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짓국, 반세기 넘어 만난 어머니의 맛
[미(味)추(追)홀 인천의 입맛을 찾다] - 공장 어귀에서 (3)선짓국, 반세기 넘어 만난 어머니의 맛
선짓국은 예전에 우혈탕(牛血湯)이라고도 했다. 1930년대에 이미 청진동에 선지해장국집이 들어서면서 명성을 떨쳤으며, 1931년 10월 1일 자 동아일보 4면 ‘요리’ 난에 선짓국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24)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내용을 일부 소개한다.
“선지는 토장국에 흔히 넣어 먹으나 젓국에 끓이는 것이 좋다. 처음에 고기와 곱창을 넣고 파와 후춧가루를 곱게 이겨 한데 넣고 곱창이 무르도록 끓인다. 그 후에 두부를 반듯반듯하게 썰어 넣고 선지를 채반에 건져 피 뺀 것을 한 덩이씩 들고 착착 쳐서 넣는데 얇게 하여 넣는다. 끓으면 커지기 때문이다. 선지를 처음에 팔러 다니는 장사에게 사면 양념을 잘못하여 맛이 없고, 끓이면 단단해진다. 소 잡는 데 가서 살 때에는 먼저 냉수에 밀가루와 파와 고추와 마늘과 생강을 이겨 넣고 막걸리와 후춧가루와 계핏가루를 한 데 친다. 그 후에 더운 선지를 받아서 넣어 가지고 와서 끓여 먹으면 연하고 맛이 좋다.”
두부도 썰어 넣어 먹는 것을 보면 지금 먹는 선짓국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맹물에 데쳐 초장을 찍어 먹기도 한다.”고도 하니 다음에 이렇게 먹어봐야 하겠다. 갑자기 선짓국에 대한 요리법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외국인들이 늘어나면서 소고기의 소비가 많아졌고 부산물이 남게 되자, 이를 이용해 국을 끓여 파는 가게들이 많이 생긴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볼 때 신태범의 『우리 맛 탐험』(1997)에 소개된 해장국에 대한 내용을 보면 선지해장국집은 인천이 원조일 것으로 추정된다.
“해장국이란 소뼈와 내장을 밤새 고아낸 국물에 선지·우거지·콩나물 등 건더기가 듬뿍 들어 있는 토장국으로 인천 사람은알고 있다. …… 해장국은 용동 추탕보다도 일찍 이름이 난 인천의 명물이었다. 개항이 되면서 시작된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으니 한 세기가 넘은 셈이다. …… 당시 일인을 비롯해서 청인과 양인 그리고 출입 선박의 쇠고기 수요가 엄청나게 늘었다. 인천은 딴 지방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소를 잡게 되었고 고기를 처분하고 남는 뼈·내장·선지 등이 한국촌에 지천으로 나돌았다. 이것을 주막과 술집이 도맡아 술국을 끓이게 된 것이 해장국의 시초이다.”
우리나라에서 소를 희생물로 사용한 제사의 기록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다. 제사 후에는 소의 고기를 이용하여 음식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선지도 요리에 당연히 쓰였을 것이다. 그리고 농경시대에 소는 주로 농사를 짓거나 사람이나 짐을 나르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많은 지역에서 큰 재산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쉽게 도축할 수 있는 동물은 아니었다. 시골 출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잔칫날 소를 잡으면 선지를 받아 우거지를 넣은 선짓국을 끓여 먹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축제와 잔치 때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존재였다.
아주 어렸을 때 일이다. 동네 아주머니 대여섯 분이 깜깜한새벽에 양동이를 하나씩 들고 마을을 나섰다. 그때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으니 대략 반세기가 훌쩍 넘는 시간이다. 한참 지나고 여명이 밝아오는 시간에 머리에 양동이를 이고 연신 땀을 흘리며 어머니가 집에 들어오셨다. 신새벽에 도대체 무엇을 이고 오셨는지 궁금해 양동이 뚜껑을 열어보니 벌건 선지가 하나 가득 담겨있었다.
