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예술 활동’ 통해 작가의 정체성 지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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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예술 활동’ 통해 작가의 정체성 지킬 것”
  • 배영수 기자
  • 승인 2016.09.08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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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지대사람들] 박미나 / ‘낙타사막’ 대표

일정 수준 이상의 도시를 이루고 있는 지역을 여기저기 기웃기웃 하다 보면, 크진 않지만 소박한 활동을 하며 예술가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꼭 몇몇은 있기 마련이다. 사실 인천 중구는 이러한 성격의 예술가들이 골목골목서 소박히 혹은 은밀히(?) 활동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관할구라 할 수 있겠다. 지금 이 장에서 예술가로 소개하는 박미나(43)씨 역시 그렇다. 그녀가 직접 운영하며 카페 겸 공방으로 활용하는 ‘낙타사막’은 인천아트플랫폼에서 공자상으로 올라갈 때까지 유심히 보지 않으면 찾기가 좀 힘들고, 그녀는 그곳을 기반으로 소박한 예술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근래에 정착한 신포동 일대의 예술가들이 외지에서 온 경우가 많은데, 박씨 역시 그런 경우다. 1974년 안양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그곳에서 나왔고, 평범한 유년 및 10대 시절을 보냈다. 그녀가 직접 고백하기로는, 사실 10대 시절의 그는 학교 내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감으로 생활했고, 공부도 잘하는 타입은 아니었다고. 다만 또래와의 다른 점이라면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실제 안양시내 예술기관에서 주최하는 미술대회에 출전해 입상도 했던 바가 있다는 것. 그림에 남다른 소질이 있는 것을 발견한 부모님께서 오히려 그녀보다 먼저 ‘미대를 가라’는 권유를 했고, 그렇게 그는 미대생의 꿈을 안게 됐다.
 
1974년생은 수능 전 ‘학력고사’의 마지막 세대다. 내신 성적 때문인지, 아니면 운이 없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가고 싶은 학교는 따로 있었는데 모두 낙방했다고. 그래서 처음엔 재수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당시 인천 만수동에 살던 삼촌이 “인천 대학교도 좋으니 여기서 미술 전공을 하거라”라는 권유를 했다고 한다. 삼촌 덕에 그전에도 인천은 몇 차례 왔던 바가 있었고, 당시 도시에 대해 별다른 감흥은 없었지만 ‘그리 어색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인천대(당시에는 제물포에 있었음)에 원서를 넣었는데 여기서는 합격을 하며, 이렇게 인천 대학생으로서의 본격적인 삶이 시작됐다.
 
그렇게 학교를 무난히 졸업하고 작가로서의 삶이 시작됐지만, 뭔가 개인전을 크게 한다거나 하는 활동은 없었다. 본성이 앞에 나서서 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보니, 지역의 그룹 미술전이나 예술회관 등에서 작가들이 연합해서 하는 활동은 했지만 거창한 개인 타이틀은 없는 편이라고. 당시 예술회관 근처에 지인과 작업공간을 놓고 있었는데, 근방에 선배 미술가 혹은 다른 장르에서 활약하는 예술가들이 꽤 거주하거나 작업 공간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그곳의 임대료들이 일순간 치솟기 시작해 오래 있진 못했다(참고로 예술회관의 임대료들이 갑자기 오르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1년경으로 요즘 흔히 말하는 ‘젠트리피케이션(둥지 내몰림)’ 현상이 인천지역에서 대거 가시화됐던 첫 번째의 사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인천에서 예술 활동을 나름대로 계속해 왔고, 인천이 고향인 지금의 남편(남편인 김홍희씨 역시 지역에서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을 만나 결혼하면서 2006년 전동으로 정착해 ‘인천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즈음 공공미술이 붐을 타기 시작하면서 ‘홍예문 프로젝트’, 그리고 인천문화재단 등에서 하는 공모전이나 예술전 등에도 참여하는 등을 통해 인천의 예술가로서 적응기를 거쳤다.

