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강국을 만들어낸 행정과 정책의 견인차, 박양우 장관

[인중제고 사람들] (63)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 이현식 / 문학평론가

2024-11-17     이현식

노벨상 수상과 문화강국, 대한민국

편견일 수 있지만 가수 ‘싸이’가 <강남 스타일>로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떨쳤을 때도, 드라마 <대장금>이 세계 곳곳에서 히트를 쳤을 때도, 심지어 BTS가 빌보드 차트에 올랐을 때도 개인적으로는 조금 삐딱한 시선에서 바라봤었다. 인터넷에 기반한 ‘유튜브’가 상징적으로 말해주듯이 이런 것들은 모두 전 세계적 네트워크망이 발달한 덕에 일시적 유행에 편승한 것이거나 진정한 창의적 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세계적 한류 열풍이 분다고 언론에서 여러 보도를 쏟아 낼 때만 해도 그 역시 ‘국뽕’의 일종이거나 우리의 문화적 콤플렉스 때문에 다소 과장되게 반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다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깐느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동시에 수상했을 때에 가서야 어쩌면 우리의 문화적 창의력이 세계 보편적 시각에서도 인정받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 결정적 한방이 올해 한강 작가가 받은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었다. 비로소 나는 이제 한국의 문화적 창의력과 상상력이 인류 보편의 한 정점에 선 것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그 앞의 ‘싸이’, ‘BTS’, 봉준호나 <오징어 게임>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한강이 받은 노벨문학상도 작가 한강의 뛰어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문학 행위가 한국의 문화적 환경과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한국문화가 이제 인류 문명의 한 첨단에 도달한 것이라는 점을 입증한 셈이다. 문학은 모든 문화예술의 기초 중에서도 기초에 속하는 장르이다. 마치 스포츠 경기에서 육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듯 말이다. 뛰어난 번역자 덕을 보았다는 점 역시 한국문화의 저력이라는 연장선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만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문화가 이런 창의력과 성숙을 이뤄낸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우리의 문화적 힘이 축적되어 온 까닭에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 가운데에 문화를 폭넓게 지원해 온 문화행정과 문화 정책의 역할 역시 무시하기 어렵다. 87년 민주화 이후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정부의 문화정책 기조가 어울려 오늘날 ‘한류’로 대변되는 성과를 거두는 밑바탕이 되었다.

 

문화강국의 숨은 공신, 원칙을 지킨 문화행정과 문화정책 전문가

이런 성과는 묵묵히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훌륭한 문화행정가, 문화정책 전문가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양우(朴良雨)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역시 그 가운데 꼭 기억되어야 할 이름이다. 박양우 장관은 정통 문화관료이다. 1979년 행정고시를 합격한 이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잔뼈가 굵은 관료로 행정의 꽃이라는 차관(次官)을 거쳐 장관(長官)에까지 오른 사람은 유진룡 장관과 박양우 두 사람밖에 없다.

그는 중앙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를 받은 뒤 문화정책으로 실력있다고 정평이 난 영국 런던 시티대학에서 두 번째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양대학교에서 관광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경력만 보더라도 그가 단순한 행정 관료가 아니라 공부하고 연구하는 관료, 전문성에 기반한 정책 전문가임을 알게 해준다. 젊은 시절 문화부 내부의 동료 공무원들과 ‘예술행정 연구회’라는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전문가를 초청하고 주요 정책 문제에 대해 지속적인 토론과 공부를 해왔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는 뉴욕 소재 한국문화원 원장과 관광국장, 문화산업국장 등을 거쳐 관료 출신으로는 최연소의 나이에 문화관광부 차관에 올랐다.

