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의 신비를 간직한 보물의 집, 송암미술관에서
[인천유람일기] (137) 학익동 송암미술관 - 유광식/ 시각예술 작가
조금 지각은 했지만 완연한 가을이다. 날씨에 적응하느라 신체 리듬이 조금 휘청하기도 했다. 잠들기 전마다 매일의 평안함에 감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길 바라면서 별을 세어 간다. 세상은 평화의 길이 아닌 진흙탕 싸움의 길로 자꾸만 나아간다. 세상의 불안과 위협을 누가 유도하는 건지 싶다. 지난날들에는 고개를 숙이고, 나아갈 날들 앞에 모험을 심어 두고서 한 번 웃어보는 것이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잠시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 인천의 한 미술관으로 진입했다.
푸른 바다 빛깔이 구름에 반사되어 토양에 맑게 스미던 어느 날에 송암미술관을 찾았다. 학익동 거친 땅 중앙에 자리한 송암미술관은 먼 훗날 잘 닦인 도로와 주거 단지의 품속에 안길 것이다. 아직은 휑하고 어중간한 위치인지라 그동안 발길이 닿지 않았다. 인천에는 공립미술관이 부재한 시절이 길고 넓게 자리하고 있다. 인천은 자랑거리가 많으나, 애교인지 재치인지 모르게 장소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하나씩 빠져 있음을 느낄 때마다 놀랍기까지 하다. 공간이 크다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인천시 송암미술관 진입로에 들어서며 어떤 생각이 흔들거리며 솟구쳤다. 쾌적한 공간에서 인천의 유산이 잘 보존되고 교육적 가치를 키워나가면 좋을 것 같다는 마음이었다.
송암미술관은 숨겨진 작은 신전 같다. 어느 재력가의 보물창고가 시민들의 고귀한 장소가 되기까지 순탄치 않았음을 느끼게도 된다. 미술관 뜰을 살며시 돌아보았다. 가까이 차량 소음이 없어서인지 고요하다. 고즈넉한 오후 햇살에 소나무가 낮잠을 자는 사이, 벤치에 앉아 돌조각들을 살펴본다. 무엇보다도 광개토대왕릉비를 실제 크기(6.34m)로 재현해 놓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실물 크기 디지털 모니터로도 재현된 광개토대왕릉비는 과거 역사 인식의 중요한 기준점이 되고 있다. 까치가 손님맞이로 시끄럽게 따라다닌다. 까만 자동차를 타고 온 보안업체 사람들은 보안 시설을 점검하고 있고 말이다. 야외에는 조각품이 많은데, 제자리를 찾지 못해 방치된 것은 설마 아닐 거라 걱정하며 미술관 건물을 한 바퀴 돌고서 안으로 입장했다.
1층 상설관부터 빙글빙글 돌며 과거 유산을 돌아보게 된다. 해설사분이 어느 관람객에게 자상하게 작품을 설명하고 계셨다. 은은한 조도 아래로 작품이 빼곡하다. 낯선 것들도 보이고 관심이 가는 작품도 많아서 흥미롭게 관람을 이어갔다. 2층으로 올라갔더니 좀 더 규모가 큰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내 키보다도 커서 그런지 내가 화조도 안에 혹은 연못이나 폭포 중앙에, 나무 위에 선 기분이 들어 황홀했다. 문득 미술관이 잠드는 한밤중에 그림 속 동식물들이 움직이며 그들만의 축제를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상상해보았다.
미술관 2층은 연구동과 연결되어 있다. 이어지는 통로부터 연구동 2층까지는 기획전시실이었다. <신중도> 기획전시가 2025년 3월 2일까지 열리는데, 불교의 여러 신들이 그려진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통로에는 증강현실 체험을 이용한 작품들이 있었는데, 실감나게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했다. 2층 통로가 신의 세계로 잇는 다리 역할처럼 느껴져 재미있었다. 때마침 몇몇 학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답게 빠르게 한 바퀴 뛰놀며 그 많은 작품을 섭렵하더니 어느 남녀 학생 둘은 의자에 앉아 조용히 속삭인다. 그들은 어떤 간절한 소원을 각자 빌고 있었을까?
송암미술관 인근의 인천뮤지엄파크에는 인천시립미술관이 지어지는 중이다. 2027년에 개관할 예정인데, 게으른 건지 이미 계획이 탄탄한 건지 그 움직임이 자유로이 이야기되지 못하고 소수의 쟁점 사안으로 국한되는 모습이다. 현장과 행정 사이의 첨예한 괴리는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부디 높으신 분들이(낮은 자들은 말이 없다) 우리 문화의 실질적 만남의 장소로 거듭나도록 노력해 주었으면 한다. 1998년에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이 인기였는데 인천은 미술관 옆 박물관, 박물관 속 미술관이 인기다. 선선한 가을 날씨에 잠시 송암미술관을 거닐며 심신의 돌기를 깎아내어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다. 미술관을 나서는 기분이 나쁘지 않은 이유이다. 이 기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다. 어떤 문화 공간 하나가 각자의 삶 속에서 경유하는 다음 정류장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