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외교 무대의 실력자, 최동진 대사

[인중제고 사람들] (36) 최동진 전 국제해사기구(IMO) 의장 - 김윤식 /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

2024-05-13     김윤식
근래의

 

- 경수로사업지원기획단 단장에 임명되다

지금도 최동진(崔東鎭, 1935~ ) 전 대사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1990년 중후반 대한민국 외교관으로서 최 대사가 두 가지 국제적 관심이 쏠리던 외교 사안의 중심인물로 등장해 국내외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외교적 사안의 하나는 최 대사가 1995년 1월 23일에 발족한 경수로사업지원기획단 단장으로 임명된 것이고, 또 하나는 1997년 11월 17일, 국제해사기구(IMO) 의장으로 선출된 사건이었다.

경수로사업지원기획단은 미국과 북한이 1994년 10월에 맺은 ’제네바 합의‘ 이행을 위해 탄생한 코리아에너지개발기구(KEDO) 설립에 따라 제반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통일부 안에 설립한 기구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직접적인 국가 안보와 국익이 걸린 중대한 사업일 수밖에 없는 북한 경수로 건설사업에 한국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수로사업지원기획단은 그 같은 목적 위에 설립되었고, 그런 만큼 정부는 누구보다 치밀하고 빈틈없는 인물을 골라야 했을 것이다. 거기서 발탁된 적임(適任) 인물이 ’우보형(牛步型)으로 매사를 꼼꼼하게 챙기고 신중하면서도 실무적‘이라는 평가를 받던 최동진 대사였고, 최 대사는 차관급으로 승진해 경수로사업지원기획단장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코리아에너지개발기구(KEDO)

 

당시 조선일보도 ’세련된 외모에 영어와 일어에 능통하며 국제회의 참가와 특별히 국제적으로 민감한 협상 건에 대해 침착하다는 중론 등으로 해서 북한은 물론 미국, 일본과의 물밑 교섭이 예상되는 경수로단장직에 적임자로 평가된다‘는 기사를 내놓은 것이다.

거기에 최동진 대사가 임명 직전인 1993년, 외무부 1차관보에 임명된 후 북·미 제네바 합의 도출과 함께 북·미 합의 당시 북한에 한국형경수로(韓國型輕水爐) 설치를 관철시키는 등 외교적 능력과 수완을 발휘한 전력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도 더 훨씬 오래전인 1964년, 최 대사가 외무부 3등서기관 시절에 오스트리아 제8차 국제원자력기구 연차 총회에 우리나라 대표 보좌관으로 참석하는 등 원자력기구 사업 관련한 국제 흐름을 경험했던 것 역시 가(可)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2003년에 들어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고, 2006년 경수로 건설공사 인력이 철수함으로써 결국 폐기되어 한낱 역사의 페이지 속에 묻혀버리고는 말았으나, 오늘날도 북한의 핵 개발이나 경수로사업을 운위할 때는 이렇게 최 대사의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네바 합의‘ 중 경수로사업의 골자는 당시 북한이 평안북도 영변에 세운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는 대신 함경남도에 2기의 경수로를 건설해주고, 그 건설 기간 동안 필요한 대체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것이었다. 또한 국제 컨소시엄 형태의 KEDO에는 설립 국가인 한국, 미국, 일본 3국을 포함한 12개국과 EU가 회원으로 속해 있었다는 내용이다.

 

 

- 국제해사기구 총회 의장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이다

또 한 가지는 최동진 대사를 국제적인 외교관으로 세계에 널리 알린, 국제해사기구 총회 의장직 수행이었다. 최 대사가 주영국 대사 시절이던 1997년 11월 17일, 국제해사기구(IMO) 제20회 총회에서 155개 전체 회원국 대표들로부터 만장일치의 찬성을 얻어 임기 2년의 총회 의장에 선출되었던 것이다. 국제해사기구는 해상 안전과 해양 환경보호에 관한 해사업무(海事業務)를 다루는 UN 전문기구로서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다.

생각해 보면, 최 대사의 IMO 의장 피선 사실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정부가 추진해온 세계화 정책과 더불어 높아진 한국의 국가적 위상과 함께 최 대사의 외교관으로서 경륜, 그리고 그가 외교 무대에서 쌓아온 국제적 신망이 더해진 결과라는 점이다. 더불어 한국인 최초로 UN 전문기구 의장직을 수행한 사실에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세계적 차원의 주요 문제 논의에 한국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는 최 대사의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 중에 밝힌 소감은 다시 말해, ‘해운국으로서 위상 제고와 IMO 내에서의 발언권 강화 등으로 우리나라의 이익 보호는 물론 국제 해사 분야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솔직히 ‘우리나라의 이익 보호’ 측면에서 본다면, ‘IMO에서 논의되는 국제기준의 동향을 신속히 파악해 국내 해운 조선산업을 지원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기회였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소리 없는 국제 외교 전쟁이라는 말은, 이렇게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각국 외교관들이 벌이는 치열한 ’경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런던이라고 하면 해양, 해운의 세계적 중심지로서 국제적 거물 외교관들이 부임해 있던 영국의 수도가 아닌가.