그 당시에 소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던 때였다. 어쩌다 가족 회식을 할 때 소고기 1/4 근을 갈아서 각종 야채에 양념을 해서 불고기를 만드니 고기는 씹히지도 않았지만 양념 맛에 열심히 야채를 먹는 것도 중산층이 누리는 호사였다. 절대 가난이 지배하던 시기였기에 학교에서도 오후 수업까지 하는 4학년부터 우유에 옥수수빵을 저렴한 가격에 점심으로 급식을 했다. 물론 이것도 먹을 수 있는 학생들이 한 반의 반의 반 정도였다.
이런 실정이니 어린아이들은 영양실조로 올챙이처럼 배가 튀어나왔다. 그때 어머니들의 주 관심사는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건강하게 키우는 것이었을 게다. 당시 도축장까지 1시간을 넘게 걸어가 선지를 받아오는 어머니들의 정성과 땀이 우리를 키운 것이다. 소고기를 먹기 힘든 시대에 소를 도축하는 날을 알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누군가 소를 도축하는 분으로부터 도축하는 정보를 얻고, 시간에 맞춰 어머니들이 새벽에 삼삼오오 모여 가족들의 영양을 보충하려고 선지를 받으러 간 것 같다.
어릴 때 입맛이 평생 간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먹어본 음식이 평생의 입맛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말일 것이다. 내게도 어렸을 때 먹었던 음식 중 맛과 향이 잊히지 않는 음식이 여러 개 있다. 그중 선짓국은 맛과 식감이 유별나게 입에 남아있는 음식이다. 미끈둥하며 포슬포슬하게 부서지는 맛을 어렸을 때 봤기 때문인지 젊은 날부터 지금까지 맛있다는 선지해장국집을 꽤나 찾아다녔다. 그러다 어머니가 끓여주었던 맛과 비슷한 맛을 내는 선짓국을 만나게 되었다.
대부분 맛있다고 소문난 선지해장국집들은 사골과 내장 등 소의 부산물들을 오랫동안 고아 국물을 우리기에 국물이 진하다. 그런데 송도역전시장에 있는 ‘정아네 선지국’은 사골이나 소의 부산물을 우린 국물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처음 선짓국 한 술을 떠 넣었을 때 갑자기 어머님이 떠올랐다. ‘아, 어렸을 때 먹었던 깔끔하고 시원한 그맛…….’
여주인은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옥산에서 살다가 10살 때 부모님과 같이 인천으로 옮겨 지금까지 살고 있다. 기억 속에 고향은 외진 마을이었고,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아 굉장히 맑았으며, 큰 은행나무들이 드문드문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리고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해줘서 먹었던 맛이 잊히지 않고 지금도 생각난다고 한다. 그 맛이 궁금해 물어보자 여주인은 흔쾌히 선짓국을 요리하는 과정을 하나하나 시연하며 설명해준다.
“14년 전부터 ‘정아네 선지국’을 하게 된 동기는 우연한 계기였다. 어느 날 평화시장에서 선지를 사서 데친 다음 그냥 된장 풀고 파란 우거지가 있기에 넣고 푸짐하게 끓여 동네 엄마들에게 돌렸다. 다들 맛있다고 하고, 이곳에 가게를 열 때 그때 먹었던 선짓국이 생각나서 찾아왔다는 카페 언니의 말을 듣고 선짓국을 시작했다. 사골을 우려서도 해봤는데 손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집밥식으로 하는 것이 다른 유명한 집보다 더 맛있다고 해서 지금의 방식대로 하게 되었다.”
선지는 생선지를 쓰는데 단골 정육점에서 사 오고 십정동 것을 쓴다고 한다. 선지에 간수가 세게 들어가면 딱딱해져 몇 번 반품을 하니 적당하게 간수가 된 것을 준단다. 이틀 정도면 선지 한 통을 소모하는데 오래 놓아두면 색깔도 시커멓고 끓여도 뻑뻑해져 버린다고 한다.
