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으로 겨울을 맞이하며

[학산 味談 - 바다를 담다] (13) 까나리 - 슴슴하고 개운한 백령도식 메밀냉면에 맛을 더하다

2024-08-02     미추홀학산문화원

 

인천in이 미추홀학산문화원과 함께 인천 음식이야기를 연재합니다. 1부는 ‘바다를 담다’를 타이틀로 인천 앞바다에서 잡히는 바다고기 13종을 주제로 음식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2부에서는 ‘인천의 입맛을 찾다’를 주제로 바다와 관련이 깊은 인천 음식의 인문지리적 정체성을 찾아나섭니다. '미추홀 살아지다' 시리즈로 출간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부 인천 음식이야기 기획은 미추홀학산문화원, 스토리 채집은 '학산미味담식회'(정형서 미추홀학산문화원 원장, 고재봉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강사, 김상태 (사)인천사연구소 소장, 천영기 전 학산포럼 대표, 정현숙 미추홀학산문화원 부원장, 조지형 전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집필은 고재봉 강사, 사진은 김상태 소장, 천영기 전 학산포럼 대표, 류제혁 '삼촌네 사진관' 대표)가 참여했습니다.                                                              

 

눈발이 분분히 날리면 설레는 것이 온다. 가게마다 온통 붉은 깃발이 펄럭이고 입간판에 겨울냉면 개시라는 글자가 떡하니 걸려있으면, 겨울은 비로소 덩그런 냉면 사발 속에 담겨 오는 것이다. 때로는 한밤중 방구들 절절 끓는 아랫목에서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먹어도 좋다. 독한 소주를 일단 한 컵 따라 꿀떡이고 육수를 들이키는 것은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선주후면(先酒後麵)의 법도이기도 하다. 독한 소주를 목으로 가득 넘기고 얼음 저벅저벅 한 냉면 국물을 속이 후련하도록 들이키면, 겨울 공기마냥 가슴이 쨍하다는 예찬(한은영, 조선일보, 2015.2.5.)처럼 냉면은 겨울이 제격인 음식이다.

요즘 냉면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간혹 서울에서 유행하는 소위 평양냉면을 제일로 치는 이가 있다. 하지만 정작 해방 전 평양 출신의 냉면 예찬론자였던 소설가 김남천은 서울냉면을 미덥지 않게 여겼다. 제 고향 특산을 으뜸으로 꼽는 것이야 지극히 자연스런 발로일 테고, 특히나 반지빠를 정도로 팔도 특산을 흡수하여 세련되게 내놓는 서울 생리가 김남천 눈에는 곱게 보이지 않았을 터이다. 하긴 같은 시절 작가였던 이태준은 오히려 평양을 방문하여 먹은 냉면이 멋없다며 까탈스러운 입맛을 드러내기도 하였으니 유독 냉면이라는 음식에 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엄격한 잣대가 들러붙었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꿈속에서 사랑하고픈 이상형이 그러할 테니, 냉면 좋아하는 이들에게 냉면에 대한 콧대와 자부는 늘 천정부지가 따로 없다.

그러니 간혹 평양식이나 함흥식을 본류로 잡고 나머지 냉면은 아류로 얕잡아 보려는 경우가 있어 좀 섭섭하기도 하다. 고장마다 특선이 있고, 시절이 변하면 음식도 변하기 마련이다. 인천의 경우도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냉면이 있는데, 이는 황해도식 냉면에 연원을 둔 것이다. 다른 냉면도 아닌 황해도 냉면이 유독 인천에 자리를 틀고 있는 데는 지척에 고향을 두고도 가지 못하는 황해도 실향민들의 애끓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러니 이 음식도 절절한 사연과 깊은 향수가 스며있는 소중한 음식이다. 특히 해주냉면도 그렇거니와 물산이 풍부하고 돈이 많이 돌았던 개성에서도, 냉면은 올라가는 꾸미가 화려하고 그 유명한 개성만두와 더불어 먹는다고 하여 국수계의 자웅을 겨룰만하였다. 그러던 것이 저 평양의 것은 수도 서울에 자리를 틀고, 황해도의 것은 지척인 인천으로 이사 온 것이다. 음식도 피난살이로 복잡한 가계를 이루게 된 셈이다.

