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영화를 추구한 영상파 영화감독 조문진
[인중제고 사람들] (59) 조문진 영화감독 - 김윤식 /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
영어교사, 영화사 신입모집에 응모하다
인천중학교 출신으로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활약한 인물은 조문진(趙汶眞, 1935~ ) 감독이 최초일 듯싶다. 영화가 종합예술이란 점에서 여러 다른 분야에 있었던 인물은 어떤지 모르나, 영화감독이라는 칭호를 붙여 부르는 예술가로서는 단연 그가 맨 앞에 선다. 그가 정식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1968년이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일, 그의 첫 연출 영화 <포옹>이 서울 국제극장에서 개봉됨으로써 세상에 널리 ‘영화감독 조문진’을 알린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인천중학교 출신이라고 해도, 인천과 인연을 지어 ‘영화감독 조문진’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실제 인천영화사(仁川映畫史)에도 그의 이름이나 작품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오로지 인천중학교 졸업생, 그 한 가지 스쳐 지나가듯 짧은 인천과의 인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초등학교, 고등학교 시절은 전혀 불명한 채, 드러난 것이 고작 3년간의 중학생 시절뿐이었으니.
그의 인천중학교 졸업 횟수는, 과거 인천중학교가 6년제에서 3년제로 학제가 바뀌면서 두 번째 회, 통칭 ‘인천중학교 3년제 2회’가 된다. 그러니까 1949년에 인천중학교에 입학하여, 제물포고등학교가 개교하기 2년 전인 1952년 졸업생이 되는 것이다. 그의 출생년으로 보아서는 2년쯤 학교 입학이 늦은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그의 대학 학력은 건국대학교 졸업으로 되어있다.
조문진 감독은 중국 만주 출신이라고 한다. 그 외에 초기 그의 신상, 곧 만주에서 인천으로 와 거주하게 된 경위나, 인천중학교 시절 학교생활 모습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몇몇 중학 동기생들도 그에 대해 별다른 증언을 해주지 못한다. 그가 고문으로 있던 한국영화감독협회에서도 그의 근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화인으로서 조문진 감독의 지난날 모습과 활동을 쓰기에 앞서, 그가 소설가요, 시나리오 작가였다는 사실을 먼저 밝힌다. 그는 1967년 「회귀(回歸)」라는 단편소설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작가였다. 작가로 문단에 등단한 때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1968년보다 1년 앞선다. 1967년은 아직 영화 조감독(助監督) 시절로, 영화 일 틈틈이 소설을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것은 신춘문예 소설 당선과 함께 그해 김수용 감독의 <까치소리>를 각색하면서였고, 이때부터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을 시작했다.
영어교사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조문진 감독이 전혀 다른 세계인 영화계에 투신하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생래적이었을지 모르는 그의 충만한 문학적 감성과 함께 문학적 상상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영상으로 표현해보고 싶은 욕망 때문으로 보인다.
인천중학교를 졸업하고 모현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했던 그는 시와 소설을 즐기던 문학지망생이었다. 22살 되던 어느 가을, 그는 한적한 벤치에 앉아 시상을 가다듬으며 이런 시를 써 내려 갔다.
단풍이 들어 더욱 좋소.
뽀뿌라 그늘이 마침 한적하오.
단풍이 들어 더욱 좋소.
이리 오셔서 나하고 얘기하시지 않으렵니까?
여기까지 쓴 그는 그러나 어쩐지 언어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을 ‘카메라’로 잡는다면…. “음악 없이 떨어지는 낙엽 소리와 발자국 소리. 그리고 여백으로 하늘을 담아본다….” 필설(筆舌)로는 그리기 어려운 세계가 카메라로는 가능하다. 이때부터 그는 영화라는 색다른 마술에 끌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수도영화사(首都映畫社) 신인 모집에 응모 연출부(演出部)에 합격했다.
이 글은 1966년 1월 5일 자 동아일보의 「이 집념(執念)」이라는 제호로 시작되는 연재 첫 회, ‘조문진 조감독의 8년 세월’을 세상에 밝힌 내용의 일부이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순수한 문학적 감성을 언어 대신에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영상 예술, 영화라는 ‘마술’에 끌려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마술의 길에 우뚝 서기 위해 피눈물 나는 집념으로 버티어 나간 것이다.