 

 

전문성과 철학을 겸비한 문화행정가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시절 한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처럼 언급한 것은 현장에서 축적된 경험과 전문성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한류가 새롭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그는 ‘신한류’로 규정하는데 당시로서는 미래를 예견한 것이기도 했다.신한류는 방송, 음악, 게임, 웹툰, 영화 등 대중문화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세계인의 관심을 받을 만한 전통문화·예술 등 한국문화 전반으로 한류 콘텐츠를 다양화한다. (중략) 기술과 문화는 다르다. 기술은 표준화가 중요하지만 문화는 다양성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획일화처럼 위험한 게 없다. 택견이든 봉산탈춤이든 우리 문화의 다양성을 알리고 풍성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가 경제에 도움이 되려면 여러 형태로 해외에 나가고 다른 산업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다양하기만 한다고 되는 건 아니고 문화상품의 품질이 좋아야 한다. 대중음악 외에도 음식, 패션 등 우리 문화 중에는 세계적 경쟁력이 있는 게 얼마든지 있다. 국악 같은 경우도 리듬이나 창법을 서양 음악과 결합시키면 굉장히 독특한 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문학도 포기할 수 없는 분야다. 좋은 작품이 하나 나오면 영화, 게임, 만화 등 연관 부가가치가 상당하다.

 

문화의 본질적 성격 중 하나인 다양성을 언급하면서 한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장관이 이런 정도의 철학을 갖고 있었기에 코로나를 거치면서도 한국의 문화적 저력을 축적해낼 수 있었고 그 결과는 우리가 지금 모두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제물포고교에 입학하게 된 사연

박양우는 1958년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태어났다. 광주광역시가 아직 전라남도에 속해있던 시절이었다. 부유하지는 않았어도 그렇다고 아주 가난하지도 않은 집안의 6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나 성장했다. 자녀가 많은 집에서 형제 모두가 대학 진학을 한다는 건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그 가운데 소년 박양우는 공부를 잘해 집안에서도 기대를 한 몸에 모았다. 초등학교 때에도 전교 어린이회장을 하고 늘 우등생이었다. 중학교 때 그림을 잘 그려 미술선생님으로부터 미대 진학을 권유받았지만,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이 공부 잘하는 아들이 미대에 진학하는 걸 찬성할 부모는 없었다. 아버지가 바라는 삶은 공부 잘하는 아들이 고시에 합격해 고위 공무원이 되는 것이었고 박양우 역시 그런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박양우가 중학교 2학년 무렵 집안이 경제적으로 급락하는 일을 겪게 된다. 마음씨 좋은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선 탓에 재산을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길가에 나앉게 된 것이다. 부랴부랴 일가 친척이 살던 인천으로 갑자기 식구들이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다. 원래 부모님은 아들은 광주에 남아 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일고로 진학한 뒤에 가족이 있는 인천의 제물포고교로 천천히 전학시킬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제물포 고교는 그런 전학을 받아들이지 않는 학교였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고 원서접수 마감 몇 시간을 앞두고 간신히 서류를 접수해 시험을 치러 제물포고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고교시절 박양우는 처음으로 자기가 지방 출신임을 자각하게 된다. 호남사투리는 수도권의 제물포고교 학생들에게는 낯선 것이었고 그것이 어떤 거리감 같은 것을 만들게 했던 것이다. 언제나 우등생으로 인정받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생활을 하던 소년 박양우에게 새롭게 이사한 인천 숭의동 산동네를 오가며 고교 시절을 보낸 것이 즐거운 추억이 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그 시절 친구들과는 격의 없이 우정을 쌓았고 성적 역시 우수했다. 당시 제물포고교는 서울 소재 고교가 평준화되면서 전국에서 실력 있다고 소문난 학생들이 모여 그 어느 기수보다 뛰어난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를 인천에서 보냈다. 따라서 그에게 인천은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이다. 그의 약력 소개에 제물포고교가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박양우는 제물포 고교를 21회, 즉 선발집단(입시 시험을 쳐서 성적에 따라 고교에 진학하던 제도) 마지막 기수로 졸업하며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4년간 전액 등록금 면제에 매달 소정의 장학금을 지급받는 특별장학생으로 들어간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선택한 길이었다. 중앙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고시반에 일찌감치 들어가 열심히 행정고시를 준비한다. 이때 전공도 행정학과로 바꾼다. 성실했던 대학생 박양우는 연애도 못하고 동아리 활동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고시 준비에 매진해서 대학 3학년 때 행정고시에 합격한다. 중앙대에서는 딱 2명이 합격했는데 그중 한명이 박양우였다. 갓 스물을 넘긴 어린 나이에 그는 꿈을 이룬 것이다. 옛날로 치면 소년 급제나 마찬가지였다.

