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불러 지구별에 온 시인, 김영승

[인중제고 사람들] (56) 김영승 시인 / 유사랑 시사만평가, 자유기고가

2024-09-30     유사랑

 

시인이란 칭호가 왕관처럼 어울리는 남자

Don’t Try, 애쓰지 마라!

미국 3류 인생들의 계관시인으로 추앙받는 ‘찰스 부코스키(1920~1994)’의 묘비명이다. 고독하게 生을 살다간 부코스키는, 더 나은 불확실한 미래를 담보로 오늘을 채찍질해대는 생활방식을 포기하는 대신, 확실한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소비하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평생을 애쓰며 살았다. ‘애쓰지 않기 위해 평생 애쓴 것이다.

인천에는 부코스키쯤 가볍게 밟아줄 천재시인이 존재한다. 바로 김영승 시인(제고21회)이다. 결코 필자의 과한 사견이 아니다, ‘함성호 시인(1963~현재)이 현대시 100주년 기념 동아일보 칼럼(2008.7.17.)에서 한 말이다. ‘김영승은 시의 천재다. 세상에 숱하게 많은 시인이 있지만 유독 김영승에게는 시인이란 말이 무슨 왕관처럼 들린다. 나는 그처럼 시인이란 칭호가 잘 어울리는 시인은 본 적이 없다. 가는 김에 좀 더 나가자. 시인이란 칭호는 오직 김영승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까지 극찬했다. 그 이유를 함 시인은 ‘김영승의 시가 내뱉는 독설, 자지러지는 해학, 박학한 지식, 이런 것들을 그처럼 자유자재로 시에 풀어 놓는 시인은 없기 때문’이라며, ‘김영승은 시라는 바다에서 놀고 있는 한 마리 물고기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있겠는가? 그는 그런 시인’이라고 평했다.

먼저 ‘그런 시인’ 김영승의 철학을 한방에 보여주는 시 한편을 감상해보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별로 신나는 일은 아닌데도 / 쓰레기는 / 신난 것 같다// 버려지다니 // 이 얼마나 신나는가 춤을 / 춘다 // 독립만세보다도 신나고 // 총 맞아 / 죽는 것보다도 신난다 // 너나 다 가져라 / 춤을 춘다 // 쓰레기 버리는 밤엔 / 나는 쓰레기 버리는 사람 // 가로등보다도 더 신나고 / 종이박스는, 폐지는 이 새벽 // 주차장 페이브먼트 위의 薄氷 / 그 九泉의 // 실뿌리보다도 / 새싹보다도 // 더 / 신난다 // 屍身보다도! (‘强風에 쓰레기’ 《세계의문학》 2013년 겨울호)

 

강풍 부는 날 바람에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장면을 보고 쓴 시다. 당연히 쓰레기는 시인자신의 은유다. 세상에, 얼마나 신났으면 독립만세보다도, 총 맞아 죽는 것보다도 신난다고 읊었을까? 비록 쓰레기로 버려지는 순간일지라도 강풍이라는 찰나의 현상을 마음껏 즐길 줄 아는, 혹은 즐기고 싶은 시인의 인생철학이 통쾌하다. 거창한 철학이나 가치 따위 ‘너나 다 가져라’ 호쾌하게 바람에 몸을 던지는 시인의 짜릿한 해방감이 시를 읽는 이들의 가슴 속까지 펄럭이게 만든다.

이런 김영승의 시세계를, 이승훈 시인(1942~2018)은 김영승 시집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나남출판, 2001)을 추천하며 ’어른들만 가득 찬 우리 시단에 이런 어린아이 같은, 그러나 거의 죽게 된 성자(聖者)가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고 했고, 문학평론가 신형철(1976~현재)도 한겨레21(2010.08.06.제822호)에서 ‘시민(市民) 김영승의 실제 생활이 어떠한지 나는 모르고 또 알 필요도 없을 텐데, 적어도 시인 김영승의 목소리는 한국시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무장무애하다, 그는 심오하게 적나라하고 정교하게 제멋대로인 시를 쓴다.’고 정의했다.