조감독 10년, 치열한 수련과 끈질긴 집념
26편의 영화를 매만지면서 ‘서드’에서 ‘퍼스트’에 이르기까지 조감독 생활 8년을 기록하는 조문진 군은 몇 번이고 이 길을 그만두려고 했다.
L감독의 제2 조감독으로 <열정 없는 살인>을 찍을 때 그는 인기 절정의 여배우 K양의 ‘하이힐’을 수선해 오라는 명령을 받고 당시 안양 촬영소에서 10리 길을 단숨에 뛰어갔다 왔다.
그러나 K양은 수선한 ‘힐’을 보더니 “이게 뭐냐”고 호통이었고 제작진은 시간이 너무 걸렸다고 야단. 그래서 다시 ‘힐’을 들고 백주(白晝)에 10리 길을 뛰어갔다 오니 이미 K양은 다른 ‘힐’을 신고 촬영을 마쳤다.
이 순간, 감독이 되려던 조 군의 강한 집념은 분에 못이겨 “그래도… 그래도…” 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 글 역시 앞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서글픔이라는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을, 그야말로 피눈물의 비애가 느껴진다. 더구나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편집자가 붙인 주(註)가 차라리 ‘조문진의 집념’에 대한 연민 때문에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더 아프게 느껴진다. “우리의 현실은 그 집념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창조적인 작업과 연결된 아름다운 집념의 경우까지도 말이다.”라고 편집자는 쓰고 있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수련의 과정이 있다. 그것이 이른바 ‘조감독’이란 과정이다. 조감독은 감독을 보좌하는 연출부원으로 ‘영화 스케줄 조정, 촬영 현장 답사, 출연자 섭외, 스태프 구성 등 영화 제작의 모든 세세한 일’을 담당한다. 영화 한 편 제작을 위한 ‘모든 잡다한 일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배우의 하이힐 수선’을 위해 10리 길을 뛰어야 하는 것도 조감독의 일에 포함되는 것이다. 거기에 ‘조감독은 서열에 따라 제1 조감독(first), 제2 조감독(second), 제3 조감독(third) 등으로 나뉘며 역할도 각기 다르다,’
이 같은 과정을 겪는 것은 조문진 감독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1959년 이병일(李炳逸) 감독의 <청춘일기>에서 ‘서드’인 제3 조감독이 된다. 2년 뒤인 1961년 이(李) 감독의 4촌 동생 이성구(李星究) 감독의 <젊은 표정>에서 한 계단 위인 ‘세컨드’, 즉 제2 조감독이 된 것이다.
문제는 죽어 있나 싶어 밟아보니 꿈틀 살아 있다는 것과 둔한 대로나마 동작은 계속된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조감독끼리 술잔을 기울이면서 스스로들 비판해 본 얘기들이다. 바늘구멍을 통과할 만큼 어려운 감독에의 문은 조감독들을 소화 불량, 우울증을 병발케 한다.
이 인용문은 1966년 『영화TV예술』 잡지 9월호에 수록된 조문진 감독의 글인데, 그해 동아일보 9월 7일 자 지면에 일부 발췌, 재게재되어 있다. 소화 불량, 우울증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견디던 조감독(助監督)들의 자조와 푸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아무튼, 조문진 감독이 이 글을 쓸 때는 조감독 생활 8년 차에 접어들어 어느덧 ‘퍼스트’가 되어있었지만, 그가 ‘서드’에서 ‘퍼스트’가 되기까지는 처음 수도영화사 합격 이후 이처럼 긴 시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그러나 조감독 시절, 그에게도 갈등의 시절이 있었다. 조감독의 위치라는 것이 실제 감독의 뒤치다꺼리를 맡아 하는 ‘뒷일 보기’ 잡역부나 다름없었으니, 수입 자체도 말할 수 없이 빈약한 것이었다. 갈등 끝에 그는 모현중학교 영어교사 이력을 내세워 한동안 『영어 세계』 잡지 기자로 전업했던 것이다. 먹고사는 일로써 어쩔 수 없이 택한 잠시의 외도였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영화에 대한 갈망과 집념이 꺾이지 않고 살아 있었다.