그 같은 상황에서 최 대사가 글로벌시대 물류의 최대 수단인 선박과 해양 환경 등 해사업무를 논의하는 중요한 IMO 총회 의장 직책을 맡은 것은 실로 다행이었음을 거듭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1997년 10월, 11월 무렵의 시기는 우리나라가 조선(造船) 수주 세계 1, 2위 자리를 놓고 일본과 경쟁하던 때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때 더욱 그 같은 생각이 든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최동진 대사는 ’우보형(牛步型) 인물‘이란 평을 듣는다. 외무고시제도가 없던 1960년 외교관 채용 시험을 통해 주사급(主事級)으로 외무부에 들어와 1993년 외무부 1차관보 임명에 이어 1995년에 차관급인 경수로기획단장에 승진한 것을 두고 나온 평가일 것이다. 그러나 외무 공무원 35년 동안 소걸음처럼 느리기는 해도, 외길을 성실히, 묵묵히 걸어온 최 대사에 대한 상찬(賞讚)의 인물평이었다는 생각이다.

 

 

-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수정'시킨 교섭력

최 대사의 해외 공관장으로서의 경력만 꼽자면, 1985년 주케냐 대사(스와질란드 대사 겸임)를 시작으로, 1986년 주레소토 대사, 1990년 주스웨덴 대사, 그리고 1996년 주영국 대사 등을 꼽을 수 있다. 물론 영사나 참사관, 서기관 같은 직책으로 해외에 근무한 경력은 제외한 것이다. 그 외 국내 근무 경력 중에 기록한 몇 가지 외교사에 기록될 성과와 공로를 살펴본다.

1980년 최 대사가 외무부 아주국(亞洲局) 심의관 시절에는 한일대륙붕공동위원회에 우리 측 대표를 이끌기도 했으며. 이해 12월 5일 일본 내 반한(反韓) 분자들이 요코하마 한국총영사관에 난입한 사건에 대해 주한일본공사를 불러 이 사건이 ’우리의 외교특권을 침해한 중대 사건임을 들어 엄중한 항의와 함께 사태의 주모자 색출, 의법 조치와 재발 방지‘를 강력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최 대사의 탄탄한 교섭 능력이 발휘된 것은 1981년 외무부 아주국장으로 승진한 시절이었다. 이해 9월에 서울에서 열린 제11차 한일각료회담에서 타결이 무산된 60억 달러 규모의 대한(對韓) 경제협력안을 40억 달러 규모로 매듭짓는 협상력을 보인 것과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서 고질적인 문제인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 등을 담판 지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교과서 왜곡문제에 있어 최 대사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 외교 사상 처음으로 유감 표명과 함께 교과서 수정 약속을 받아내었다는 사실이다. 1982년 8월 31일 당시 최 대사는 아주국장으로서 주한일본공사를 외무부로 불러 ’교과서 검정기준의 조속한 개정과 개정 내용의 통보, 이미 검정이 완료돼 83년부터 사용되는 교과서에 대한 개정 검정 절차를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취할 것, 결과 조치로서 취해질 현장 교육 지침의 신속한 시행 및 그 내용을 통보할 것‘ 등 3개 항을 요구했고, 결국 일본이 이에 응했던 것이었다.

 

외무부

 

1994년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벌목장을 탈출한 북한 벌목공들의 귀순 문제가 대두되던 때였다. 또 북한과는 남북대화와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 수용을 유도하던 시점이기도 했다. 미묘한 시기였지만, 당시 외무부 1차관보였던 최 대사는 북한 벌목공들의 귀순을 받아들이기로 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러시아로 날아가 러시아 측 실무책임자들과 협의를 가진 뒤, 모스크바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대표와도 만나 협조를 요청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 4번 만난 영국 엘지자베스 2세 여왕

최동진 대사는 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에 대한 추억을 1999년 4월 13일 자 경향신문에 「늘 잔잔한 미소… 친할머니같이 푸근」이란 제호로 기고한 적이 있다. 4월 19일로 예정된 영국 여왕의 우리나라 첫 방문을 6일 앞두고서였다. 최 대사는 공교롭게도 여왕의 방한 예정 달포 전인 3월로 임기를 마쳤다.

 

필자는 외국인으로서는 유달리 여왕을 만날 기회가 많았던 편에 속한다. 여왕이 주최하는 여러 연례행사나 한국기업의 공장 준공식에서 매년 여러 차례 만난 것 외에 버킹검 궁에서 독대할 기회만 네 번이나 있었다.

이 중 두 번은 대사와 신임장 제정 행사에 각기 수행을 해서 갔을 때였고 세 번째는 필자 본인의 신임장을 제정하기 위해서, 네 번째는 지난달 초 이임 인사를 하러 갔을 때다.