 


지금 그녀의 예술작업이 주로 진행되는 곳은 그녀가 직접 건물을 매입해 운영하고 있는 카페 ‘낙타사막’이다. 이곳에서 오래 활동했던 한 활동가에 의하면 현 낙타사막이 있던 공간은 본디 술창고였는데, 이후 관사 등으로 여러 번 바뀌면서 내부는 당시의 원형이 없는 상태고, 외형은 비교적 잘 보존이 돼 있는 상태란다. 그러고 보니 근자에 그녀의 활동을 기자가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 공간에서 작업을 집중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처음엔 카페로 오픈할 생각은 없었고, 다만 작가로서 활동을 지속해야 하다 보니 여러 명이 모여 작업할 공간이 필요하겠다 판단이 됐고, 여기에 부가적으로 경제적인 부분의 창출 효과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단다.
오픈 시기는 지난 2011년 9월. 실제 초창기에는 함께 하던 멤버들도 몇 있었는데 그들 나름의 개인사정이 있어 공간을 떠나게 돼 지금은 남편 김홍희씨와 자신이 운영하는 공간이 됐다고 한다. 다만 ‘상업적’인 시각에서 보면 사실 낙타사막의 공간적 입지는 그렇게 좋은 편은 사실 아니다. 그녀는 “그래서 부자도 아닌 제가 매입까지 할 수 있었을 거예요”라며 멋쩍게 웃었다. 비록 커피 등을 파는 공간이라 해도, 그보다는 자신의 작품 세계 구현을 우선으로 하는 곳임을 알 수 있는 단면이리라. 실제 그녀는 이곳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손님이나 저나 크게 신경 안 쓰고, 눈치 안 보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길 원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면 목적의 상당 부분은 이룬 것 같기도 하다.
 
기자가 인터뷰를 하던 당일에도 “딱히 목적이 있어서 예술작업을 하는 게 아니다 보니 지역 작가로 소개되는 것이 좀 쑥스럽다”고 했던 그녀지만, 그래도 남편과 함께 지역의 다른 예술가 및 기획자들과 종종 교류를 하며 판을 만들어가는 데에 일조를 하고 있다. 실제 뮤지션들의 공연도 여는 음악 전문 클럽인 ‘버텀 라인’, ‘글래스톤베리’ 등의 운영자들, 그리고 인천서 ‘사운드바운드’를 기획하고 있는 루비 레코드 관계자들과도 이들 부부가 교류하고 있다. 또 이 지역 자체가 큰 동네가 아니다 보니, 근처 거리를 다닐 때 근처 업소 주인들이나 예술가, 아는 직장인 등 지인들과 자주 마주치고 반갑게 인사도 나눈다고.
 
박씨는 요즘 인천서 소위 ‘작가’로 활동하면서 몇 가지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의 미술계와 예술계가 보여주는 ‘트렌드’를 이해하고 잡아나가는 부분이 예술가로서는 필요한데, 마흔을 넘어선 지금은 여기에 대한 고민이 다소 생겼다고 한다. 낙타사막에서 주로 작가로서의 작업을 하다 보니 일종의 매너리즘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약간은 있는 편이라고. 하지만 급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라고 마음을 먹었고, 소박하게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가면서 평가받고 조언도 듣고 하면서 잡아나가기로 했다. 또 현재도 동화 일러스트 작업을 구상 중에 있기도 한데, 기회가 되면 훗날 책으로 낼 생각도 하고 있다고 한다.

 


또 누군가가 자신 혹은 낙타사막 공간과 협업을 할 용의가 있다고 하면 얼마든 함께할 생각이 있다고 했다. 실제 대학교에 강의를 나가고 있는 학교 선배 중 자신이 가르치는 4학년 학생들의 전시회를 매년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한 3~4년 정도 자릴 내준 적도 있고, 그 외 근래 ‘사운드바운드’의 지음 음악 감상회에서도 자리를 허락하며 훌륭한 공간으로서 평가를 얻은 바가 있다. 향후에도 자신 혹은 자신의 공간에서 뭔가 하고 싶다는 지인들의 제안이 있다면, 얼마든 보조를 맞춰줄 생각이라고.
 
이제 ‘인천지역에 완전히 정착한 작가’로서 갖는 자부심이 있느냐 물으니, “어려운 질문”이라면서 한참을 망설인다. 뭔가 자신의 이름을 크게 내세우면서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실제 그런 적도 없었던 데다,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활동하는 작가들을 보면 내심 부러운 부분도 있었다나. 물론 스스로의 성격이 좀 느긋한 편이 데다 원래부터 자존심을 크게 세우는 편도 아니지만, 그래도 작가로서의 정체성은 잃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박씨는 인터뷰 말미에 “소위 ‘로컬 언론’이 지역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주민들이 알고 응원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면서 “나 역시 지역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역 언론에 응원을 많이 할 것”이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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