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미가 도약하는 시간의 언덕, 선학역 일대
[인천유람일기] (138) 선학역 일대 - 유광식/ 시각예술 작가
선선한 가을비를 맞으니 슬그머니 긴팔 셔츠를 꺼내 입게 된다. 가을 산의 정취를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축제와 먹거리 등 우리를 사로잡는 가을날의 경험에 쉽사리 마음을 놓게도 되지만 멀리 전쟁과 죽음의 이야기는 쉽사리 화제에 오르기 어려운 것 같다. 가슴 아픈 이야기로 문학사에 큰일을 내었는데 결국은 대형서점 배만 불리는 상황이었다는 뉴스를 목도하면서, 과연 어느 장소에서 노니는 것이 의미로 남을지 고민이 들었다. 한 겹 더 꼬아져 무거워진 온도에, 신선이 노니는 장소라는 선학동 일대를 활공해 보았다.
연수구 선학동은 문학경기장 이남으로 길쭉한 지형이다. 경원대로와 제2경인고속도로가 선학동 가운데를 십자형으로 지나며, 인천지하철 1호선 선학역과 신연수역이 지하를 관통한다. 동쪽 경계를 따라 승기천이 흐른다. 문학산 동쪽 경사면을 따라 펼쳐진 드넓고 도톰한 땅 위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오래도록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괄목할 만한 건물은 아직 들어서지 않은 모양새다. 지난 인천아시아경기대회를 치르기 위해 지어진 경기장 모둠이 동네의 새로운 특징이 되었다. 또한 나대지 격이었던 주변이 하나둘 시민공원으로 조성되어 주민들의 산책과 휴식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별빛공원 안에 자리한 선학별빛도서관은 천체를 닮은 구 모양의 돔이 멀리서도 눈에 띈다. 이곳을 시작으로 선학동 일대를 동그랗게 걷는다.
도서관 뒤편을 바라보니 분양 텃밭이 있었던 것이 희미하게 기억났다. 꽤 오래전 이야기이다.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너머로 무주골공원, 공원 옆에 새 아파트 둥지가 지어져 있었다. 남북을 가르는 경원대로의 육교에 올라섰다. 좌우상하로 주유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인근 관교동의 인천종합버스터미널 영향이 크다 하겠다. 여기에서는 가솔린 향이 나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육교를 건너니 제2경인고속도로 아래로 새롭게 지어진 경기장들이 있다. 하키, 빙상을 비롯해 인천유나이티드FC 축구센터, 장애인국민체육센터 등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때마침 작은 축구장에서 고교 축구대회가 열리고 있었고, 실전 고함이 날카로웠다.
금호아파트 뒤편으로 걸어가니 드넓은 경사면(메밀밭)이 펼쳐져 신기했는데, 선학힐링텃밭이라는 곳이었다. 숨은 장소인지라 인근 주민들의 아지트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촬영을 나온 청년들의 소란스러움이 까치 못지않은 활기를 북돋아 주었다. 텃밭에는 이미 많은 주민이 나와 있었고 잠자리도 기분 좋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높고 푸른 하늘 아래로 오두막 쉼터에서는 생마늘을 빻고 있어 마늘 향이 나는 가운데, 코스모스 사이에서 연신 사진을 담는 무리가 행복해 보였다. 경작지에서 수확한 채소들을 분류하는 무리와 파라솔 아래에서 막대기로 들깨를 터는 두 어르신의 모습에 고소하고 풍족한 가을을 선물 받은 기분이어서 어깨가 덩실덩실했다.
텃밭 옆으로 오래된 아파트가 있다. 대동, 아주, 뉴서울, 금호가 1992년생 동창들이다. 지금의 아파트와는 달리 시대의 애틋함이 묻어나기도 한다. 건너편으로 넘어가려고 선학역 지하를 지나가게 되었다. 지하 개찰구 입구에서 구수한 빵 냄새가 들렀다 가라며 코를 간질인다. 당분간 화장실 공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밖으로 올라오니 선학동 음식문화거리가 나온다. 다국적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모습이다. 건너편 아파트 상황과는 다르게 한낮임에도 빼곡한 차량과 회색 건물들, 간판들이 눈에 어지럽게 들어오니 서둘러 골목으로 미끄러졌다. 골목을 걷다 수령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는 작은 공원을 만났다. 빌라 사이에 숨어 있지만 그 자태를 최대한 뽐내고 있는 느티나무를 보고 있자니 뜬금없이 안기는 찬란함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 찬란한 그늘에서 조금 쉬었다 간다.
걷다가 코를 킁킁거리게 되었는데, 어느 빌라 주택에서 ‘치-치익-’ 삼겹살 구이를 해 드시는지 냄새를 맡자마자 군침이 돌기도 했다. 다시 별빛공원으로 되돌아왔다. 선학동은 나름대로 인천의 가운데에 있지만 정서상의 지도에서는 치우쳐진 장소인 모양이다. 이제는 체육과 도시농업의 요람으로 땅심을 발휘하며 훨훨 비상하는 것도 같았다. 이전에 문학산에 오르기 위해 선학역에서 내려 느티나무공원을 지나 길마재로 향하던 것이 생각난다. 이젠 뭘 되뇌면 기본 10년은 훌쩍 뒤로 자빠진다.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이유는 잘 발달한 고속도로 탓인지도 모른다. 자동차 타고 휭~! 지나치지 않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일상에서 풍요로운 휴식을 얻을 수 있지 않느냐고 순간 읊조리며 날아가는 어느 두루미의 시간에 홀린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