또한 김요일 시인(1963~현재)은 동아일보(2013.5.8.)에서 김영승 시인의 시집 ‘흐린 날 미사일’(나남)을 추천하며 “인간이 겨우 견디며 서 있는 이 땅에서 ‘찬란하고 장엄하고 허무한/盲目的(맹목적) 生의 意志(의지)의 大전환’을 보여준다. 김영승 시인의 풍자와 사유는 김수영보다 깊고 마음의 결은 천상병보다 투명하다”고 평했다. 모두가 시의 바다에서 무한히 자유자재로운 순진무구한 영혼, 김영승을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生이라는 詩 바다로의 여정

“인천 유동에서 태어났어요. 부친은 안성공립농업학교(현 국립한경대학교의 전신)를 나온 철도공무원이었죠. 그런데 연년생 동생이 태어나고 채 한 달도 안 돼, 나이 서른에 갑자기 요절을 하신 거예요. 그 바람에 부친에 대한 기억이 저한텐 전무해요. 나중에 집안어른들께 전해들은 얘기로는, 빨치산 토벌작전 중 살포된 생화학 무기가 급성간염을 일으킨 원인이었다는데, 모친의 억척스럽고 끈질긴 사인규명 노력으로 ‘순직’이 인정되면서 철도공무원 사택 부지를 보상으로 받아 3층짜리 건물을 지을 수 있었대요. 여장부스타일의 모친께서는 그 건물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끌어와 통 크게 사업을 벌이셨어요. 문제는 2살 터울의 형과 저, 그리고 연년생 동생, 이렇게 3형제를 모친 혼자서 건사하기 벅찼던 거죠. 형은 장남이니까 안 되고, 동생은 아직 너무 어려서 안 되니, 만만한 제가, 선영(先塋)이 있는 수백 년 선대의 고향인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용두리의 본가로 보내지게 된 거예요. 아니 사실은 안성에서 아버지 장례를 마치자마자 할머니가 저를 먼저 맡겠다하신 거죠.”

시인 김영승의 인생이 첫 걸음부터 연속된 ‘상실’의 격랑으로 꼬여들게 된 연유다.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다시 인천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김영승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안성군 공도면 용두리의 그 두메나 산골에서 조부모를 친부모로 알고 7살이 되도록 살았다. 생떼 같던 장남을 순식간에 잃게 된 조부모의 맹목적 사랑이 그 짠한 피붙이였던 시인에게 얼마나 끔찍했으리란 건 불문가지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자신의 인생에서 안성의 벽촌생활을 거의 유일하게 평화로웠던 정신적 고향이자 피안이었노라 회상한다.

“축현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올라온 인천은 완전 딴 세상이었어요. 모친이 마음 아파할까봐 내색은 안했지만, 잠자는 시간만 빼놓고 온몸으로 안성의 벽촌생활을 그리워하곤 했어요. 고모, 이모, 외사촌 등 대식구들이 한집에 모여 살았지만, 여전히 낯선 섬 같은 외로움을 그림자처럼 달고 산 거죠. 겉으로야 명랑하고 쾌활한 척 동네 애들을 다 끌고 다니면서도, 4학년 음악시간에 ‘고향땅’이라는 노래를 부르다 뛰쳐나가 아무도 없는 수돗가에서 펑펑 눈물을 쏟기도 했어요. 형제들과의 조우도 내내 어색하긴 마찬가지였죠. 두 살 터울의 형은 거의 접근불가 영역처럼 느껴졌고, 연년생 동생인 ‘영기’ 역시 저를 살갑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으니까요. 동생과는 쌍둥이처럼 똑같이 차려입고 거의 날마다 붙어 다녔지만, 순순히 저를 형이라고 부른 적이 없어요. 어디서 얻어맞고 돌아와서야 겨우 ‘엉아’라고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도움을 청하곤 했죠. 그래도 동생 ‘영기’는 제가 영 싫지는 않았는지 껌딱지처럼 저만 졸졸 따라다녔어요.”

 

1970년

 

연속된 상실의 충격, 시인의 유년을 트라우마에 가두다

그리움으로 속병을 앓기는 조부모님들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나 시인을 다시 데려가고 싶어 모친의 눈치를 살피며 인천을 오르내리던 조모님은 시인을 인천으로 떠나보낸 지 3년 만에 결국 시름시름 세상을 뜨셨고, 조부마저 4년 뒤 조모 뒤를 따랐다. 그 연속된 ‘상실’의 경험은 시인의 절대적 피안이던 안성의 기억과 함께 시인의 유년 깊은 곳에 진한 상흔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정작 시인을 평생 트라우마에 가둬버린, 또 한 번의 상실이 조부사망 한 달여 만에 또 다시 시인의 여린 마음을 무자비하게 강타했다. 바로 동생 ‘영기’의 죽음이 그것이다. 동인천에서 자유공원 넘어 인천항을 거쳐 월미도 바닷가에서 대나무낚시로 망둥이를 낚아, 함께 전기선에 주렁주렁 꿰어 오던 동생이, 철조망도 없는 철길을 따라 온통 주변이 논밭뿐이던 주안역까지 붕어, 미꾸라지, 기름종개며 버들붕어, 잠자리애벌레를 잡으러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그 동생 ‘영기’가, 여름방학이 한창이던 1970년 8월 9일, 송도유원지서 막 돌아와서는 딱지를 사오겠다며 자전거를 타고나갔다가, 기독병원영안실에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있는 장면을 시인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동인천역 사거리 평화제과 앞에서 신호 대기 중이던 동생의 자전거를 항도교통 시내버스가 뒤에서 받아버린 것이다.