 

백령도식
백령도
백령도

 

그런데 특기할 점은 이 인천의 황해도식 냉면집 간판에는 유독 백령도처럼 옹진군도의 지명을 표방한 곳이 많다는 점이다. 황해도와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백령도 일대이니 짐승도 죽기 전에는 제 고향을 바라본다고, 음식의 향수 조금이라도 고향과 잇닿고 싶은 마음,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향수 말고도 또 하나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백령도에서 수확하는 좁쌀만 한 크기의 메밀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 역시 황해도 출신의 할머니 밑에서 냉면을 먹으며 자랐는데, 늘 해주시던 말씀이 백령도 메밀에 대한 선망이었다. 이북 메밀에 준할 정도로 향이 강하고, 특히 추운 지역에서 수확하는 메밀은 나름의 찰기가 있어 국수 소용으로는 제격이라는 것이다. 통상 메밀면이라고 하면 입술만 대도 국수 오리가 툭툭 끊어지는 것을 일반으로 아는데, 추운 지방에서 자랄수록 국수에 은근한 탄성이 붙는단다. 백령도는 남한 북방 한계선에 준한 위치이므로 이곳 메밀로 제면을 하는 것은 메밀면 중에 가위 으뜸이라 말하여도 손색이 없다.

하여 우리가 찾은 집도 바로 그러한 내력을 품은 냉면 가게였다. 겨울에 먹는 메밀면이 더 향이 짙고 감촉이 유난하다는 주인의 말처럼 백령도 메밀면은 그 진가를 톡톡히 보여주는 절품이다. 직접 방아를 돌려 정미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 껍질만을 다시 내려 메밀가루에 섞는 방식을 취한다. 메밀이라는 놈은 껍질을 까면 그 구수한 향취가 잠깐의 틈을 허락지 않고 휘발해버리는데, 그 향취의 본령인 껍질을 정제하여 국수에 첨가한 것이다. 말이야 그럴듯하지 이걸 가게에서 직접 메밀을 까불린다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당장에 백령도 메밀을 수매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인데, 그 재료의 생리까지 터득하여 국수를 뽑는 주인은 과연 백령도 토박이라 할만하다. 메밀 향이 아주 강하면서도 조금 더 가는 면을 뽑아, 풍미와 감촉을 더한 것은 수고를 아끼지 않는 집념의 산물인바, 국수 가락 이야기만 들어도 머리를 조아릴 지경이다.

그런데, 인천 냉면은 황해도 냉면이면서도, 또 나름의 변주가 들어간다. 인천 냉면집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까나리 액젓. 기실 예전에는 조선간장을 조금 풀어 쓰기도 하였고, 어물이 풍부한 인천인지라 곤쟁이젓을 달여 그걸 가미하여 얕은맛을 살리기도 하였다. 이 얕은맛이 황해도 냉면의 개성인데, 한 이십여 년 전부터 까나리 액젓이 간장을 대신하였다. 워낙 까나리가 지천인 백령도이기에 가능한 것인데, 조금의 잡어도 허용치 않고 순수 까나리로만 내려 액젓이 달고 시원하다. 그러니 얼핏 냉면에 액젓을 첨가하는 일이 넌센스 같아도, 그 얕은맛을 끌어올리는 방법은 일층 진화한 것이다. 그렇다고 육수에 슬쩍 사정을 둔 것도 아니다. 쇠뼈로 우린 육수는 여전히 그 모범을 잘 지키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점이 참 마음에 든다. 소위 원조라 하여 옛것을 고집하는 것도 좋지만, 그 지역색을 적절히 더하는 방법, 큰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되 제 색을 가지려는 방식은 이제 황해도 냉면의 분파에서 어엿한 백령도 냉면으로 당당히 설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과연 인천 냉면은 어디다 내놓아도 손색없는 명물이다.

