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장애인을 돌보며

[소통과 나눔의 글마당] 유성숙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

2024-08-14     유성숙
시민의 신문 <인천in>이 인천노인종합문화화관과 함께 회원들의 글쓰기 작품(시, 수필, 칼럼)을 연재하는 <소통과 나눔의 글마당>을 신설합니다. 풍부한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고, 글쓰기 훈련을 통해 갈고 닦은 시니어들의 작품들을 통해 세대간 소통하며 삶의 지혜를 나눕니다.  

 

 

그녀는 딸과 둘이 살고 있었다. 임대아파트 12평에서. 안방과 작은 방, 골목처럼 좁은 복도 끝에 위치한 싱크대와 화장실이 있는 집이었다. 그분의 키는 155cm 정도였는데 개그우먼 이영자처럼 뚱뚱했다. 그녀의 생김새는 1970년대 못난이 인형 삼 형제 중에서 심술궂게 생긴 인형을 많이 닮았다. 알고 보니 선천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시골에서 다섯 살 어린 나이에 놀다가, 쌓아놓은 나뭇가지에 찔려서 그리된 것이라고 했다.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을 때 선천적인 장애보다 후천적인 요인으로 인한 장애의 비율이 훨씬 높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분처럼 다치거나 아니면 교통사고 등으로 하루 아침에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실습 시간에 눈에 가리개를 하고 장애 체험을 해본 적이 있다. 옆에 다른 사람을 잡고 가까운 거리를 걷는 일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앞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컸었다.

나의 아래층은 어머니가 사셨고 나는 윗층에 살았는데 친정 어머니를 돌보다 보니 요양 보호사 자격증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야간으로 학원에 다니면서 시험 준비를 했다. 공부하는 중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길병원을 거쳐서 집 근처 요양병원으로 모신지 삼 개월 만에 어머니는 홀연히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내가 눈이 안 보이는 장애인의 집에서 했던 일은 일주일에 한 번 장콜(장애인 콜택시)을 불러서 그분을 모시고 시각복지관에 가는 것이었고, 국이나 반찬 만들기와 청소하기였다. 하루에 세 시간씩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을 했다.

그분은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다른 면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한 번은 주방에서 야채를 써는데 귀찮은 생각이 들어서 부엌칼 대신 과도를 사용한 적이 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더니 대번에 “큰 칼을 쓰지”하는 것이었다.

시각복지관에서 그녀는 컴퓨터 공부를 하였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도서실에서 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고, 수업을 마치는 시간에 맞춰서 장콜을 불렀다. 그녀의 20대 딸은 무슨 사정인지 내가 그녀의 집에 머무는 동안에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았다. 그녀는 상담사가 집으로 오게하여 딸에게 개인 상담을 하게 해줄 정도로 자식 교육에 마음을 썼다. 젊은 시절에는 안마사 일을 하셨다고 했다.

그녀는 눈이 안 보이는 대신에 청각과 촉각이 특히 예민하여 욕실 타일을 만져보고 청소 상태를 알 정도였다. 지금 돌아보면 참 부끄러운 실수가 있었다. 언젠가 명절이 다가올 무렵 그 집에서 야채를 넣고 부침개를 하게 되었다. 주부라고 모든 걸 할 줄 아는 건 아니지만, 뭐든지 작은 양만 해보았던 나에게는 비율을 맞추는 일이 쉽지 않았다. 물과 부침가루와 야채를 적합하게 만들어서 부치는 일이. 지금 같으면 인터넷을 검색해서 가능한 얇게 부쳐서 점수 좀 땄을 텐데 그분이 내린 평가는 이러했다.

“부침개를 하라고 했더니 방석을 만들었어.”

어머니를 좀 더 편안하게 돌보려고 시작했던 공부 끝에 따게 된 요양보호사 자격증은 이렇게 몇 년간 다른 분들을 위해서 활용했다. 혼자 살던 여자 어르신, 다리가 불편했으나 똑 소리나게 가사 일을 가르쳐주셨던 분,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항상 고마워하셨던 분, 침상에서 누워만 있었던 일본 교포분까지. 그분들을 돌보면서 배운 점도 많았다. 내가 몸으로 체험하고 배웠던 인생 공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