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장 어귀에서
(4)부대찌개의 비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가지가지 반찬들이 식탁에 깔려도 좀처럼 수저를 들지 않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습성이다. 밥그릇이 들어오고 마침내 김이 펑펑 나는 찌개가 올라와야 저마다 수저질을 시작하니, 밥과 찌개는 식탁의 주연배우라 할 만하다. 기실 밥이야 한결같은 모습으로 상에 오르기에, 멋없고 무뚝뚝한 남자 주연쯤 된다고 치자. 정작 식탁의 가운데서 오늘의 메뉴를 결정짓는 이 미친 존재감의 찌개는 그야말로 여우 주연이라 해야 할 것이다. 오늘 오르는 찌개가 무엇이냐에 따라 밥상의 흥행이 결판나는 상황이라, 저녁상을 준비할 때면 늘 이 여우 주연 캐스팅은 주부가 가진 일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찌개들 중에서도 그 태생과 존재가 사뭇 비범한 녀석이 있다. 부대찌개가 그것이다. 찌개라고 하면 지극히 보수적이요, 주부의 손맛에 판가름 나는 음식이라는 선입견이 강하건만, 이 부대찌개는 역시 가정식에서는 예외의 축에 속한다. 햄과 소시지라는 저 물 건너온 물건이 떡하니 냄비에 자리를 틀고 다짐육과 양념이 보조를 맞추는 이 이국적이기 짝이 없는 음식에, 토속적이기 그지없는 ‘찌개’라는 말이 붙어 있으니 넌센스가 따로 없다. 게다가 ‘(미군)부대’라는 말까지 찌개라는 단어에 들러붙으면, 전쟁통으로부터 기아와 주림을 벗어나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야 했던 기박한 한국의 근대사까지 찌개 국물에 녹아나게 된다. 그래서일까, 부대찌개라고 하면 가정식이라기보다는 회식이 먼저 떠오르고, 사회생활의 고단함을 풀어주는 ‘바깥 음식’이라는 선입견이 강하다.
기실 필자도 식구들을 건사하는 주부라지만, 그것은 내 반쪽의 삶이요, 절반은 당당한 커리어우먼이다. 그러니 바깥 음식으로서 부대찌개는 가정보다는 내 사회생활과 오히려 가까운 음식이다. 특히 오늘처럼 마음이 조금 허전한 날, 더욱이 내 옆에 살뜰하고 단란한 동료가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할 때면 더욱 구미가 당기는 음식점이 있다. 신흥동에서 부대찌개만 40년을 끓여온 단골 가게인데, 여느 부대찌개와는 다르게 맛이 특별하고 가게마저 운치 있어 하루 피곤을 풀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장소이다.
그래, 제법 노숙해 보이는 나무상에 세 종류의 김치가 깔리고, 구형 화로에 찌개 냄비가 오르면 오랜만에 가정식에서 탈출하여 당당히 ‘일탈의 음식’을 즐길 시간이 된다. 소시지와 통조림 콩이 걸쭉하게 어우러진 국물을 스테인리스 대접에 담긴 흰밥에 묻혀가며 떠먹는 풍미는 고상하지는 않지만, 친한 사람하고만 즐길 수 있는 각별한 맛이 있다. 눈치 보며 비위를 맞추고 온갖 셈으로 주판알을 튕겨야 하는 일상이기에, 이런 푸짐한 찌개를 맞이할 때면 체면 따위는 잠시 무장해제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백발이 성성하신 노년의 큰사장님이 찌개 냄비의 시작과 끝까지 옆에서 진득이 보필해주시니, 마음 한편에 담아둔 물큰한 사연도 동료들과 스스럼없이 풀어놓기 적당하다.
그런데, 기실 이 집의 부대찌개는 햄과 소시지가 전부가 아니다. 글을 쓰기 위해 사장님께 비법을 여쭈어보니 대뜸 식당의 지하로 내려가자고 하신다. 따라가 보니, 일대 장관이 펼쳐진다. 자그마치 김치냉장고 27대에서 한 해 끓여낼 김치가 익어가고 있었다. 목포에서 따로 공수한 배추와 무를 가을부터 3월까지 김치를 담가 1년을 숙성시킨다는 것이다. 또 한쪽 구석에는 6개월 치 수입 소시지가 쟁여 있다. 큰 부대의 PX도 감히 넘볼 수 없는 물량이니, 마치 일개 사단의 부식창고 같은 이 지하 창고의 위용에 가위 ‘부대’찌개라는 말을 절로 실감케 하였다.