96년 신임장 제정 때 여왕이 “60년대나 80년대에 비해 어떤 변화가 눈에 띄느냐.”고 묻기에 “눈에 보이는 것은 달라진 게 많으나 볼 때마다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되는 느낌만은 전혀 변화가 없다”고 대답했더니 파안대소한 일이 있었다. 그날 여왕이 웃음소리가 세 번이나 방 밖에까지 들려 모두들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궁금해할 정도였다.

여왕과의 대화는 정치성을 띠기보다는 가족 관계 등 일상생활과 관련된 화제가 대부분이지만 이임 인사 때는 방한을 앞두고 있던 때라 한국의 전반적 사정에 관한 관심을 보였고 일정에 관련된 질문도 많았다. 북한의 굶주림 등 북한 사정에도 궁금증을 보여 자연스럽게 북한 정세나 한반도 사정에 관해 설명할 수 있었다.

신임 또는 이임 때 대사는 연미복(신임장 제정 때)이나, 모닝코트(이임 인사 때)를 착용해야 하며, 따라서 매우 공식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이다. 대화 도중 여왕이 부군을 공식 호칭인 필립공(Prince Philip) 또는 에딘버러 공작(Duke Edinburgh)으로 부를 수 있겠지만 그저 서민적으로 ’내 남편(my husband)‘이라고 부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여왕의 이번 국빈 방한은 한․영 관계에 있어 최대의 경사라 아니 할 수 없다. 여왕은 1년에 대체로 두 나라(금년에는 상반기에 한국, 하반기에 영연방 정상 회의룰 겸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방문)만 국빈 방문하기 때문에 여왕 생전에 다시 방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왕은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 등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나라는 방문하지 않으며 경제적 혼란에 빠져 있는 나라도 방문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따라서 이번 여왕의 방한은 국제 신용 평가기관에 의해 한국의 신인도가 올라가는 것보다 더욱 값지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의 국가수반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 대사급 외교관들만의 특권과 특별한 경험이 흥미로워 길게 인용했다. 2022년 9월에 타계한 영 여왕의 생전, 의전적 자리에서도 권위적이지 않은, 친절하고 소탈한, 제목 그대로 “친할머니 같은 푸근한” 면모가 퍽 인상적이다. 또 한편 최 대사는 1997년에 자동차 사고로 운명한 다이애나 전 왕세자 비의 장례식에도 우리나라를 대표해 조문 사절로 임명되기도 했다.

 

1996년

 

- 스승 조병화 시인 앞에서 암송한 시

최동진 대사는 3년제 인천중학교 1948년도 1회 입학생이다. 중학 시절 은사인 고 조병화(趙炳華) 시인과의 유별난 사연도 있다. 그 내용은 조 시인이 생전에 쓴 「시상(詩想) 노트」에 실려 있다. 조병화 시인이 1991년 가을, 북구라파 여행 도중 스웨덴에 주재하고 있던 최 대사를 만나 있었던 이야기다. 다음 인용문은 조병화 시인의 「시상 노트」의 부분이다.

 

인천중학교 물리 선생으로 초청되어 갔었습니다. 인천중학교에 부임하던 학기엔 상급 학년의 물리 선생을 했고, 다음 학기부터는 하급 학년의 대수 선생을 했습니다. 선생님들의 부족으로 담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담임하던 학급 생들에게 용기와 꿈과 근면한 학업 정신을 길러 주기 위해서 이 시 「출발」을 써서 교실 한복판 흰 벽에 붙였던 겁니다.

그리곤 잊고 있었는데 작년(1991년) 가을에 북구라파 여행을 하던 길에 만나게 된 스웨덴의 최동진(崔東鎭) 대사의 입을 통해서 그 사실을 추억하게 되었던 겁니다. 최 대사가 포도주 몇 잔을 들곤 이 시를 좔좔 암송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내 그 시를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니 하는 고마운 생각에 나도 눈물이 나와버렸던 겁니다

 

1940년대 말 인천중학교 생도 때에 외운, 비록 짧은 시이기는 해도 가슴에 간직했다가 1991년, 무려 40여 년 만에 옛 은사 앞에서 암송한 것이다. 최 대사의 품성을 짐작할 수 있다. 최 대사가 조병화 시인 앞에서 외운 시 「출발」의 전문은 이러하다.

 

저 봉우리를 올라가야

해돋이를 보겠기에

나도 미투리를 삼아 신고

신작로로 나섰다.

 

최동진 대사는 인천중학교 시절 또 다른 두 분 은사가 있었다. ’의(義)와 용기(勇氣)를 일깨워 주시던 길영희(吉瑛羲) 교장 선생님과 어짐과 단정함을 가르치신 이인수(李仁銖) 선생님이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나오고, 런던대학에서 수학하면서, 관직에 있던, 그 어느 날에도 은사의 말씀을 잊지 않았다.

인제대 석좌교수를 지내면서는 후학 양성과 함께 우리나라 외교의 ’방향‘ ’정도(正道)‘에 대해 쓴소리,.직언도 마다하지 않던 외교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