“아까까지도 옆에서 웃던 녀석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 한복판이 집채만 한 돌덩이에 눌린 듯 숨도 쉴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불행이라는 놈은 또다시 정신 못 차리게 파도처럼 밀려들었죠. 모친이 끝내 거액의 부도를 낸 거예요.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전답과 임야를 팔고, 여기저기서 힘껏 끌어 모은 자금들을 모조리 허공으로 날린 채 모친은 채권자들에게 쫓겨 잠적했죠. 그때까지만 해도 경제적 부족함 같은 걸 모르고 살던 우리 형제의 삶도, 영문을 모른 채 급전직하로 곤두박질쳤어요.”

동산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 인하대 뒤쪽 허허벌판, 해성고아원 아래의 소위 집장수라 불리던 사람들이 급조한 단층 단독주택으로 급히 이사했다. 안성에서 함께 자란 고모가 밥이며 빨래를 챙기고, 모친은 빚쟁이들 눈을 피해 도둑고양이마냥 간간이 스며들어 생활비를 쥐어주고는 사라졌다.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하늘같던 형이 어느 순간 미친 듯 기타에 빠져들었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음감의 소유자였던 형은 텔레비전 같은 데서 처음 듣는 노래도, 금방 기타로 똑같이 연주하곤 했다. 제고19회 동창들 사이에서 형, 김영환은 호세펠리치아노의 ‘레인(Rain)’으로 통했다. 형은 제고는 물론이고 시내에서도 이미 알아주는 기타리스트였다. 시인이 세계 유명 팝과 재즈음악에 깊은 소양을 갖게 된 것도 그런 형의 영향 때문이다.

 

고1

 

시인은 형을 기다리며, 텅 빈 방에서 혼자 먹을 게 없어 고모가 가져다 놓은 동치미국물로 버티기도 했다. 매사가 시들했고 멍하니 상념에 빠져 지내다가, 안성 벽촌생활이 목마르게 그리워질 때쯤, 뼛속까지 차오른 외로움을 견딜 요량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날마다 학교도서관에서 뜻도 모르는 온갖 책들을 한보따리씩 빌려와 밤을 새워 가며 닥치는 대로 읽고, 또 생각나는 대로 무수히 노트에 써대는 게 유일한 낙이 되었다. 도연명의 한시와, 국한문 혼용으로 을유문화사에서 출판된 이가형譯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쇼펜하우어의 여러 책들이 그때 읽던 것들이다. 중3때 여선생님인 ‘바둑이’라는 별명의 최영호 국어교사가 詩숙제를 내줬는데, 중학생 수준에 너무 높은 시를 써내는 바람에 다른 책에서 베껴온 걸로 오해해 크게 야단을 쳤다가, 다음날 시인이 그동안 써둔 노트들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 시인은 지금도 그 바둑이선생님을 21회 김용환, 김태익, 신영길 등 동기들과 일 년에 한두 번씩 찾아뵙고 있다.