이 같은 그의 집념은 당장 아무 대책 없이 영화계에 돌아가는 대신, 밤을 새워 시나리오 쓰기에 몰두하게 한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 집필이 결국 조문진 감독을 다시 영화계로 돌아오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가 쓴 <언니는 눈이 높아>라는 시나리오가 당시 내로로라 하는 김수용(金洙容) 감독의 눈에 띄었고, 그의 영화 작품에 대한 감각과 재능을 발견한 김 감독이 그를 조감독으로 발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돌아온 그는 김수용 감독의 1962년 영화 <사춘기여 안녕>에서 다시 제2 조감독이 된다. 그리고 연이어서 <굴비> <혈맥> <상속자>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 이르기까지 총 22편의 영화를 김 감독과 콤비가 되어 함께 찍는다. 그리고는 1965년에 개봉된 영화 <갯마을> 작품을 찍으며 드디어 제1 조감독이 된다. 이것이 바로 조문진 감독이 ‘서드’에서 ‘퍼스트’로 올라서기까지의 과정이었다.
‘퍼스트’에서 앞에 아무 수식어가 붙지 않는 정(正) ‘감독’ 데뷔는 이미 밝힌 대로1968년에 이루어진다. 조문진 감독의 끈질긴 집념은, 10여 년 조감독 생활을 마지막 김수용 감독 아래서 끝내고 마침내 한 사람의 영화감독으로 서게 한 것이다.
- 신인 감독의 화제 데뷔작 〈포옹〉
조문진 감독은 데뷔부터 화제의 주인공으로 출발한다. “신인 감독의 첫 데뷔가 명절 대목에 일류 개봉 극장에서 뚜껑을 연다는 일도 처음이라 화제”라는 그해 12월 31일 자 조선일보의 기사가 그의 데뷔가 영화계의 화젯거리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영화 제작 자금을 대는 제작자는 초자 감독에게 명절 대목 작품을 맡기지 않는 것이 영화계의 상례라면 상례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파격은 아마 그의 강한 집념과 그가 가진 남다른 재능과 센스, 그리고 늘 영화의 문학성을 강조한 한국 최고의 감독 중의 한 사람인 김수용 감독 아래서 수련한 탄탄한 연출 실력을 전혀 의심하지 않은 신뢰가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김, 조 두 감독의 이러한 문학적 성향과 영상미 추구는 시나리오에서부터 연출에 이르기까지 서로 ‘일치’를 이룬 경우가 많았던 듯하다. 조문진 감독이 독립한 후에도 자주 공동 연출로 합작 영화를 제작한 데서 알 수 있다. 1979년의 영화 <달려라 만석아>에서 두 정상급 감독이 공동 연출한 대표적인 케이스.
화제 속에 상영된 조문진 감독의 데뷔작은 그 자신이 각본을 쓴 <포옹>이었다. 주연은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인 신성일, 윤정희, 김승호, 김창숙 등이었다. 정식 개봉 일자는 1969년 1월 1일로 개봉관은 서울 국제극장과 부산 제일극장이었다.
신년 대목을 겨냥했던 의도 그대로 <포옹>은 서울 국제극장에서만 10만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흥행에도 성공을 거둔다. 이 영화는 대배우 김승호가 말년에 주연한 두 편의 영화 중의 하나로, 김승호 배우 사후(死後)에 개봉된 일화도 있다. 젊은 남녀 주인공의 외국 유학 꿈에 얽힌 유쾌한 홈 드라마 <포옹>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던 윤정희는 생전에 이 영화를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았다고도 한다.
조 감독은 한국영화가 침체기에 접어들 1969년 딸의 유학병(留學病)을 모티프로 한 <포옹> 으로 데뷔, 69년에만 <젊은 여인들> <새색시> <명동 나그네> <죽어도 그대 품에> <여자의 모든 것> <언제나 타인> <남편>을 내놓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후 70년에 <분노> <여자이기 때문에> <약속은 없었지만>, 71년에 <말썽 난 총각><내 아들아> <속 두 아들> <내 아내여> <두 딸의 어머니> <처복> <지금은 남이지만>의 소프트 멜로, 가족과 가정의 이면을 묘사하는 전형을 고수하고 있었다.