 

까나리
까나리

 

다만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맞장구를 쳤던 것은, 정작 사람들이 냉면을 여름 음식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아쉬움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옛날 냉장고도 없던 시절 고기 삶은 육수며 동치미며 만드는 족족 쉬었을 터이고, 한여름 메밀로 국수를 만드는 일은 더욱 가당치 않은 일이다. 차디찬 육수며 메밀이며, 그 위에 올려 먹는 김치와 산짐승의 꾸미까지 냉면은 말 그대로 겨울 음식의 대표주자이다. 하지만 이제는 여름이면 길게 줄을 서서 먹어도, 겨울에는 오히려 가게가 한갓지니 북극 음식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시인 백석 역시 국수라는 작품에서 겨울냉면을 예찬하였는데 냉면 대접을 마주할 때면 나는 꼭 이 작품을 떠올린다.

 

,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굴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의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백석, 국수)

 

아르굴이란 아랫목의 평안북도 방언이다. 과연 시인의 고장에서는 아랫목 쩔쩔 끓는 방안에서 아버지는 왕 사발, 자식은 새끼 사발에 그득히 담긴 냉면을 들이켰던 것이다. 유독 추운 날을 골라 겨울냉면을 들이키는 이 북방의 쾌미를 에어컨 바람 밑에서 피서용으로 먹는 냉면 맛과 견주는 것은 가당치 않다.

기왕의 겨울냉면 이야기가 나와서인데, 나는 여기서 또 다른 겨울 음식 하나를 발견하였다. 백령도 토속음식인 짠지떡이 그것이다. 메밀과 찹쌀로 두툼하게 만든 피 안에 김장김치와 섬에서 나는 자그마한 굴로 소를 채운 것이다. 특히 이 굴은 백령도에서 할머니들이 갯바위에서 캔 것이라는데, 유난히 향이 강하다. 이북과 가까운 섬 동쪽의 굴 맛이 각별하여 꼭 그쪽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만두도 떡도 아닌 그 중간 모양의 것을 쪄서 접시에 내올 적에는 들기름까지 가득 발라 내놓는다. 메밀에 시큼한 김치에 제철 굴과 들기름의 향까지 더해져, 향취의 앙상블이 압권이다. 모양은 토속적인데 한 번 빠지면 결코 잊기 어려운 매력이라 냉면과 함께해도 좋고, 술안주로도 그만이다. 왜 김치가 들어갔는데, 이름이 짠지떡이냐고 주인께 여쭈니, 백령도 방언으로 짠지는 김치를 말하는 것이란다. 그러면 김치가 아닌 짠지는 무엇이라 부르냐 되묻자, “짠지는 짠짠지라 답한다. 백령도 말씨를 무릎을 치며 배우는 순간이다. 나는 이제 봄 여름이면 잘 익은 짠짠지를 물에 타서 먹고, 겨울이 되면 잘 익은 짠지와 굴이 들어간 짠지떡을 찾게 될 것이다.

 

짠지떡
짠지떡,
배추김치
무우김치

 

눈이 풀풀 날리는 날 냉면 대접을 마주할 수 있어서 올해 겨울맞이는 아쉽지 않았다. 바람이 쌀랑이는 날이면 황해도에서 내려오신 할머니를 떠올리며 어느 틈바구니엔가 필자는 또 냉면집 앞을 서성일 것이다. 주인 말씀으로는 이렇게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하게 된 것이 모두 그런 실향민들 덕분이라 공을 돌린다. 전쟁 통에 백령도에서 정미소를 하셨던 선대께서 실향민을 제법 도우셨던 모양이다. 수십 년 전 일임에도 그 도움을 잊지 않고 여전히 찾아와 냉면을 드시는 분들이 있다는데, 겨울보다 차디찬 분단의 벽이 만들어낸 야속한 사연들이다. 저 한스러운 벽은 언제쯤 허물어질 것인가. 답답한 속을 그저 이 냉면 대접으로 달래야 하는 분들이 여전히 많다고 하니, 냉면 그릇에는 언제나 실향의 공복이 담겨있다. 그 속을 달래느라 오늘도 냉면집에서는 메밀가루 분분히 날릴 것이며, 김이 펑펑 나는 솥에서는 쇠뼈 삶는 냄새 자욱이 진동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