“로켓 만들기에 매료돼 한국브라운로켓클럽(KBRC)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한 게 중1 무렵부터예요. 미국의 로버트 고다드 박사, 독일의 폰 브라운 박사 등의 로켓서적을 훑고, 제 지적흥미와 집요한 탐구정신을 갈아 넣어 만든 로켓몸통에, 역시 책을 보고 직접 조제한 흑색화약을 채워 넣고, 형광등 필라멘트를 점화장치로 쏘아올린 대형로켓이 10m쯤 치솟다 큰 화염과 함께 공중 폭발하는 바람에 경찰들이 대거 출동하기도 했죠. 또 U/C모형비행기에 빠져, 서울수색비행장이나 항공대연병장, 공군사관학교연병장 등지에서 열리던 ‘전국 모형비행기 날리기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어요. 비행기연구 모임에서 알게 된 서울 중앙고 선배가 쓰던 중고엔진(일제 ENYA29)을 얻어 와, 직접 그린 설계도대로 비행기 몸체를 만들었죠. 미군부대 루트를 통해 나오는 연료는 너무 비싸 메틸알코올과 피마자유, 니트로벤젠을 7대2대1의 비율로 섞어 사용했고, 비행기 몸체인 키트는 원래 세계서 제일 가벼운 나무라는 ‘발사(Balsa)’로 제작해야 했지만, 동호인용으로 나오는 피나무로 대신 만들었어요. 그뿐 아니에요. 세계 최고급 혈통의 족보를 가진 셰퍼드 품종인, 야메스에 꽂혀, 초등학교 때부터 수집했던 전 세계 최고가(最高價) 희귀우표 수만 장을 전문 우표상에게 헐값에 팔아서 그 강아지를 3만원에 샀다가, 개장수에게 잃는 또 한 번의 어처구니없는 ‘상실’을 경험하기도 했어요. 당시 버스비가 10원할 때였죠. 또 한동안은 고양이, 메추리, 닭, 십자매, 새매 같은 ‘동물 기르기’에 광적으로 집착한 적도 있죠.”

 

고교시절 참스승들과 조우

시인의 그런 엉뚱하고도 집요한 지적호기심이 멈춘 건, 제물포고등학교에 진학하고서다. 당시 제고는 학생들 수준은 물론이고, 교사들의 수업분위기부터가 달랐다. 독일어 수업 첫 시간, 시인이 지금도 문학의 참스승으로 존경해마지 않는 정서웅 독일어선생이 칠판에 써주신 ‘Übung macht den Meister!’(연습이 대가를 만든다)는 글귀를 평생 간직하고 있을 정도다.

“당시 전교생 700여 명 중 2%인 전교 14등한테까지만 주어지던 우등상을 타는 등, 성적은 최상위권이었지만 학교생활을 제대로 적응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동안 엉뚱한 취미들의 광적집착을 방어기제 삼아 꾹꾹 눌러놓았던 제 내면의 트라우마가, 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 곪아 터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이죠. 그때 제고에는 형(제고19회)도 3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하소연 할 곳 하나 없이 혼자 끙끙 앓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자퇴충동에 빠지곤 했어요. 그런 저를 붙들고, 많은 대화를 나눠주신 분이 바로 정서웅 선생님이었죠. 고2 독일어 시간에 제가 번역한 독일시인 하이네의 ‘로렐라이’라는 시를 떨리는 음성으로 낭송하시고는 ‘천재가 아니면 이렇게 번역할 수 없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한번은 영어선생님이 매번 영어편지쓰기 숙제를 내주시는 데 짜증나, The Mamas and the Papas 라는 미국 유명 보컬그룹의 히트곡 California Dreamin'의 가사 앞부분을 ‘Dear Malja’(말자에게)라는 영문편지의 도입부에 그대로 옮겨 써냈죠. 노래가사인 줄 꿈에도 모른 선생님은 ‘이렇게 시적 표현의 영어편지를 써내다니 역시 영승이다.’ 감탄하시며 ‘여러분 영승이를 본받으세요.’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셨어요. 결국 일이 터졌죠, 교무실에서까지 저에 대한 자랑을 그치지 않다가 그게 팝송 가사란 걸 아신 거예요. 다음날 제 귀싸대기가 남아나지 않은 건 당연한 결과였죠.”

 

 

고1때 이미 시인의 반열에 오르다

김영승 시인은 제고 1학년 때인 1974년 벌써 ‘현대시학’ 12월호에 ‘거리’라는 시를 발표하는가 하면, 이듬해에도 ‘김악당(金咢堂)’이라는 필명으로 ‘현대시학’ 9월호에 ‘봄’이라는 시가 실릴 만큼, 이미 시인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필명을 ‘악당’으로 지은 이유는 같은 반 급우였던 ‘박남춘(제7대 인천광역시장)’군이 시인을 ‘rascal(악동에 가까운 귀여운 악당의 뜻)’이라 놀리곤 했는데, 그걸 한자만 살짝 비틀어 ‘악당(咢堂-깜짝 놀란 사람)’으로 짓고는, ‘나는 세상이 무섭다는 데 놀랐다 / 그리고 나는 세상이 너무 아름답다는 데 놀랐다’는 영탄의 의미로 사용했던 것이다. 고3때인 1976년에는 ‘현상(現象)’이라는 연작 산문시를 썼고, 이듬해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로 진학했다.