선짓국 끓이는 방법을 보니 선지를 통에서 국자로 크게 떠 커다란 냄비에 넣고 중불에 은은하게 끓인다. 그래야 기포도 제대로 생기고 부드럽고 맛있게 된단다. 한참을 끓이니 물에 핏물이나 부유물들이 떠오른다. 이것을 어느 정도 익었을 때 찬물로 깨끗하게 씻어낸다. 이렇게 선지가 익는 동안에 한쪽 화구에는 물을 가득 받은 커다란 들통을 올리고 고기가 많이 붙은 소기름을 넣어 고소한 맛을 낸다. 그리고 손이 많이 가지만 농산물시장에서 거의 1년 치 파란 우거지를 사서 생으로 삶아 냉동실에 넣어놓은 우거지를 다시 씻어 들통에 넣는다. 그다음 된장을 채망에 곱게 이겨서 풀어 넣고 다진 마늘과 곱게 빻은 고춧가루, 새우젓으로 양념을 한 후 찬물에 깨끗이 씻은 선지를 넣고 펄펄 끓으면 대파를 숭숭 썰어 넣고 고추기름을 넣어 완성한다. 이렇게 된 것을 뚝배기에 담아 내놓는데 들깻가루를 첨가해 마무리를 한다.
여주인은 반찬 솜씨도 좋다. 쌀이나 대파 등 반찬거리는 거의 시댁에서 직접 농사지은 것을 가져온단다. 기본적으로 밑반찬으로 사용되는 무말랭이, 나물 같은 것은 말렸다가 사용하고 장아찌 등은 미리 만들어서 준비한단다. 무려 반찬이 5가지나 나왔다. 깍두기와 열무김치 외에도 가지볶음과 고구마줄기볶음, 콩나물무침으로 때에 따라 반찬은 바뀐다. 집밥식 반찬이다.저렴한 가격에 비해 훌륭한 만찬이다. 옛날 집에서 먹던 반찬 맛, 이곳에서 시골을 발견한다.
‘정아네 선지국’에서 어머니의 정성과 땀이 들어간 어머니의 맛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만드는 방법도 반세기 전 어머니가 했던 방식과 거의 비슷할 뿐만 아니라, 여사장의 손맛에 자신의 어머니 손맛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시골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 까닭이다.
※ 인터뷰 중
“언니가 끓이는 게 왜 갑자기 생각이 나냐? 옛날에 언니가 자주 끓여줬잖아? 하나 끓여가지고 동네 다 끓여줬잖아.”
“단골로 사 오는 정육점에 부탁하면 십정동 도축장에 가서 받아와서 신선하고, 선지도 사다가 오래 놔두면 색깔이 시커멓게 변해서 맛이 없고 뻑뻑해져.”
“간수가 이제 제가 끓일 때 그게 좌우되는 게 아니라 손질을 아예 이제 도축장에서 올 때 그 사람들이 간수를 해요. 간수가 세면 응고되게 그런 과정에서 너무 물을 많이 넣으면 선지가 딱딱해져요.”
“빈혈이 있고 그러면 선지를 먹으러 와요. 빈혈에 좋다고 그러니까 철분이 많아서 아줌마들이 많이 오고, 포장도 많이 와요. 전화로 2인분, 3인분, 5인분 등…….”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는지 가르쳐 달래. 내가 암만 가르쳐줘도 똑같은 재료 갖고도 맛이 다 틀려. 그 사람 손맛이라는 게. 희한하게 같은 재료를, 더 좋은 재료를 써도 맛이 없어. 많이 집어넣어야 맛있는 게 아니고 간이 맞아야 맛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간을 봐도 그냥 이렇게 딱 잡아가고 아, 여기는 요만큼 들어가면 되고 저기는 이만큼 들어가면 되겠네 하는데 이게 손맛인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