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광장에 소녀시대의 '다시만난세계'가 울려 퍼졌다
탄핵 가결 선포와 동시에 여의도 광장에 100만 시민 모여 환호 탄핵 요구 집회 내내 2030 여성들의 연대 문화 돋보여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리자 광장에서는 환호의 함성이 서서히 올라왔다. "가결된거야? 맞아?"라고 서로 확인하며, 하늘 높이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순간 하늘 위로 수많은 풍선이 날아 올랐고, 소녀시대의 노래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퍼졌다. 애국가도, 투쟁가도 아닌 소녀시대의 노래가 말이다.
바로 이 장면이 2024년 12월의 민주주의를 상징한다. 시민들은 12월 3일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와 국회에서의 계엄령 해제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군인들이 유리창을 부수고 국회를 들어가고, 보좌관들이 온갖 집기를 가져다 막고, 국회의원들이 담을 뛰어 넘어 겨우 표결 장소로 집결하는 장면은 충격이었다. SNS에서는 내가 사는 동안 계엄이라는 단어를 실제로 듣게 될 줄은 몰랐다며,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선을 넘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놀랍게도 이는 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바람 불면 촛불은 꺼진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꺼지지 않고 빛나는 무언가를 찾았다. 그 선두에 아이돌 팬들이 있었다. 그동안 '연예인만 따라다니는 한심한 여자애들'로 너무나 쉽게 낙인 찍혔던 이들이 응원봉의 불을 켰다. 자신을 표현하는 것,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빛나는 것을 들고 꺼지지 않을 투쟁을 선포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자신이 깃발을 만들고, 동료 시민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응원봉을 들고 있는 젊은 여성이 혼자 있으면 주저없이 동행이 되었다. 안전하고, 평화롭지만 누구보다 꿋꿋하게 오래 남아 있는 사람들이 됐다. 실제로 탄핵 가결 이후에 가장 오래 남은 사람들은 2030 여성들이었다.
이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고, 집회 문화의 새로운 장면으로 주목받자 "원래 길바닥에서 죽치는거 잘하는 애들이 깨어있는 척 하는 것"이라는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역으로 비웃듯 그녀들은 스스로 말했다.
집회에서 만난 이가을 씨(33살, 가명, 서울 거주)는 "맞아요. 우리는 추운 날 길거리에서 버티는 걸 잘해요. 방송국이 사전 녹화 스케줄을 새벽에 잡거든요. 인권유린이라면 우리도 지긋지긋하게 당하죠. 그래도 전 그런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당신들의 인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나는 그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가는 거라고요. 왜냐면 팬들은 누구보다 댓가 없이 나누고, 응원하는 걸 잘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이라고 말이다.
실제 12월 7일 여의도 집회를 기준으로 20대 여성 참가자가 전체의 19%를 차지해 가장 높았다. 다음으로 50대 남성이 13%, 30대 여성이 약 11% 순으로 뒤를 이었다. 반면 20대 남성 참가자 수는 전체의 3% 정도에 불과했다. (출처 - 서울시 생활인구 현황)
이런 현상에 대해 BBC 코리아가 진행한 인터뷰에서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성별로 다른 세대 문화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여학생들의 경우에는 SNS를 통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네트워크가 잘 형성되는 경향이 있다며, 응원봉으로 대표되는 콘서트 문화가 옥외 집회의 성격과 싱크로율이 높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남학생의 경우는 일상적으로 형성돼있는 커뮤니티 문화가 적은 편이며, 20대 초반에 군대에 갔다오면서 온라인 커뮤니티의 접속 단절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남성들이 다수인 온라인 커뮤니티로 가장 잘 알려진 모 사이트는 2024년 전체 커뮤니티 순위 2위로 113만명이 접속했다. 그 외에도 소위 '남초 커뮤니티'는 다수 존재하며,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무수히 많은 네트워크가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안다.
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단순히 취미활동, 놀이, 여가생활의 연장으로 보는 것은 여성을 정치적 주체로 보지 않는 오래된 편견의 산물이다. 왜 2030 남성들이 광장에 나오지 않았는지, 그들은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인지에 대한 연구를 위해 굳이 여성들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
여성들의 집회 참여가 갑자기 늘어난 것은 아니다. 사회의 주요 이슈가 있을 때마다 대규모 집회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여성이었다. 다만 이번에 두드러진 현상은 여성들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며, 본인 세대의 주요 이슈가 젠더 문제임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집회에 참석한 '젊은 세대'로 통칭하지 말고, 이 집회의 다수가 '여성'이었음을 분명히 밝히라고 말이다. 이들은 노동자, 장애인, 퀴어, 청소년 등 사회적 소수자 혹은 약자로 불리는 이들과의 연대 의식도 분명히 했다. 모두가 평등하고 안전하게, 불쾌하지 않은 집회 문화를 만들자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됐다. 주최측은 이런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여의도 광장 주변의 거의 모든 카페와 음식점에 시민들의 '선결제'가 이어지고, 선결제 매장을 찾을 수 있는 맵과 이용 가능한 화장실 맵이 등장했다. 젊은 여성들은 오히려 선배 세대, 중장년 층과 함께하는 집회를 만들기 위해 "케이팝만 틀지 말고, 우리에게 민중가요나 옛날 노래도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집회 참가자들을 위해 선결제는 해 두었지만 알릴 수 있는 방법을 몰랐던 어른들은 응원봉을 든 사람들을 붙잡고 이 소식을 퍼뜨려 달라고 부탁했다. 어른들의 소중한 마음을 알아 달라며 SNS에 글이 올라왔을 때 셀 수 없이 많은 감사의 말들이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요즘은 세대 간 장벽이란 말을 습관적으로 쓴다. 젊은이들은 어른 세대를 꼰대라 부르고, 어른 세대는 MZ라 불리는 이들을 불신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광장에서 이들의 모습은 달랐다. 서로 존중하고 배우려 노력했다. 이렇게 만나면 될 일이다.
<다시 만난 세계>는 소녀시대의 데뷔곡이다. 가사 맨 마지막을 인용해 본다.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
이 순간의 느낌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
이 노래만 들으면 눈물이 난다는 이들의 서사는 무엇일까. 탄핵 결정은 이제 헌법재판소로 넘겨졌다. 그 때까지 노래는 멈추지 않을 것이고, 소녀들은 지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가만히 있지 않기로' 결심한 세대고, '여성들의 연대는 강하다'는 것을 경험한 세대다. 이를 성별 갈등의 요소로만 보는 것은 편협하다. 오히려 새로운 민주주의의 얼굴이 보다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형태로 발전할 수 있도록 모든 세대가 지원할 일이다. 그것이 광장의 교훈이다.