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노동조합과 노동쟁의, 인천항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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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노동조합과 노동쟁의, 인천항에서 시작됐다
  • 이희환 기자
  • 승인 2014.06.12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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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호 인하대 교수, <황해문화> 특별기고 통해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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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노동조합이 인천항에서 설립됐고, 노동쟁의도 인천항 두량노동자들의 파업이 최초라는 사실이 새로운 자료를 통해 밝혀져 주목을 끌고 있다.
 
인하대학교 경제학부 윤진호 교수는 지난 6월 1일 발매된 계간 <황해문화> 2014년 여름호(통권 83호)의 특별기고 [개항기 인천항 부두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이와 같은 사실을 처음 밝혀, 한국노동운동사의 잘못된 통설 기록은 재검토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제까지 학계와 노동계에 알려진 한국 최초의 노동조합은 1898년 함경남도 성진에서 부두노동자 47명에 의해 창립된 성진부두노동조합으로 알려져 왔다. 또 한국 최초의 근대적 노사분쟁도 같은 해 목포에서 발생한 부두노동자들의 쟁의로 기록돼 왔다. 1983년 발표된 이철우의 논문 [광무년간의 목포부두노동운동연구](<학술논총> 제7집, 단국대 대학원) 이후에 굳어진 이러한 통설은 이후 출간된 <한국노동운동사>(김낙중, 1970), <한국노동운동사1>(김윤환, 1982), <한국노동조합운동사>(한국노동조합총연맹 편, 1979), <한국노동운동사1>(강만길 외, 2004) 등 한국노동운동사를 다룬 일반통사 서적에서도 무비판적으로 반복돼 왔다고 윤 교수는 지적했다.
 
윤진호 교수.jpg
인하대 경제학부 윤진호 교수
윤 교수는 기존 연구의 이러한 통설이 잘못된 이유는, 대부분의 연구가 그대로 인용, 참고하고 있는 호소이 하지메(細井肇)의 책 <滿鮮の經營: 朝鮮問題の根本解決>(自由討究社, 1921)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1921년에 출간된 호소이 하지메의 책에는 노동조합에 대한 자료를 어떠한 방법으로 수집했는지 전혀 밝히고 있지 않은데, 주로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지해서 1921년의 시점에서 존재하는 노동조합을 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1920년 이전, 특히 1905년 이전의 개항기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사료비판을 가했다.
 
윤 교수는 호소이의 책을 벗어난 다양한 자료를 섭렵한 끝에 1892년 이전 시점에 이미 인천의 부두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주도한 노동파업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윤 교수가 제시한 자료는 인천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발간된 <조선신보(朝鮮新報)> 1982년 5월 13일자에 보도된 인천부두 두량군(斗量軍) 노동자들에 대한 아래의 기사다.
 
 
 두량군이란 것은 특별한 세금을 납부하고 인천항에서 일본, 조선 양국간에 미곡 수도(受渡) 때에 두량(斗量, 미곡의 양을 정확히 계량하는 일)을 하는 특허를 받은 일종의 노동자의 조합으로서, (...) 이들은 일본인의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으려 하며, 혹은 두량의 때에 공공연히 적대시하거나, 혹은 부정한 양을 재거나, 혹은 수뢰를 받으면 곡물 중에 불량품을 혼입시키는 등 그 폐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 만약 이들을 기피하면 이들은 일본 상인뿐만 아니라 조선 상인을 대상으로 해서도 때때로 파업(스트라이크)을 일으키는데 그중에는 조합이 선동하는 것도 많다. 이들은 대략 250명이 넘는 인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원을 두어 이를 통솔하고 있는데(이하 하략)
                     -<조선신보> 1982. 5. 12.(<황해문화> 83호, 2014년 여름호, 205쪽에서 재인용)
 
 
윤진호 교수는 위의 두량군 노동조합에 대한 기사를 근거로 1898년 목포쟁의보다 6년 이상 빠른 시기에 이미 인천항에서 부두노동자의 한 종류인 두량군의 노동조합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이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윤 교수는 위의 기록에 대해 “일본 상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조선신보> 기사에서는 이들(조선인 두량군)의 행위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그러나 당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종사했던 인천항 부두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당연히 투쟁을 전개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다만 윤 교수는 1892년부터 1906년까지 발간된 <조선신보>가 겨우 12호밖에 남아 있지 않아 좀 더 자세히 연구할 수 없게 된 것을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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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호만 남아있는 인천 발행 일문신문 <조선신보>
 
윤 교수는 “1883년에 개항한 인천이 1890년대 후반에 개항한 성진이나 목포보다 15년 정도 먼저 개항했을 뿐만 아니라 1884년부터 1905년 사이에 무려 30배 이상의 무역액이 증가해 전국 개항장 무역액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큰 무역항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인천에서 최초의 부두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노동쟁의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 교수는 <황해문화>에 수록된 논문을 통해 1905년 이후 발간된 <조선신문>(<조선신보>의 후신)의 기사자료를 통해 인천항 부두노동자들의 조직상황과 생존권 투쟁의 양상에 대해서도 새롭게 밝혀냈다.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윤 교수는 인천에서 발간된 <조선신보>를 비롯해 각지역에서 일본인에 의해 발간된 지역신문들의 번역작업이 이루어져서 한국노동운동사에 대한 보다 폭넓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교수의 논문을 통해 새롭게 제기된 한국 최초의 두량군 노동조합과 노동쟁의를 계기로, 학계에서 개항기 노동운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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