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 조탕(潮湯)과 용궁각(龍宮閣) 가는 길

[제물포시대 - 김광성의 개항장 이야기] (18) 조탕과 용궁각

2024-10-11     김광성
변화는 기억을 지워버린다. 광속시대에 편승해 남기느냐 부수느냐 논쟁이 이어지는 사이, 한국 근현대사의 유구(遺構)들은 무수히 사라져 갔다. 외형적인 것만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정한(情恨)이 녹아 있는 기억마저 더불어 지워졌다. 인천 개항장을 그려온 김광성 작가가 최고와 최초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개항장의 근대 풍경과 당대 서민들의 생활상, 손때 묻은 물상들을 붓맛에 실어 재구성한다. 

 

월미도

 

월미도 조탕(潮湯)과 용궁각(龍宮閣) 가는 길이다.

조탕이라고 부르는 해수 공동 욕탕이 있었다.

바닷물을 데워서 온천처럼 사용했던 조탕은 사시사철 이용할 수 있어

개장 하자마자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바닷물이라는 신비성과

획기적인 시설의 명소로 알려지면서

월미도는 국내 최고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인천과 서울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행락객들이

화열차를 타고 몰려들었다.

오른쪽 갯벌에 서 있는 2층 건물이 만조 때면 바다에 떠 있는 것 같아서

용궁각이라 이름 지은 요정도 문을 열었다.

이 용궁각에는 인천 권번(券番) 소속의 내노라 하는 기생들이

춤과 노래를 공연하기도 했다.

경인선 화열차의 유혹과 만개한 월미도의 벚꽃,

용궁각의 술과 볼거리, 그리고 조탕에 몸을 담가 피로를 푸는 호사는

일인이든 한인이든 단 하루만이라도 누리고 싶어 했다.

1920년대 초반 월미도 둑길이 조성된 후 철도국이

기차 승객 유치를 위해 조탕과 해수 풀장을 건설한

유원지를 시작으로 20년간 황금시대를 누렸으나

월미도의 융성은 6.25를 기점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