직접 쓴 각본, 문예적 작품에 역량을 쏟다
데뷔 이후 초기 조문진 감독의 활동을 정리한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의 기록이다. 조문진 자신이 이루어 낸 ‘영화감독’이란 자리에서, 하나씩 그의 초심을 실어 매우 열정적으로 영화 연출에 힘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연출한 영화의 대부분은 그 자신 문학적 역량을 쏟아부어 각본을 쓴 문예적 성격의 작품들이었다. 감독이 각본을 직접 쓰고 영화를 제작하는 일은 우리 영화사에 있어 조문진 감독이 유일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가 세상에 내놓은 영화는 1999년, 30년 연출 활동을 마감할 때까지 총 47편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랜 친교를 해온 내가 본 조 감독은 깔끔한 신사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늘 자상하고 이타행의 모범을 보여주며, 지금까지의 영화작업을 천직으로 살아온 멋쟁이이다. 자신의 작품을 과대포장이나 과시하지도 않는 영화라는 화려함 속의 고고한 청자와 같은 분이다. 음력 1935년 11월 5일생으로 제물포고, 건국대학교 정외과에서 수학한 조 감독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침향』의 김수용,『애』의 이두용 감독과 더불어 분단의 아픔을 그린 신작 『만날 때까지』로 원로감독으로 융숭한 대접(?)과 칭송을 받았다. 급변하는 영화환경 속에서도 투철한 작가 정신과 창작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그는 『만날 때 까지』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임권택 감독이 타인의 시나리오로 작품의 완성도를 가늠하고 있을 때 조문진은 시나리오 창작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70여 편의 시나리오, 다수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그의 작품들은 약 45편에 이른다. 이 중 일부는 보관되어 있고 이미 필름의 존재조차 모르는 작품들도 있다.
이 글은 2008년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실린 영화평론가 장석용이 쓴 조문진 감독에 대한 회고기의 일부이다. 조문진 감독의 영화 일생을 통한 인간적 면모와 영화관(映畵觀)을 알 수 있다. 다만, 인천중학교를 제물포고등학교로 표기한 점, 일반에 알려진 조문진 감독이 연출한 영화 편수 47편과 차이가 있는 것이 보인다.
조문진 감독은 크게 상복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7년 제6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반공 영화 <고발>의 각본상과 1970년 제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상을 받은 기록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각국의 유수한 영화제에 출품된다. 1969년 5월, 마닐라 아시아영화제에 <젊은 여인들>, 8월 시카고영화제에 <남편>, 12월 일본국제영화제에 <언제나 타인>, 1977년 방콕영화제에 <고가(古家)>, 1999년 제23회 몬트리올영화제에 <만날 때까지> 등을 출품한 것이다. 몬트리올영화제에서는 남북 이산의 아픔을 그린 <만날 때까지>가 경쟁부문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1978년 제31회 칸느영화제에 출품한 <화려한 외출>은 조문진 감독이 각색하고 김수용 감독이 연출한 콤비 작품이었다.
국내에서는 여러 편의 그의 영화가 우수작으로 선정되기도 하며, 1984년 MBC베스트셀러 극장의 연출을 맡음으로써, 영화와 TV가 손을 잡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1970년 영화인협회 시나리오분과 이사, 1980년 영화인협회 감독분과위원장, 1988년 영화감독협회장으로서 UPI영화직배반대투쟁위원장, 1990년 공연윤리위원회 영화심의위원이 그가 맡아 활동한 주요 직함이다. 1988년 영화감독협회장으로서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법 개정, UPI영화직배반대 등 영화계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앞장선 사실은 당시 언론 보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의 문학 작품은 1979년 이른바 기업소설로 불리는 『재벌의 문』을 비롯해 1991년 김채원, 서영은, 오정희, 이재연, 김문수, 이제하 등과의 공저 『그들이 떠난 행복의 피난처』, 각계 지명(知名) 인사 16인 공동 수필집 『차 한잔의 수필』, 2002년 『조문진 시나리오 선집』, 그리고 소설집 『2박 3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