창고의 사연을 물어본 즉, 깍두기, 짠지, 배추김치는 사다 쓰는 것이 아니라 가게의 정체성이 담긴 것이라 한결같이 담가 쓰는 것이요, 개운한 김치가 부대찌개의 맛을 보조하여 일층 깔끔하고 칼칼한 맛을 내기에 이렇게 김치냉장고를 동원하기 시작한 것이 27대에 이른 것이란다.“그러면 통조림햄은 왜 이렇게 쟁여두었습니까?”라고 묻자, 역시 부대찌개는 그 태생이 미군부대로부터 시작한 것이라, 애초에 사용한 그 햄만을 사용해야 제맛이 난단다. 까닭에 수입품인 관계로 언제나 구할 수 없기에 만반의 준비로 6개월 치를 한 번에 저장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통조림햄은 부대찌개를 시작한 40여 년 전부터 여자 사장님이 의정부까지 전철을 타고 공수하였던 ‘전통’의 재료요, 이 집으로 치자면 늘 구비해야 할 ‘전략물자’였던 셈이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집 부대찌개는 식탁에서 끓이는 것이 아니었구나! 이 집 찌개 국물은 이 가게 건물의 지하에서부터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일 년 동안 지하 창고에서 준비한 재료들이 기지개를 틀고 냄비에 오른 것이니, 손쉬운 인스턴트 따위와는 품과 수고를 감히 비교할 바 아니다. 이미 옛날 묵은지 같은 김치 맛에, 사다 쓰는 수입품과는 애초에 결이 다르다고 생각하였건만, 김치 하나에서부터 다른 부대찌개와는 완연한 차이가 난다. 게다가 이 집은 가족 삼대가 운영하는 가게라, 새벽부터 며느리 사장님이 육수통과 씨름하며 한우로 기본 육수를 우린다고 하신다. 조미료는 오직 햄에서 나온 것으로만 가미를 할 뿐이요, 나머지 김치와 육수는 모두 한식의 예전 방식을 따르니, 온갖 이국적 재료가 찌개를 채워도 그 든든한 베스는 엄연히 한식이 담당한다.
한편 이 집에서 찌개를 시킬 때면 여느 부대찌개와는 달리 시선을 압도하는 것이 있다. 바로 찌개 위에 손가락 굵기보다 더 큼지막하게 올라가는 ‘쇠등심’이 그것이다. 부대고기를 함께 하다 보니, 손님들이 먹던 부대고기를 찌개에 넣어 먹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아예 메뉴로 굳어버린 것이다. 특히 이 가게에 오는 사람들은 여느 부대찌개집과는 다르게 젊은 사람보다는 노숙한 중장년의 신사와 가족들이 주를 이룬다. 40년 단골들이 문턱을 쓸어가며 손님과 주인이 함께 만들어낸 메뉴가 바로 이 ‘등심 부대찌개’이다. 심지어 단골 중에는 햄과 소시지를 만드는 대기업 임원들도 있다고 한다. 그 독특한 풍미를 따라잡기 위하여 이 집 부대찌개를 상시로 방문한 것이 벌써 기십 년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한국 햄과 소시지의 근대화에 부대찌개가 일조하였다는 우스갯소리도 아주 빈말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찌개가 부대찌개라는 정식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얼마 안 된 일이다. 서슬 퍼런 80년대 군사독재 시절에는 감히 음식점 간판에 ‘부대’라는 말을 허용할 리가 없었다. 경찰공무이셨던 일대 사장님은 무려 유도 8단의 고수이신데, 이 가게를 창업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부대-찌개’라는 말을 간판에 달 수 있었다고 하신다. 바야흐로 부대찌개라는 이름에는 민주화와 문민정부의 탄생이라는 사연이 담긴 것이다. 그 사이 주방을 담당하시는 여자 사장님은 며느리를 맞이하고 어느 사이엔가 삼대가 운영하는 탄탄한 이 집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부대찌개라는 음식이 한국의 근대사와 어느 평범한 집의 가정사를 관통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겠다.
하지만 이 집의 비법은 따로 있다. 여기에도 썼다시피 이 집의 운영은 온 가족이 함께하는 것이라, 결국 식구들의 화목이 관건이다. 관록의 일대 사장님부터 우람하지만 섬세하기 그지없는 젊은 사장님과 며느리 내외분, 그리고 손주 세대가 다 함께 둘러앉아 식사하는 모습을 이 집 단골이라면 왕왕 볼 수 있다. 요즘처럼 죄다 떨어져서 정에 주려 사는 시대에 이 삼대가 함께 하는 식사 장면은 그야말로 80년대 드라마의 한 장면 같다. 게다가 세월이 묻어난 나무상과 구형 화구가 가게를 장식하고 있으니, 이 집 문을 열면 아련하고 단란한 운치가 가슴부터 녹여주는 맛이 각별할 뿐이다. 찌개를 끓이는 만반의 준비는 저 단란한 가족의 협심으로부터 온 것일 테니, 어찌 보면 이 부대찌개야말로 진짜 ‘가정식’이 아닐까. 동료와 정답게 식사를 마치고 찌개를 따로 포장해 달라고 하였다. 오랜만에 우리 집 식탁의 여우주연으로 이 단란하기 그지없는 부대찌개를 캐스팅해볼 심산이었다. 다음날 딸과 남편이 정답고 도타운 찌개를 마주하였다. 연신 푸짐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을 보면, 찌개는 정말 사람을 모이게 하고 마음을 이어주는 각별한 음식이 아닐 수 없다. 가화만사성, 찌개를 만들어준 저 식구들의 기운이 우리 가정의 식탁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