것. 터전을 옮긴 그는 구월동 농산물 도매시장에서 배달 일을 시작해 무와 알타리 등의 장사에 중매인으로 8년을 일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그는 과일끼리 부딪히거나 해서 상처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엠보싱이 시장에 날아다니자, 그걸 모두 주워 모아 나무 모양의 구조물을 만드는 등 별난 짓(?)들을 많이 하는 걸로도 유명했다나.

 

한창 작업 중인 김영수 사장의 모습. ⓒ배영수
 

◆ 건축업 종사로 시작된 곡절의 끝은 ‘목공장이 삶의 시작’
 
그러다 좋은 계기가 있어 건축업 종사자로서의 삶이 시작했다. 주로 학교 체육관의 지붕 돔을 만드는 업체에서 7년 이상 일을 했고, 이후 2008년경 일했던 회사가 해외 수주에도 성공하면서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의 원자력 발전소 현장서도 일을 했다. 당시 회사가 자금사정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어서 월급도 100만 원 남짓 받고 일을 하면서도 직원들 모두가 회사 하나 제대로 살려보자고 죽을힘을 다해 일을 해 공사를 마치면서는 사정이 아주 좋아졌다. 하지만 중동 생활에 염증을 느꼈던 대표와 중동시장을 좀 더 개척하고 싶었던 그의 의견이 맞지 않으면서 결국 회사를 나와야 했다.
 
“인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든 시기였다”고 소회한 그는 이후 경제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일용직까지도 마다하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당시 일용직 현장 중에는 현재 LNG 기지가 서 있는 송도신도시도 있었다고. 흔히 “시간만 때우다 가면 끝”이라는 인식이 강한 현장 일용직 노동자와 달리 그는 성심성의껏 일을 했고, 그 결과 업체 관계자 눈에 띄어 작업반장직으로 현장을 도맡게 된다. 그러나 작업반장으로 승진(?)하는 그를 시기했던 다른 일용직 노동자들이 담합해 일부러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반발하면서 몸싸움까지 해야 했고, 결국 그 일도 그만두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이야길 들어도 그의 삶은 꽤나 고단했던 셈이다. 실제 당시 그는 “나라는 존재 가치에 대해 크게 좌절했던 시기”라고 털어놓았다.
 
이후 그는 인천서 며칠 한량과도 같은 생활을 하다가, 오토바이 한 대로 오만 곳을 다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전국일주를 목적으로 다녔던 그의 유랑생활은 해외까지 이어졌고, 그렇게 유랑생활을 하던 중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아프리카로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숙소로 지낼 공간을 알아보다, 한 지인의 소개로 현재의 아프리카 목공소가 서 있는 이 공간으로 들어오게 됐다. 처음엔 그냥 숙소로 쓰려 했는데, 장비 몇 개 갖다 놓고 내부를 꾸며놓은 게 목공소인 줄로 착각한 한 아주머니가 목재 테이블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태생이 엉뚱한’ 그가 이걸 또 들어준 것. “월세가 28만 원인데, 30만 원을 준다고 하니까 해줬다”는 그는 그걸 계기로 자신에게는 꿈과 같은 대륙 ‘아프리카’를 이름으로 해 목공소를 차리게 됐다. “워낙 당시 삶의 수준이 바닥이다 보니 기대감이나 두려움 같은 것도 없었고, 그게 용감하게 목공소를 차린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구미호 데이’ 당시 참여한 학생들과의 기념촬영. ⓒ아프리카 목공소
 

◆ 지역서는 ‘홍반장’, 아이들에겐 ‘예술반장’
 
기자가 목공소 ‘아프리카’의 수익적인 일에 대해 묻자, 인테리어 전문 업자들을 부르기에 영세한 수준의 가게들이 목재나 철재 등의 인테리어나 집기 제작 등을 부탁하는 경우가 가장 많고, 그외 집이나 공간 수리 등도 해주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를 인터뷰하고 몇 주 지나 우연히 인근 카페 ‘파랑돌(인천을 대표하는 클래식 기타리스트 리여석씨가 운영하고 있음)’의 목공일을 도와주던 김 사장을 다시 만날 수 있었는데,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다음 행선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영화 ‘홍반장(김주혁, 엄정화 주연)’의 주인공이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이 지역에서 홍반장의 역할을 그가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특이한 점은 그가 목공일을 주로 하는 사람임에도 지역에서 나름 예술작가로 인정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로 지역에서 아이들, 청소년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이를 작은 전시회로 확장하는 것은 물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러 행사도 꽤 진행을 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10월 말 서양의 할로윈 데이를 한국화 시켜 파티를 해보자는 의미로 열린 ‘구미호 데이’가 바로 그것. 주제에 맞는 귀신 메이크업 분장 등을 하며 학생들과 시민들이 유쾌한 시간을 보낸 것이다. 지역에서 이게 유명해졌는데, 대부분 시민들이 “이런 건 이태원에서나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인천서도 된다”면서 너무 재미있어했다는 후문.
 