박양우는 고시에 합격하고 장교로 입대할 수 있었음에도 일반 사병으로 자원한다. 특권을 누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군대 역시 일반병을 선택하게 했다. 그는 경비교도대에 배속받아 여러 교도소와 구치소에서 근무했다. 그가 군 복무 시절 배운 것은 ‘생활의 긴장과 엄격한 규율’이었다. 새벽 경비 근무를 자처해 서면서 어떻게 스스로 생활을 규율해야 하는가를 배웠다. 박양우 스스로는 이때 ‘녹의(綠衣)의 천사’로서 섬기는 정신과 생활을 갖고자 했다고 한다. 군복을 입고 타인을 위해 살아가려는 마음의 자세를 가진 것이다. 이는 대학 3학년 때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 배운 기독교의 정신을 체현하려는 의지의 발현이기도 했다.

 

예술가의 꿈이 문화행정가로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군 생활을 보내고 제대해 보니 자신이 사무관으로 갈 수 있는 자리는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첫 공무원 시절은 교육부(당시 문교부)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마음에 차지 않았다. 미래는 문화의 시대라는 생각도 있었고 어릴 때 그림을 즐겨 그리고 문학을 가까이 한 영향도 있어서 다시 문화부(당시 문공부) 근무를 선택했다. 문공부는 문화와 예술뿐만 아니라 한창 관심이 솟아오르던 종교 업무도 하는 부서여서 마음이 끌렸다.

그는 문화부에서 문화재 관련 업무나 일본 대중문화 개방, 해외 관광객 유치, 남북 문화교류, 정부 정책 홍보 분야와 관련한 일을 두루 섭렵했다. 중요한 정책 현장에서 국가가 어디로 가야하고 정책이 어떻게 결정되고 집행되는가를 체험하고 고민하는 세월을 보냈다. 특히 나라가 분단된 체제에서 남북 문화교류의 중요한 실무자로 참여한 경험은 그가 우리나라의 현실을 거시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고, 관광국장 시절 중국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중국 정부와 협정을 맺어 중국 단체 관광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은 그가 노력해서 거둔 업적이다. 이런 그의 성과는 노무현 정부 아래에서 관료 출신 가운데에는 최연소 문화체육관광부 차관(次官)의 자리에 오르게 한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유연하게 현실에 대응하는 그의 능력이나 성실성도 그를 차관의 자리에 오르게 한 힘이었다.

 

 

교수 시절의 박양우

차관을 마지막으로 그는 공직을 떠나 2008년 1학기부터 중앙대학교 예술 경영 전공 교수직을 시작한다. 전문성과 경험을 토대로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기회를 새로 얻은 것이다. 이와 함께 고향인 광주에서 개최되는 국제적인 행사, ‘광주 비엔날레’의 대표이사를 맡고 중앙대학교 부총장의 자리에도 오른다. 어디 가건 열정적으로 일을 하고 성과를 냈기에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았다. 공직과는 조금 다르지만 학교와 예술 현장 역시 그의 열정을 필요로 했고 특히 후학을 양성하는 일은 그에게 가치와 의미를 주는 것이어서 각별히 애정을 더했다. 공직에서 쌓은 경험을 돌이켜 보고 그것을 온축(蘊蓄)하는 기회를 얻음으로써 사회를 위해 봉사할 소중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중대신문>과 가진 인터뷰를 한 대목 소개한다.

 

-예술경영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기본적으로 콘텐츠가 좋아야 해요. 엉성한 콘텐츠라도 마케팅을 잘하면 사람들을 모을 수는 있겠지만 결국 한계가 있기 때문이죠.”

-융합학문으로서 문화콘텐츠 분야가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하다.

