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누릴 자격을 갖춰야 행복할 수 있다

[최원영의 책갈피] 제171화

2024-08-26     최원영

 

 

저는 사랑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또는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꽃을 귀하게 여기고 있다면 꽃을 사랑하는 겁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있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우리는 말이나 행동을 신중히 하게 되고, 그것이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들어줍니다. 어느 누구나 자기 자신을 귀하게 대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그 대상을 좋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그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 표현하는 방식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습관’이라고 부르고, 이 습관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사람들은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귀하게 여기는 대상에게 우리가 말과 행동을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인격의 높고 낮음이 결정됩니다.

이렇게 내가 무의식적으로 불쑥불쑥 나오는 나의 표현들이 바로 나의 인격의 수준이고, 그것이 바로 나의 품격의 높이를 세상에 내보이는 것입니다.

《지혜, 함께 가자》에 어느 광신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청년이 위대한 수행자 라마누자를 찾아가 “저는 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 비결을 일러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라마누자가 그 청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누구를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저는 이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라마누자는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참사랑의 실천이 뭔지도 모르는 청년이 무척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자네는 이웃이나 형제도 사랑하지 않는가?”

청년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이웃이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세속적인 일이 아닌가요?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신의 뜻만 따르면 될 겁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신의 가르침은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은 아닐까요?

잘못된 믿음은 이처럼 사람을 멀리하고 신만 추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이비종교가 판을 치고 있지는 않을까 싶습니다.

인격, 즉 그 사람의 품격은 사람들을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사랑하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물론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자연이나 무생물까지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야말로 높은 인격의 소유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는 세상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게 없을 겁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진정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행복을 누릴 자격을 갖춘 사람이지 않을까요.

독일 철학자 칸트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복을 누릴 자격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칸트의 이 말은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만, 그 행복을 가지려면 가질 수 있는 자격을 갖춰야만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곧 ‘인격’이고, 인격은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들을 ‘귀하게’ 여기는 사랑의 실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