시인은 대학재학 중이던 1980년에도 장편 산문시 ‘신선(神仙)이 그린 만화(漫畫)’, ‘부러진 이빨에 관한 명상’ 등 다수의 장편 산문시를 쓰는 등 시작활동을 활발히 이어간다. 1983년 대학을 졸업한 후, 다시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하다 중간에 학업을 접는다. 그리고 ‘인생의 좌표라도 만들자’는 마음으로 1986년 계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반성・序’외 3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한다.

 

첫 시집 ‘반성’으로 외설논란의 중심에 서다

등단 이듬해인 1987년 민음사에서 첫 시집 ‘반성’을 출판했다.

‘그(김영승)는 또한 이러한 반성을 시로 형상화함에 있어서 뛰어난 지성과 따뜻한 감성, 섬세한 시적 기교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동안 우리 시에서 특히 부족했던 점이 고도의 철학적 사유와 사소한 일상적 체험의 연계성이라면, 김영승의 『반성』은 그 점에 대한 반성도 된다.’는 문학평론가 이남호의 평과 함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여기저기 언론과 방송들이 극찬을 하며 다투어 인터뷰를 실었다. 화려한 스타의 탄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부(당시 문공부)가 나서서 80년 한국현대시 사상최초로 시집 ‘반성’이 ‘외설’이라며 경고조치하고 나섰다. 전두환 군부정권이 서울올림픽과 정부 이양을 앞두고, 사회기강잡기(문인 길들이기) 차원에서 막 떠오르는 신인시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처음엔 ‘판금조치’까지 강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다가, 김지하의 경우처럼 지하로 더 퍼져나갈까 두려워 ‘외설’이라는 모욕주기를 택한 것이다. 어제까지 천재시인의 등장이라며 호들갑 떨던 국내언론과 방송들이 정권눈치를 보다 일제히 안면을 바꾸고는 시집 ‘반성’을 외설로 몰아가는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외신기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코리아 헤럴드’의 영문기사를 본 외신기자들은 시집 ‘반성’을 급히 번역해 읽어본, 당시 AP통신 한국지국장 ‘배리 렌프류(Barry Renfrew)’의 주동으로 프레스센터 19층 외신기자클럽에서 저와 외신인터뷰를 진행하게 되면서, 제 시집의 외설논란이 전 세계에 알려졌어요. 통역은 신호철 특파원(당시 65세)이 해줬죠. 결국 시집 어디에도 ‘외설스런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났지만, 정부는 이후 어떤 변명이나 후속조치도 없이 흐지부지 ‘외설논란’을 덮어 버렸어요. 그 사건이후 국내외의 초중고 교사와 학생, 대학생, 교수, 성직자 등 무수한 남녀노소 독자들이 제 시집 ‘반성’을 열광적으로 사랑해주었죠.”

 

1988년인가의

 

시인은 이후로도 시집 ‘차에 실려 가는 차(우경, 1988)’, ‘취객의 꿈(청하,1988)’ 장정일과 2인 시집 ‘심판처럼 두려운 사랑(책나무,1989)’, 에세이집 ‘오늘 하루의 죽음(문음사,1989)’, 시집 ‘몸 하나의 사랑(미학사,1994)’, 시집 ‘권태(책나무1884)’, 시집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나남출판,2001)’, 시집 ‘화창(세계사, 2008)’, 시집 ‘흐린 날의 미사일(나남출판, 2013), 등을 쉼 없이 발표하면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조선일보에서 뽑은 한국현대시 100주년기념 100년 동안의 100인의 시인에 선정되었고, 동아일보의 한국현대시 100주년 기념 100년 동안의 50인의 시인에도 다시 선정되었다. 제3회 현대시작품상, 제5회 불교문예작품상, 제29회 인천시문화상, 제13회 지훈문학상, 제1회 형평문학상, 제1회 이용악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17년엔 300만 인천시민 투표 인천 대표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9년

 

인터뷰 말미, 담배를 피우러 나가려던 시인이 주섬주섬 일어서며 호주머니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낸다. 맙소사! 이젠 사람들 기억에서조차 까마득히 지워진 2G 폴더폰이다. 긴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 넘기고는 미간을 찡그리며 구닥다리 2G 폴더폰을 들여다보는 시인에게서, 문득 진한 ‘사람냄새’가 풍겼다. 낡아빠진 것들을 차마 버릴 수 없어 여직 품고 사는, 한 천재시인의 코끝 시큰한 체취였다.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