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옥 시집 『눈 내리는 오후엔 너를 읽는다』 출간
고경옥 시인의 시집 『눈 내리는 오후엔 너를 읽는다』가 시작시인선 0510번으로 출간됐다. 시인은 2010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안녕, 프로메테우스』 『서랍 속에 눕다』 『오후 여섯 시는 사라지지 않는다』가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수한 상실을 겪어 내는 일이다. 시인의 서랍 속, 낡은 수첩 안에는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이 있다. 고경옥 시인은 “눈 내리는 오후”에 “빠르게 발등이나 보도블록 위에서 쉽게 잊힌 약속처럼 녹는” 기억들을 기어이 꺼내 읽는다.
김재홍 시인은 『오후 여섯 시는 사라지지 않는다』 해설에서 “상처와 상실로 가득 찬 ‘세계는 비극적인 것인가’"라고 묻고 ”그렇지만 시인은 "앞으로 나아가는 삶의 의지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고 답한다.
생과 사에 대한 도저(到底)한 시적 인식이 있기에 고경옥의 이번 시집은 서정시를 필요로 하는 상처받은 현대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눈 내리는 오후엔 너를 읽는다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말들이
눈이 되어 내리는 날
비문투성이의 발자국들이
길 위에 가득하다
철자나 띄어쓰기가 뒤엉킨 채로
문장들이 휘날리다가 허공에서
주춤 멈추기도 하지만
빠르게 발등이나 보도블록 위에서
쉽게 잊힌 약속처럼 녹는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글자들이
집중하거나 골몰하지 않아도
유난히 선연하게 보이는 오후,
길 위에서 울고 싶은 걸 참느라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모를
가슴팍 어딘 가쯤이 뜯어지면서
실밥이 터진다
눈이 내리는 건 숨겨 둔 말들이 떨어지는 것
가차 없이 부딪쳐 피 흘리는 상념
그 하얀 피가 너라고 일기장에 썼던
붉은 밤들이 한꺼번에 휘날린다
길을 걷다가
미처 읽지 못한 문장들이 쏟아지는 걸
우뚝 서서 오래 읽는다
흐려진 눈을 씻고 그 하얀 피를 만지며
먼 곳의 눈[目]을 읽는 눈 내리는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