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강화 숭릉천
“벌들이 많이 줄었어요”
“바이러스인지 진드기인지 기후변화 때문인지~ 암튼 엄청 심각해요”
코로나 팬데믹으로 3년간 고려산 진달래축제가 열리지 않았다. 고려산 능선으로는 데크가 깔려있고 등산로를 따라 포털사이트 로드뷰를 확인할 수도 있다. 고려산에 진달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봄철 고려산 능선을 따라 울긋불긋 진달래도 좋지만 하얗고 빼곡하게 매달린 때죽나무꽃도 일품이다. 때죽나무도 많고 밤나무도 많다. 고려산 때죽꿀이 있다. 6월초 따는 때죽꿀은 옅은 황금색으로 많이 달지 않다. 에고사포닌이라는 마취 성분이 있어 때죽꿀은 통증 완화에 효과가 있단다. 에고사포닌의 독성으로 옛날사람들은 때죽나무 열매를 찧어 물에 풀어 기절한 물고기들을 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종 모양의 흰색 때죽나무꽃은 여러 개씩 빼곡하게 땅을 향해 핀다. 9월경 달걀모양의 열매가 열린다. 양봉꿀은 4월 벚꽃꿀을 시작으로 6월 아카시꿀과 때죽꿀, 7월 밤꿀, 8월 싸리꿀로 이어진다.
고려산을 빼고는 강화의 역사문화, 자연생태를 이야기할 수 없다. 1932년 박헌용이 편술한 속수증보강도지(보통 강도지)에는 고구려 연개소문이 강화도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선악(善惡), 현우(賢愚)와 별개로 당시 고구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유일한 중심인물이었다고 연개소문을 평했다. 고구려말 대막리지로 당태종 이세민을 패퇴시키고 중국대륙 진출을 시도한 연개소문의 이야기가 고려산이 남아 있다. 동서로 길쭉한 고려산에서 북으로 이어진 능선의 봉우리가 시루미산인데 연개소문이 여기서 태어났다고 한다. 시루미산 중턱에 연개소문이 살던 집터가 있었고 오련지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고 한다. 원래 자리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고려산 정상으로 향하는 군작전도로 옆에 오련지가 있다.
오련지 아래 고려산 북측 기슭에는 백련사가 있다. 백련사 계곡에서 숭릉천(崇陵川)이 시작된다. 본격적인 물줄기는 하도저수지에서부터다. 숭릉천은 강도지에 '오리천(五里川)'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고려산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 하포(蝦浦)로 들어가고 권필(權韠)의 옛 무덤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포는 적북돈대 인근으로 새우(蝦)가 유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권필은 조선의 대표 시인으로 강화에서 석주 초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다. 시와 술을 좋아했는데 세태를 풍자하는 시로 인해 국문(鞫問)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유허비가 하도저수지 인근에 남아 있다.
숭릉천 물줄기는 크게 넷이다. 백련사 계곡에서 시작되는 것, 하도저수지에서 시작되는 것, 그리고 북산에서 시작되는 것이 둘이다. 네 줄기 모두 48번 국도를 지나고 논을 만나면서 선명하고 완만해진다. 하도저수지를 거쳐 북으로 흐르던 숭룽천 물줄기는 홍의교회가 보이는 평지 들녘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튼다. 홍의교회는 강화의 두 번째 교회다. 1896년 강화의 첫 번째 교회인 교산교회의 영향을 받아 선교사의 도움 없이 토담집 예배당에서 신식교육을 시작했다. 초기 홍의교회 교인들은 한일(一)자가 들어간 이름으로 개명했다. 양반으로 선조가 지어준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을 것이다. 박능일, 권신일, 김경일, 주선일, 윤정일 등. 이들은 강화읍을 비롯하여 강화남부, 교동도, 석모도와 주문도 등 강화 전 지역의 교회를 개척했다.
숭릉천 유역에는 보호수가 많다. 고려산 밑으로 언덕(陵)을 따라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역사문화,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고인돌이 고려산 주변으로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천년고찰 백련사의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보호수이다. 보호수들 외에도 주변의 사찰림도 울창하다. 개구리와 두꺼비 등 양서류와 파충류 등 안정된 숲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강화는 물론 인천의 어느 숲에도 뒤지지 않는다. 고려산 북쪽 계곡물이 하도저수지를 만나는 곳의 느티나무는 큰 가지가 부러졌지만 그 위용은 저수지 어디에서도 그 존재를 알수 있을 정도다. 강화에 있는 소나무 보호수 3그루 중 하나인 하도2리마을회관 옆 소나무는 수억원짜리 조경수 못지않다. 하도리 주민들이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며 정성을 다하는지 알 수 있다.
충신 황선신 정려문 앞을 지키고선 느티나무도 북산 아래 대산리 마을의 중심이고 상징이다. 역광이라 비로소 정려문 앞에 서야 느티나무임을 알 수 있다. 황선신은 병자호란 때 갑곳진에서 전사했다. 장졸들이 우왕좌왕하고 도망치기 정신없을 때 분투하다가 전사했고 효종이 즉위한 후 병조참의를 제수하여 정려(旌閭)하고 배향하게 했다. 느티나무에서 충신의 의기를 느껴진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대산리 고인돌에서 강화가 삼국시대를 훌쩍 뛰어넘는 역사를 품고 있음을 증명한다. 굄돌이 쓰러져진 고인돌에서 바라본 건너편 언덕마을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나무가 있다. 역시 보호수인 신당리 느티나무다. 고려산에서 흘러내린 언덕들에서는 지금도 보호수의 마을들이 있고 언덕 사이로는 물이 북녘을 향해 흐른다.
숭릉천은 농수로이기도 하다. 또 밀물 때 빗물을 가두는 유수지이다. 주변의 드넓은 논에 농업용수를 공급해야 하는데 고려산에서 흘러내린 계곡물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숭릉천 겨우내 빗물을 가두었다고 농번기 논에 물을 공급한다. 그래도 부족한 논물은 저수지에서 공급받는다. 동으로 동으로 드넓은 평야를 지나던 숭릉천은 대산저수지라고도 하는 숭뢰저수지 옆을 지나 조강으로 흘러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