“맞아요. 문화콘텐츠산업이 떠오르며 많은 대학에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죠. 하지만 예술보다 기술에 편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들어요. 물론 발전된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이 함께 어우러져야 하지만 기술자(technician)가 곧 아티스트(artist)는 아니니까요.”

-아이디어가 우선이라는 건가.

“물론 ‘기술이 먼저냐, 아이디어가 먼저냐’에 대한 가치 판단은 우선순위를 따질 수 없는 ‘가치 사슬’이에요. 하지만 백남준 선생이 아티스트인지 테크니션인지 살펴보면 그는 누가 봐도 아티스트죠. 아티스트를 소홀히 여긴다면 결과적으로 좋은 콘텐츠가 나올 수 없어요.”

 

이 인터뷰를 보면 그가 단순한 관료출신의 교수가 아니라는 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콘텐츠의 힘이나 기초 토대로서 예술, 예술가의 중요성, 창의력에 대한 강조는 그의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단단한가를 알게 한다.

 

 

그런데 그는 공직을 떠난 지 11년이 넘어 다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도종환 장관의 뒤를 이어 51대 장관(2019.04.03.~2021.02.10.)으로 정부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 무렵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취임한 것은 국가적으로 상당한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 정통관료로 잔뼈가 굵은 그였기에 현장 곳곳의 위기를 헤쳐 나아가는 데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제대로 알고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자체는 보건복지부의 담당업무이기는 하지만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예술, 관광, 종교, 체육, 문화산업, 정부정책 홍보 등의 업무를 맡고 있었기에 코로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부처였다. 시민들의 여가 활동과 밀접한 부서였고 이제 막 성장하고 있는 문화산업과 관광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박양우가 장관에 취임한 2019년 관광객 1,750만 명을 달성해 2020년에는 관광객 2,000만 명이라는 야심 찬 목표를 잡고 동분서주할 때 코로나가 터졌다.

 

코로나 위기에서 빛난 장관의 능력

행정 관료로서 그는 위기 때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공격적으로 예산을 확보해서 코로나로 위축되기 쉬운 관광이나 문화산업, 예술 활동 등, 여러 영역이 흔들리지 않고 성장할 수 있도록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을 펼친다. 실제로 그가 취임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은 9.4%나 증액되는 성과를 거둔다. 정책의 힘은 예산에서 나온다는 것을 관료 출신인 장관이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기에 코로나 위기를 문화, 체육, 관광 분야가 잘 넘길 수 있었다. 종교계를 설득해 코로나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는데 협력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른바 K-방역은 당시 세계적인 모범이었다. 평소에는 오히려 우리 쪽에서 협력을 부탁해야 했던 영국, 프랑스 등 문화 선진국의 장관들이 오히려 박양우 장관에게 온라인 회의를 요청하는 일이 쏟아져 들어왔었다고 한다. 문화 분야야말로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은 곳이었기에 한국의 노하우를 그들이 배우려 했다. 밀려드는 인터뷰와 온라인 회의에 힘은 들었지만, 한국의 위상이 달라진 것을 실감하는 기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코로나 위기를 잘 헤쳐 나왔기에 우리의 문화는 팬데믹 이후 더욱 날개 단 듯이 비약적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다. 이것도 따져보면 정책적, 재정적 지원이 더욱 적극적으로 확산된 덕이 크다. 그 주역이 박양우 장관이었음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외에도 그는 문화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놓기 위해 그간 소극적인 인식을 과감히 전환하여 게임 산업을 육성시키는데 기반을 놓은 장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광주 비엔날레 대표이사와 ‘목사 박양우’로서의 새로운 인생

퇴임 이후 그는 중앙대학교의 교수직으로 복귀했다가 다시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의 자리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광주비엔날레가 내홍을 겪어 조직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던 때였다. 그가 부임해 조직을 정비하고 14회 행사를 잘 치러내면서 광주비엔날레는 명실공히 세계 3대 비엔날레로 확실한 위상을 갖게 된다. 광주비엔날레는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국제적 비엔날레로 자리 잡았다. 2024년에는 비엔날레 30주년을 맞아 15회 전시를 지난 9월에 개막했다. 올해는 더구나 도시 전체를 30여 개의 파빌리온(전시회 및 박람회 등에 이용되는 가설 건축물)으로 꾸몄다고 한다. 30여 개의 국가, 도시, 기관 등 다양한 창의적 예술 주체가 참여하며 광주의 양림동과 동명동 일대를 비롯한 도시 전역에 31개 파빌리온이 손님들을 맞고 있다.

