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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숙박요금 만 원이지만… ‘더 싸게, 오래 사는 여인숙’

[떠나지못하는사람들] (4회) 배다리 진도여인숙 황 할머니

16-10-24 03:11ㅣ 이재은 객원기자(dimfgog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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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문간에 쪼그려 앉아 표고버섯을 썰고 있었다. 말려서 갈아 찌개에 넣어 먹을 거라고 했다. 일요일 오후, 전깃불을 아낀 여인숙은 그늘이었다. “전기세가 젤 무서워.” 할머니가 말했다. 주변의 여인숙은 거의 문을 닫았다. 주인이 아파서 닫고, 병원에 입원해서 닫고, 장사가 안 돼서 그랬다. 한때는 여인숙을 들고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번갯불에 콩 궈 먹지. 어떤 사람은 들어가서 5분 후에도 나오고 10분 후에도 나오고.”

이런 얘길 해도 되는지 몰라, 하면서 툭 던지고는 이런 얘기는 쓰지 말라고 했다. ‘아가씨’가 있고 ‘아가씨’를 찾던 손님이 넘쳐나던 시절의 이야기.

 

귀가 ⓒ 김기래

 

막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여인숙을 시작했다. 26년째. 할머니는 올해 일흔여덟이다. 인천 동구 금곡동 배다리에 있는 진도 여인숙. 1층에 9개, 2층에 8개의 방이 있지만 쓸 만한 건 열 몇 개뿐이다. 일곱 명의 장기투숙객이 있고, 그들이 한 달에 15만원씩 낸다.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여기 청소 다 하고, 빨래해서 널어놓고, 그러곤 앉아서 티비 보다가 손님 오면…” 

손님하고 얘기도 하고요?” 

“내가 손님하고 왜 얘기를 해? 손님들이 늙은이하고 얘기하려고 들겄어?” 

열 몇 살에 시골에서 올라와 아는 사람 소개로 동일방직에 들어갔다. 하숙집을 얻어 금옥이, 화순이, 미자, 넷이서 한 방에서 생활하며 8년을 다녔다. 결혼하고 아이 키우느라 그만뒀다. 대한통운에서 근무했던 남편도 벌이가 좋았지만 노름 하느라 가정에 무심했고 생활비도 주지 않았다.


“옛날 문화극장 있을 때, 이 앞이 됫박으로 쌀 파는 데였어. 우리 주인아저씨 대한통운 다닐 때 돈은 안 갖다 주지, 쌀 한 가마를 사서 그걸 이고 화수동 꼭대기까지 가. 돈을 갖다 줘야 살지. 그때는 가난해서 됫박 쌀 많이 먹었거든. 앞뒷집에 한 됫박씩 팔아먹고 그렇게 살았어. 

돌아가신 지 꼭 40년이네. 그때는 아들딸이 어려서 어떻게 살아야 되나 캄캄하더라고. 우리 주인아저씨가 병이 들었던가봐. 말하자면 폐였나봐. 피를 토하고 밥도 못 먹는 거야. 주인 할머니가 “애미야, 폐병에는 태가 좋단다.” 그래. 어린애 태. “할머니, 태를 어디서 구해요?” 바닷가에 가면 태를 신문지에 싸서 버려뿐단 말이야. 그 소리 듣고는 추운 겨울에, 바다에 들어 갔다 오면 다리가 얼어서 감각이 없어.


식초 치지 말라고 하더라고. 약효 떨어진다고. 그걸 숭덩숭덩 잘라서 가져가니까 질겨서 못 먹겠다, 죽어도 못 먹겠다 그래. 할머니한테 말하니까 태 옆에 달린 거 말고 가운데 무른 거, 살만 골라서 참기름 치고 소금 좀 치고 김에다 싸주라 그래. 태가 크지만 살만 자르면 요만큼밖에 안 돼. 이 앞이 수문통, 다 바다였잖아. 있는 대로 주워다 항아리에 담아놔. 하나 먹고 둘 먹고 셋인가 먹였더니 기침을 안 한단 말야. 어마, 어마, 죽었나 봐, 하고 흔들었더니 “어?” 그래. 이틀만 먹으면 질려서 못 먹겠대. 조금씩 잘라서 김에 싸 입에다 넣어주고, 넣어주고 했는데 뱃살이 나와. 보건소에 가서 엑스레이 찍어봤더니 어떻게 해서 이렇게 좋아졌냐고. 여름에는 좀 덜 먹이고, 그렇게 한 10년 살았나 봐.” 

살만 했는데 또 어디가 아프다고 했다. 시립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았다. 입원하자고 했더니 “집안 거덜 내고 새끼들 거지 만들 일 있냐”고 욕을 해서 집으로 데려왔다. 안 아프면 길가에 앉아 있고 정 아프면 방에 들어가 누웠다가 몇 달 뒤 숨을 거뒀다.

“위암은 몇 달 안 앓았지. 아픈지도 몰랐지. 지금 가만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15호실 ⓒ 김기래

 

2년 전 진도 여인숙을 사진으로 담고 전시도 했던 김기래 사진가와 동행했다. 할머니는 사진가를 반색했고, 그는 여전히 9호실에 머물고 있는 노인과 인사를 나눈 뒤 한참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문밖에서 슬쩍 들여다보니 한 평 남짓한 방에 노인과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 관광도 끔찍이 댕겼다. 친목회에서도 가고 산에도 그, 내가 키가 조그마니깐 신발도 조금 높은 거 신고, 난 내 손으로 머리를 잘 하거든. 머리를 잘 만지거든. 머리 만지고 딱 해놓고 가면 산악회에서 저 아줌마는 김포 비행장에서 막 온 사람 같다고 그랬었어. 그랬는데 이제는 딴 거 볼 거 없어. 사진을 보면 아, 나 예전에 이렇게 놀러 다녔구나 그래지지, 볼 게 하나도 없잖아. 어느 때는 사진 갖다 놓고 혼자 봐. 사진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건강에는 자신 있었는데 지난해 갑자기 풍을 맞았다. 지팡이에 의지해야 걸을 수 있고 오래 앉았다 일어서면 다리가 찡하다. 발음도 어눌해졌다. 걸음이 힘들어 콩나물 하나 사려고 해도 택시를 타야 하는데 혹시라도 손님이 올까 봐 웬만해서는 집을 비우지 않는다.

“팔십 돼가지고 죽었으면 좋겠어. 지금 죽어도 좋은데, 우리 막내, 딸도 먹을만치 살고 큰아들도 괜찮은데 우리 막내….”

지금은 세를 내고 여인숙을 운영하지만 한때는 더 큰 숙박업소의 주인이었다. 막내아들이 수차례 사업에 실패하지만 않았어도 화장실도 없는 여인숙 방 한 칸에 의지해 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올 초에도 천 만 원을 마련해줬다. “안 미우세요? 원망하는 말씀을 안 하시네요.” “왜 미워. 아들인데.” 마흔넷에 미혼, 할머니는 짝 없는 막내아들 걱정뿐이다.

“죽을 때까지, 발 걸어 다닐 때까지 해야지. 가만히 앉아서 돈 만 원만 다오, 돈 만 원만 다오 하면 며느리, 아들딸 다 싫어해. 내가 주면 좋다고 하지. 돈 주면 다 좋아해. 집에만 있는데 목걸이, 반지가 뭐 필요해? 다 빼서 큰며느리 줬어. 그랬더니 딸이 걸리는 거야. 세 돈짜리 해주려고 돈 모으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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