“남편이랍시고 제대로 가장 역할을 못했다며 핀잔을 줬다”던 아내도, 요즘은 “그래도 남편이 쓸데없는 짓만 하진 않네”라고 반응한다며 웃었다. 실제 구미호 데이 당시에는 귀신 분장을 하던 학생들이 슈퍼마켓 등을 급습(?)하는 일도 있었는데, 센스 있는 가게 주인들이 사탕이나 요구르트 등을 나눠주기도 했고, 당시 뮤지션들과 팬들이 모여 바비큐 파티를 하던 상태였던 신포동 음악 클럽 ‘글래스톤베리’에서는 뮤지션들이 아이들한테 고기도 나눠주곤 했다고 한다. (아마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를 나눠줬다면 분위기가 정말 ‘짱’이었을 것 같기도.) 특히 인근 아이들을 비롯해 인성여중고와 제물포고 등 학생들 몇몇이 이곳에 와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있고, 아이들이 자주 오는 것을 파악한 아이들 학부모 중에서는 음료수서부터 크레파스 등까지 사다주는 경우도 꽤 있고 이를 기반으로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도 일부 하게 됐다고 한다.
 
의미 있는 다른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가끔씩 대안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목공 체험 수업도 몇 번 했었고, 그 외 어린이집 체험학습 등 여러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기도 했다. 김 사장은 “건너편 바깥벽에 전시된 것들이 거의 다 이런 프로그램의 결과들”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이런 여러 활동이 계기가 되며 그는 인천문화재단의 소품 제작도 일부 맡아 입주작가들의 전시 작업에 힘을 보태기도 했고, 지난해 송도 트라이볼에서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재활용품 활용 체험학습 프로그램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올해 ‘한국미술조망전’에 작품 출품을 하고 입주작가 쇼케이스 등도 하는 '쾌거'를 이뤘다. 특히 이 작업에서 만난 다른 작가들이 목공 혹은 철공기술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스케일이 큰 작품 구현이 가능한 그와 협업하는 것에 아주 만족해하는 모습을 봤다고도 했다. 그때서야 그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괜찮은 놈이었구나”라면서 씨익 웃었다고.
 

김영수 사장이 송도 트라이볼에서 아이들에게 체험학습을 진행하던 모습. ⓒ아프리카 목공소
 

◆ “언젠가는 아프리카 갈 것... ”
 
그러고 보니 아프리카를 지나는 곳에서는 ‘길 카페’라는 개념의 목재 테이블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설치가 돼 있었다. 인근 홍예문과 자유공원 등을 두고 ‘서울의 파고다 공원 같이, 어르신들이 많이 오시는 곳’이라는 그는, 이곳에 목공소를 처음 차렸을 때 길에 쉬어가는 곳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아 땅바닥에 그냥 앉아서 쉬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많이 봤다고 한다. 이에 그는 ‘본디 제작했던 테이블 서너 개를 인도 쪽에 놓아 쉬게 해드리자’고 생각했고 ‘길 카페’라는 이름으로 테이블을 놓아 쉼터를 조성했다. 처음에 ‘길 카페’라고 하니까 몇몇 행인들은 ‘커피도 파냐’고 묻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다고 임의로 커피를 판매할 수는 없어 ‘음료는 슈퍼에서 사다 드세요’라는 입간판을 추가로 써놓게 된 에피소드를 전했다. 테이블을 만들자마자, 노인 분들이 너무 좋아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아 어떻게 된 거냐 물었다. “차 댈 공간이 없다고 민원이 들어오는 바람에 다 치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열 명이 좋아도 한 명이 싫으면 막히는 게 동네 일”이라는 그는 “구청이나 일부 시민들이 너무 근시안적인 생각에 빠져있다”면서, “본디 이런 골목에는 주말만이라도 차를 못 다니게끔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물론 그러한 민원과 행정이 아쉽긴 하지만, 처음 이 골목에 왔을 때 온통 점집이었던 분위기가 자신으로 인해 조금 달라져 있는 부분을 발견하면 흐뭇함도 아직 있다고 했다.
 
김 사장은 자신에겐 ‘꿈과 같다’던 아프리카 대륙으로 언젠가는 갈 것이라고 했다. 아프리카를 위한 일도 하고 싶단다. 실제 올해 초 SNS를 통해 ‘Go Africa’라는 이름으로 중고 생필품이나 헌옷 등을 모아 아프리카로 보내보자는 프로젝트를 시작해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중동에 있을 당시 물류 경험이 있어 800만 원 정도 경비를 모으면 컨테이너 단위의 물류이동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 모아서 보내보자는 것. SNS상의 지인들이 이를 확인하고 택배들을 본격적으로 보내오기 시작했는데, 예상보다도 훨씬 호응이 커 올해 중으로 컨테이너 한 박스가 충분히 가능하고 내년엔 세 박스까지도 가능할 것 같다며 밝은 표정이다. 또 나중에라도 아프리카 땅을 직접 밟게 되면 막노동에 있어서는 도가 튼 만큼 학교 건물을 지어주거나 하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도 계속해서 찾아 나가겠다는 포부도 함께 밝혔다.
 
김 사장은 “지역사회에서 목공소 ‘아프리카’가 특별한 기억으로 남기보다는, 함께 그림을 그렸던 아이들의 100분의 1이라도 자신을 기억하고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았다고 목표는 이룬 셈”이라 전했다. 중앙언론은 하나도 안 보지만 지역 언론은 일부러 챙겨본다는 그는 ‘놀던동네늬우스’와 ‘인천in’에 “지역신문인 만큼 행복한 일들을 많이 알리면 참 좋을 것 같으니 이웃과 함께 소식을 공유하고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소통의 활동을 계속 이어갔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목공소 앞에 얼마 전까지 조성돼 있었던 길 카페의 모습. 김영수 사장은 “주차 공간 민원을 이유로 모두 치워야 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아프리카 목공소
 
※ 본 기사는 ‘놀던동네늬우스’와의 협약으로 진행돼 <인천in>과 놀던동네늬우스 두 매체에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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