더구나 미리 예상한 일이 아닌데 한강 작가와 협업을 통해 행사의 주요 타이틀에 대해 감수를 맡기고 개막식 공연의 가사를 작가가 직접 집필하도록 부탁했는데, 행사 기간 중에 들려온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행사를 더욱 빛나게 했다고 한다. 미리 알고 한 일이 아닌데도 결과적으로 박양우 대표이사의 선구안이 빛을 발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특기할 점은 그가 장관 퇴임 이후 목사 안수를 받아 ‘박양우 목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학 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그는 고시 합격 후에도 목사의 길을 걸을까 고민할 정도로 목회자의 길에 관심을 가졌었다. 문화부 관료 시절 그는 유명한 애주가이기도 했다. 술로는 문화부 내에서 당할 사람이 없을 만큼 잘 마셨으나 신학공부를 하며 술도 끊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술을 각별히 좋아하거나 술맛을 알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저 ‘일 때문에’, ‘몸이 받아서’ 그랬던 것인데, 신학을 공부하면서 미련 없이 술을 끊었다고 한다. 나이가 60이 될 무렵 신학 공부를 시작해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써 실천한 것이다. 자신을 한없이 낮춰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욕망으로부터 초탈한 삶을 살고자 선택한 것이었다. 삶의 마지막까지 봉사하며 자기를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나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복음을 전파하며 살겠다고 한다.

 

 

인간 박양우는 그가 서 있는 곳 어디에서나 열심히 노력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얻고 또 누렸다. 관료 출신으로는 최고의 자리인 장, 차관을 지냈고 지식의 전당인 대학에서 교수와 부총장을 지냈다. 국제적인 문화행사를 주관하는 조직의 대표로 세계를 누비기도 했다. 사회적 삶의 마지막 단계로 그는 마침내 성직자가 되어 타인을 위해 본격적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런 그가 가장 원했던 삶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모두가 소중하죠. 돌이켜 보면 내가 있던 그 자리에 가장 의미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나이 또래에 해야 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마음이 특별히 끌린다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해 보면 일종의 구원 투수로서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해요. 문화부 공무원으로 일할 때에도 불가피하게 나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터졌고 그럴 때 내가 소용된다면 그 일을 했어요. 다만 선발투수는 못되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차관을 한 것이나 장관을 한 것 역시 일종의 구원투수였어요. 당시에는 제게 구원투수로서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광주 비엔날레도 마찬가지입니다. 3대 대표이사 맡을 때도 7대 대표이사 맡을 때도 그랬어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일종의 소방수나 구원투수로 투입되었던 겁니다. 선발투수의 역할을 한 적은 거의 없어요.

 

겸손의 말이겠지만 사실 ‘구원투수’는 그 역할과 능력이 분명해야 기용될 수 있는 자리이다. ‘선발투수’는 가끔 운에 의해 발탁되기도 하지만 구원투수는 위기의 상황에서 해야 할 역할이 분명하고 그만큼 검증된 사람을 투여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만나보니 인간 박양우는 소탈하고 격의 없으면서 일을 잘하는 사람 특유의 느낌을 주었다. 이제 앞으로 설교하는 목사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리라면 어디에나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한다. 그러나 유능하면서도 열정적인 그가 그냥 목사로 설교만 하면서 봉사하는 삶만을 살기에는 뭔가 아까운 느낌이었다. 60대 중반을 넘겼다고 하지만 여전히 앞으로 가야 할 길이 훨씬 많이 남은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